구름에서, 구름

조지연展 / CHOCHIYUN / 趙智衍 / painting   2013_0403 ▶︎ 2013_0408

조지연_구름에서, 구름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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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40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제2전시장 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82.2.734.1333 www.ganaartspace.com

구름의 무상성 ● 조지연은 캔버스 화면에 손가락으로 물감을 발라 하염없이 문지른다. 그것을 표현하는 스타일, 매너가 흥미롭다. 작가는 붓을 쓰지 않고 손으로 그린다. 정형화된 붓질의 규격에 의한 제한된 그림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으로, 신체의 흐름과 유동하는 마음의 심난한 감정의 골을 그대로 끌고 가는데 무척 용이하기에 그럴 것이다. 작가는 지문이 닳도록 화면의 피부를 간절히, 하염없이 애무한다. 그러면 이내 흰색과 청색 물감이 두루 섞여 희뿌염하고 맑고 투명하고 더러는 아스라한 하늘빛과 구름의 자취가 몽실거리며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이내 사라지고 자취를 감출 것들이 잠시 몸을 빌어 저렇게 환각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구름의 자취이자 안개가 스물거리는 풍경, 혹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킨다. 안으로 말려 고부라지면서 증식하는 모양이 흡사 태극문양이나 곡옥 같고 혹은 화염문양 같은 것들이다. 혹은 하나하나 개별적인 생명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누군가의 얼굴일까, 흩어져가는 몸뚱아리일까? ● 그런가하면 화면 가득 어떤 기운들이 가득 차오른다. 뜨거운 수증기나 모락거리는 열기, 봄의 아지랑이 또는 햇살이 감촉된다. 어디론가 저희들끼리 몰려가며 사라져갈 것들이 마지막 온기를 마음껏 방사한다. 그 기운에 눈이 멀듯 하다. 작은 단위들의 일정한 패턴으로 채워진 화면은 단색 톤의 섬세한 뉘앙스가 화면을 통합해준다. 모노톤의 화면은 차가운 블루로 가득하지만 그 안은 걷잡을 수 없는 존재들의 뜨거운 가득함이 있다. 수많은 존재이자 결국 하나의 세계가 다가온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일 것이다. 생과 사도 동일하다.

조지연_구름에서, 구름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_2012
조지연_구름에서, 구름_캔버스에 유채_130.3×162cm_2012
조지연_구름에서, 구름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2

조지연의 이 그림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내 한줌의 먼지나 연기로 사라져 버린다는 아득한 사실에 대한 추모의 노래 같다. 그래서인지 화면은 출렁이고 굴곡지는 리듬감으로 가득하다. 흡사 출렁이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파도처럼 일어나는 해일처럼 어질하다. 정지된 부동의 화면에 생기와 움직임을 부여하는 곡선들은 동시에 생명을 은유한다. 그것들은 이내 소멸의 길을 간다. 작가는 작품에 「구름에서, 구름」이란 제목을 붙였다. 아마도 이 그림은 구름이란 존재에 대한 형상화나 그에 대한 기억 또는 몽상일 것이다. 사실 구름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존재다. 그것은 명확한 형태를 짓지 못하고 수시로 흩어졌다 모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그때그때마다 우연적인 몸 하나를 얼핏 보여주며 흐른다. 우리가 대지에 누워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본다는 것은 사실은 붙잡을 수 없고 형체 없는 것들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내 물과 바람과 무無로 종적을 감출 것들이라는 허망함과 무상함을 안겨주는 순간이다. 아마도 유한한 목숨을 지닌 인간들은 자신의 육신 역시 저 구름처럼 잠시 머물다 이내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선명한 예감에 아프게 사로잡힐 것이다. 그래서 구름은 인생의 무상성과 죽음을 은유하는 상징이 되었다. 아울러 구름은 새로운 존재로의 환생이나 생명, 기운을 은유하는 양가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처럼 죽음과 삶은 한 몸이다.

조지연_구름에서, 구름_캔버스에 유채_145.5×97cm_2012
조지연_구름에서, 구름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_2012

인간은 죽음을 겪고 이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사유하는 존재가 되었다. 죽음을 본 그 어느 날, '만드는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이 된 자신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사랑과 추억이라는 것도 생겼으리라. 모든 이미지는 죽음을 환생시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다. 모든 문화는 그 죽음을 어떤 식으로든 해명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애초에 이미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출발했다. 그래서 모든 이미지에는 죽음의 그늘이 서늘하게 드리워져있다. 시간의 승리 앞에 사라져버린 모든 것들을 안스러이 추억하고 가슴에 담아두기 위해 이미지는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미지란 것은 시간의 힘과 죽음에 대항하고 저항하려는 인간의 의지였지 않았을까?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이를 받아들이되 대신 이미지를 빌어 그 죽음/시간에 저항한다. 이미지를 통해 인간은 위안을 얻고 시간과 죽음에 저항하고 견뎌낸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죽음은 무엇보다도 이미지이고 또 이미지로 산다."고 말했다. 조지연의 구름은 사라진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의 이미지 같다. 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무상성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구름이미지다. 시간이 지나면 지상에 존재하는 생명 있는 것들은 결국 사라진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생명이다. 작가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여 급기야는 형태의 완전 소멸을 가져오는 구름의 흔적을 빌어 존재의 무상성(無常性)을 보여준다. 소멸을 앞두고 있는 존재는 그 무상함으로 인해 더없이 헛되다. 시간의 변화함에 그저 내맡겨지는 존재가 모든 생명체이며 따라서 현재 순간의 그의 외형으로 비쳐지는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음성이 들린다.

조지연_구름에서, 구름_캔버스에 유채_100×80.3cm_2012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 태도는 서양인의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태도(죽음을 '나의 것'으로 바라보고 가능성을 지닌 한 현상으로 파악하는 과학적이고도 객관적인 성찰과 죽음을 현존재의 본래성으로서의 실존성 획득의 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실용적인 인식 태도)와는 달리, '관조적' 이고 '관념적'이다. 한국인은 저승을 이승의 연장선상에서 항상 파악한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즉 혼과 귀와 백의 핵분열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혼은 승천하고, 백은 땅으로 스며드는데 비해, 귀는 공중에서 떠돌아다니다가 기일이 되면 제사에 참석하게 된다. 이 중 귀와 백은 항상 산 자와 관련을 맺으며, 풍수지리설과 연관되어 지속적으로 산 자(자손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이렇게 볼 때 죽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존재 전이일 뿐, 별반 차별이 없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한국인의 사생관은 '현세적이면서도 내세적'이고 '내세적이면서도 현세적'이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지적된다. 그렇게 한국인의 전통적인 생사관에서는 우주적 생명과 인간의 생명은 유기적이라 생각해왔다. 따라서 인간 중심의 생사관은 애초부터 없다. 우주로의 환원적 사고 속에는 인간이 살고 있는 땅과 공간으로서의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삶과 죽음은 유기성을 얻는다. 우주적 생명과 인간의 생명이 하나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조지연의 그림 속에서 구름은 생과 사가 구분없음을 일러주고 존재와 무가 결국 동일하다는 사실을 서늘하게 안겨준다. ■ 박영택

Vol.20130403a | 조지연展 / CHOCHIYUN / 趙智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