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Landscape

김수영展 / KIMSUYOUNG / 金秀暎 / painting   2013_0502 ▶ 2013_0522 / 월요일 휴관

김수영_work No.7_리넨에 유채_130×130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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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0502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원앤제이 갤러리 ONE AND J. GALLERY 서울 종로구 가회동 130-1번지 Tel. +82.2.745.1644 www.oneandj.com

건축적 순간에서 회화적 지연(pictorial delay)으로 ● 현대미술의 경향으로 볼 때 회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문젯거리처럼 인식되곤 한다. 그것은 회화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회화를 둘러싼 수많은 의견들, 특히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로부터 발생한 오해 또는 과잉해석에 따른 양상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경우 회화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유사한 주제의 동어반복적 현상과 매체로서의 회화에 대한 가능성을 다루는 시도가 미비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치 예술의 종말이 회화의 종말처럼 회자되곤 하는데 이는 아마도 모더니즘 회화의 강령이었던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집단적 거부 반응(혹은 엘리트주의에 빠진 한국미술이 가진 특성의 반영)일 수도 있다. 이미 인상주의의 탄생으로부터 출발한 모더니즘은 서구 고전주의 형식을 보다 이념적으로 거절한 미국 모더니즘에 이르러 엄격한 강령으로 바뀌었고 평면성과 함께 형상과 서사의 거부를 통해 관념을 구체화한다. 단토의 종말론은 선언적이라기보다 미술을 둘러싼 창작과 해석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단토에 따르면 "모더니즘은 회화 자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회화를 갖고 회화를 파고드는, 내부로부터 비롯되는 일종의 집단적인 탐구였다" (아서 단토,『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김광우 옮김, 미술문화, 2004, 144쪽). 단토는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원근법으로 대표되는 고전회화의 특질을 거부, 평면성이야말로 회화만의 특권이라 제시한 점은 언급하며 '악명 높은'이라는 수식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평면성은 이른바 진보적 회화의 순수성을 제대로 드러내는 행위이자 이는 조각과 회화의 관계를 분리하기에 이른다. 즉 모더니즘 회화에서의 평면성은 고유한 것으로 봉인시킨 셈이다. 이른바 이미지에 부여된 성상을 없앤 후 화가 자신의 비판을 통해 정신이 현현한다는 그린버그의 의견은 다른 관점으로 볼 때 다원적·혼성적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고 있기에 충분히 부정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많다. ● 적지 않게 서구미술담론의 지배 아래에 놓여있는 한국현대미술의 경우로 되돌아가 보자. 우리의 모더니즘이 과연 서구 모더니즘과 동일한 선상에서 해석되기란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근대적 진보란 결국 서구가 이룩한 예술의 체제를 한번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전통적 관습과 서구의 지배담론의 대립으로부터 독립과 의존 사이를 방황하고 있는 게 여전히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굳이 되묻는 것은 김수영의 회화를 통해 보다 근원적인 물음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어서이다. 알다시피 김수영의 회화에는 서사가 없다. 현대인이라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법한 국제주의양식의 모던건축물의 표면을 회화로 옮기는 그의 작업은 일정 부분 모더니즘 회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여전히 회화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많지 않은 작가 중 한 명임에 분명하다. 작업에서 쉽게 발견되는 평면성, 기하학적 요소들, 추상성 등은 모던미술의 양상으로 판단될 수 있는 단서들이다. 그렇지만 그의 회화는 틀림없이 실존하는 대상들을 재현한 그림이며 여기서의 평면성은 모더니즘 미학이 추구한 평면성과 차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나는 형식적 해석보다 작가로서 김수영이 도시·건축·회화와 맺는 긴밀한 관계를 조망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오늘날 굳이 사진이 아닌 회화를 통해 대상을 재현하는 방식을 '회화적 지연'이란 관점으로 풀어보려 한다.

김수영_work No.2_리넨에 유채_72.5×72.5cm_2012

건축적 순간(architectural moment) ● 근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는 "정확성은 결정적이며 명확하면서도 진실한, 변하지 않고 영속적인 것, 곧 건축적 순간을 창조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프레시지옹』, 정진국·이관석 옮김, 동녘, 2004, 91쪽) 라고 말한다. 여기서 건축적 순간은 기하학적인 형태의 물질이 우리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 '건축'이란 대상이자 존재로 등장하는 순간을 지시하는 듯하다. 알다시피 르 코르뷔지에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논쟁적이다. 그의 기하학적 질서와 보편성은 고전주의 건축에 투영된 황금비가 지시하는 이상적 건축관을 기계기술복제시대의 대량생산체제를 위한 표준화라고 평가 받는다. 이른바 쾌적하고 기능적인 보편적 주거의 패러다임을 제안했지만 인간의 삶을 기계적 표준에 의해 재단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와 김수영의 관계는 김수영이 모던건축만을 회화의 주제로 다루게 된 배후에 바로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떼다비따시옹 (Unité d'habitation) 건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주의적 사상을 반영하는 속도 기반의 세계를 위해 불필요한 동선을 과감히 제거한 상태의 유니떼다비따시옹은 르 코르뷔지에의 세계관이 압축된 삶의 기계였다. 주거·소비·교육·여가가 한데 모인 소형도시로서의 건축은 경제주의적 생산성에 기반한 최소한의 기획도시인 셈이다. 그렇다면 르 코르뷔지에에 대한 김수영의 관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06년부터 김수영이 프랑스와 독일의 다섯 개의 도시에 지어진 유니떼다비따시옹을 추적한 것은 단순히 르 코르뷔지에에 대한 존경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김수영의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이념을 회화로 옮기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학생 김수영의 눈을 사로잡게 된 것은 유니떼다비따시옹에 투영된 이념이 아닌 기하학적 요소로 절묘하게 구성된 파사드의 추상성이 주는 조형성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건축의 효용성 이전에 간결한 기하학적 요소들 간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형태들의 하모니가 만든 '건축적 순간'의 체험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르 코르뷔지에가 체험한 건축적 순간과 거의 유사한 경험을 그도 자각했다는 점이다. 이는 시대착오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역사가 선형적인 것인가? 모더니즘 미학은 여전히 실존하고 있으며 모더니즘 이후의 양상이란 과거의 전복뿐만 아니라 이를 '또 다른 예술적 사건'으로 호출할 수도 있을 터이다.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흔적과 아우라. 흔적은 흔적을 남긴 것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가까이 있는 것의 현상이다. 아우라는 설령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있는 것의 현상이다. 흔적 속에서는 우리가 사물을 소유한다. 아우라에서는 사물이 우리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M 16a, 4, 발터 벤야민,『아케이드 프로젝트 – 도시의 산책자』, 조형준 옮김, 새물결, 71쪽)

김수영_work No.3_리넨에 유채_104.5×97cm_2013

레디메이드로서의 모던건축 ● 김수영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건물 표면의 일부를 그린다. 현대인에게, 특히 한국인에게 지나치게 익숙한 창 밖 풍경을 그대로 옮긴 듯한 무심하고 익명적 형태의 건물 표면은 근대 이후 '이미 주어진' 삶의 조건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이 같은 작가의 접근으로부터 뒤샹의 마지막 작업을 연상할 수 있다. 우리에게 뒤샹은 "샘"으로 대표되는 레디메이드 작가로만 연상되기 쉬운데, 그 역시 화가였으며 그는 그린다는 행위를 개념적으로 전환했을 뿐, 늘 화가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큰 유리」만 보아도 그가 화가로서의 태도를 놓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단 캔버스 대신에 유리 위에 납으로 그림을 그린 점이 바뀌었을 뿐이다: "유리는 그림의 바탕으로서 그 투명성 때문에 흥미가 있었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그 다음이 색채인데, 유리 위에 그리면 양쪽에서 볼 수 있으며 물감을 유리 사이에 가두어 버리면 산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색채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 시각성 속에 순수하게 남아 있다. 이 모든 것이 기술적 문제를 형성했고 그것은 중요했다. 게다가 원근법도 매우 중요했다.「큰 유리」작품은, 완전히 무시되고, 악평을 받은 원근법을 다시 살리는 일이 되었다. 내게 투시도법은 절대적으로 과학적이 것이 되었다." (마르셀 뒤샹, 피에르 카반느와의 대담, 정병관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78쪽) 뒤샹은 형식주의 혹은 반형식주의 모두를 거절한 인물이었다. 레디메이드 역시 형식에 대한 도전이자 이에 반하는 새로운 형식주의 속에 갇히지 않기 위한 또 다른 포석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뒤샹이 기성품을 선택하는 조건을 들어보면 위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 오브제 선택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2주 후에 당신들은 그것을 좋아하든가 싫어하든가 하게 되기 때문이다. 미학적 감동이 없는 일종의 무관심성에 도달해야만 한다." (위의 책, 95쪽) 뒤샹은 취향의 부재를 언급하는데 기계적 반복이야말로 회화적 관습 밖에 놓여 있다고 덧붙인다. 레디메이드의 관점으로 도시나 건축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아방가르드를 넘어 개념미술가들이외부를 바라보는 방식으로부터 나타난다. 이른바 평면적 사진의 등장으로 베른트와 힐라 베허, 댄 그레험, 에드 루샤 등이 산업화 이후 대량생산된 건물, 주택 등을 오브제처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베허 부부는 1950년대부터 시작한 유형학적 건축사진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진을 위해 회화를 포기하기 전 나는 몽타주에 관한 아이디어를 갖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집들이 둘러싼 금광의 건물을 찍는 것이죠. 나는 건물들의 주변을 흐리게 만들어서 파사주 이미지만으로 몽타주를 하길 즐겼습니다." (James Lingwood, "Bernd and Hilla Becher, la petite musique des haut-fourneaux", Art Press n°209, janvier, 1996, quotation from "Planitude" of Eric de Chassey, Gallimard,, 2006, p. 128) 이 같은 관점의 전환은 레디메이드 개념을 확대시켰고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인간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20세기 중반 이후의 환경의 변화를 잘 알려준다.

김수영_work No.4_리넨에 유채_140×200cm_2013
김수영_work No.6_리넨에 유채_119.7×120cm_2012~3

김수영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유사한 모던건축의 표면을 서울에서 다시 발견한다. 2008년『Landscape』, 2011년『Balance and Symmetry』로 이어진 개인전은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떼다비따시옹 연작에서 보여준 방식보다 더욱 평면성이 부각된다. 특히『Balance and Symmetry』에서는 전시표제가 지시하듯 건축물의 정체성이나 도시사회학적 관점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건축물의 익명성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다. 이러한 변화는 아마도 도시의 산책자로서 김수영에게 건물은 가까이 할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는 숭고한 대상이라기보다 그에게 익숙한 지표, 즉 흔적처럼 느껴진다. 찍어낸 듯 익숙한 선들, 익숙한 반복적인 창들의 형태는 두 개의 화면으로 분리되어 점점 더 추상에 가까워진다.「Both Sides」(2011)의 경우 건물을 표상하는 수직의 좁고 긴 요철의 흔적은 재현적이라기보다는 실크스크린으로 프린트한 것처럼 더 납작해졌고 표면에는 붓질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근작들을 살펴보면 마지막 개인전에서 보여주었던 대칭적 구조가 전달하는 다소 예민해 보이는 긴장감에서 벗어나 화면 구성 자체를 더욱 세분화 한 후 색채, 면, 그리고 창(사각형)들의 크기와 형태를 변주해 전에 비에 훨씬 속도감과 리듬감이 풍부해진 것을 볼 수 있다.

김수영_work No.1_리넨에 유채_190×170cm_2012~3

여성주의적 미니멀리즘 : 제거와 지연 ●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점은 무엇보다 김수영이 어떤 이유로 사진이 아닌 회화로 건축물을 재현하는 가였다. 초기작이 건축물의 일부를 정확히 재현하는데 무게를 두었기에 이러한 물음은 더 컸다.「유니떼다비타시옹」연작 이후 7년이 지난 현재 그의 작업은 전에 비해 회화적 성격이 보다 짙어진 게 사실이다. 특히 평면성을 다루는 방식은 보다 구체적으로 진화한다「Work」연작(2012-)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적 깊이를 제거함으로써 건축물의 양식적 특질들이 서로 중첩된 하나의 상황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도시의 일부를 발췌한 모종의 몽타주로 완성된다. 건물들 간의 관계와 거리의 부재는 기호학적 의미로써 건축이 지닌 사회적 위상이 파기되는 지점이다.「Work No. 6」의 경우 이제 파사드가 아닌 건물 표면에 붙인 타일과 벽돌의 질감이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Work No. 8」에서는 세 개의 각기 다른 질감을 가진 건축물의 표면을 재현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익명적 모던 건축물의 전형적인 표면이다. 어쩌면 김수영은 이 명명되지 못한 표면들의 차이 속에서 도시와 건축의 추상적인 상태를 발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김수영의 회화는 실재를 일부 발췌하여 화면으로 옮기는 작업이지만 동시에 실재 안에서 일종의 '허구성'을 발굴하는 셈이다. 여기서 허구성은 이분법적 논리를 해체하여 진짜와 가짜, 참과 거짓,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이탈리아의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알도 로시(Aldo Rossi)에게 도시란 "보이지 않고 부재하는 추상이자, 자율적이고 전제적인 구조요, 순수한 잠재성으로 이루어지면서도 형태만이 아니라 기분, 분위기, 그리고 정서들까지 생산하는 조직망" (마이클 해이스,『건축의 욕망(Architecture's Desire: Reading the Late Avant-Garde)』, 조순익 옮김, 40쪽) 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도시를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가능성, 결코 닫히지 않는 관계들의 집합, 사물들, 대응들의 무제한적 혼합" (같은 책, 40쪽 ; See Aldo Rossi, A Scientific Autobiography, MIT Press, 1981) 이라고 제시한다. 건축이론가 마이클 헤이스(K. Michael Hays)는 로시가 도시를 건축적 무의식이 잠재하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사유한다고 해석한다. 더불어 건축으로 구성된 도시를 정신분석학적 대상으로 환원하여 도시를 이미 주어진 대타자와 마찬가지라 덧붙인다. 기호학적 의미로써 대상의 지시성이 약화되고 대상의 물질적 성질이 부상하고 있는 이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김수영_work No.8_리넨에 유채_88×85cm_2013

모더니즘 이후, 예술의 담론은 쉴 틈 없이 경계, 여백, 타자의 등장이 얼마나 혁신적인가를 설파한다. 어느 사이 이 같은 저항적 담론마저 상투적인 언어가 되어 복제되곤 한다. 언어의 성찬이 예술의 포이에시스(과정과 노력)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으며, 반대로 작가들이 과도하게 이론적 개념에 의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작가로서 김수영은 다소 어눌한 편이다. 세상의 변화에 쉽게 적응하는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논리를 만들기 위해 작업을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집요하리만큼 삶과 도시, 일상과 건축 사이의 심리적·물리적 체험을 회화로 재현한다. 숭고함이나 절대적 미학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작가가 세상을 인식하는 자신만의 틀을 갖고 있기 마련일터. 김수영이 건축으로부터 받는 '건축적 순간'은 앞서 얘기했다시피 건축의 외형이나 기능 또는 브랜드가 아닌 건축소 (건축소 architectemes : 마이클 헤이스는 언어에서의 음소들(phonemes)과 마찬가지로 건축 역시 의미 이전에 건축을 구성하는 다양한 물리적·조형적 요소들의 관계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는 건축소들은 건축적 사고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이룬다. 같은 책, 32쪽) 일 것이다. 이들의 관계로부터 공간화를 이루고 두께와 높이를 통해 실제적인 건축으로 완성되겠지만 김수영에게 부피나 깊이는 중요하지 않다. 당연히 높이도 그의 관심은 아닌 듯하다. ● 만약 여성주의적 첫 번째 관점이 투영된 지점이 건축이란 대상의 높이, 깊이, 두께, 부피 및 정체성의 제거에 있다면, 두 번째는 바로 지연의 개념일 듯하다. 사실 지연은 매우 복합적이고 난해한 개념이다. 할 포스터가 '지연된 작용'(defered action)이란 개념을 통해 외상이 표면화(재약호화)되는 현상을 진단한 바 있다. 김수영의 지연 개념 역시 포스터의 의견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 무엇보다 보편주의적 성격의 모던 건축을 회화의 대상으로 삼아 시대착오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 글의 초입부에 언급했던 모더니즘 미학과 한국에서의 상황은 지연된 작용의 한 예라 볼 수 있다. 굳이 유사한 대상들, 혹은 같은 대상들을 반복적으로 다시 그리는 행위는 모네부터 뒤샹과 워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작가의 특질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은 이 반복적 행위를 통해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번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종이 위에 유화로 그린「무제」연작 (2013)이 약간의 단서를 제시하는 듯하다. 이 작업들은 텅 비어 있거나 몇 개의 선들만이 남아있는 거의 순수추상에 다름 없어 보인다. 과연 추상적 시도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예측할 수는 없으나 김수영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감지할 수 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건축-대상들을 관찰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그들' 가까이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적어도 내게 이러한 시도는 작가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긍정적 변화로 느껴진다. 레디메이드로써 모던건축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는 모방·재현·복제 그리고 시뮬라크르에 이르는 매우 본질적인 존재론에 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 정현

Vol.20130502h | 김수영展 / KIMSUYOUNG / 金秀暎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