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amorphosisVII

김주연展 / KIMJUYON / 金周姸 / installation   2013_0501 ▶ 2013_0531

김주연_Metamorphosis VII_옷, 나무파레트, 씨앗_201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30409h | 김주연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50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10:00pm

대담미술관 ARTCENTER DAEDAM 전남 담양군 담양읍 언골길 5-4(향교리 352번지) Tel. +82.(0)61.381.0081~2 www.daedam.kr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와 언캐니(Uncanny) ● 김주연의 작품들은 매력적이다. 이글은 그 매력이 발현되는 지점을 '언캐니'(uncanny)개념을 축으로 기술할 것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이 개념은 김주연이 2002년 대안공간 사루비아에서 갖은 첫 국내 개인전에서 발표된 작품 이숙에서부터 대담미술관의 전시작품을 관류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탈근대 혹은 후기 산업사회로 지칭되는 오늘 날의 삶과 예술에 관한 담론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생태론(ecology)이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시간성(temporality) 등의 개념은 물론 김주연의 작품에서 가장 첨예하게 발현되지만, 이에 관해서는 이미 그의 작품을 평한 유수한 평론가들의 여러 편의 빼어난 평문에서 다루고 있다.

김주연_Metamorphosis VII_옷, 나무파레트, 씨앗_2013_부분

1. 언캐니(uncanny)함의 역능 ● 필자가 김주연의 이숙(異熟, 2002)을 대안공간 사루비아다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 섬뜻하게 전율처럼 다가오던 느낌이 바로 '언캐니함'이라고 쓰고 싶다. 신부의 하얀 드레스와 그 드레스의 하단에 제공되는 수분을 매개로 삼투압작용처럼 아래로부터 타고 오르는 유기체적 녹색의 콘트라스트 가운데 '이숙'이란 명제까지도 작품의 습기와 함께 기이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기이한 아름다움, 즉 '언캐니'였다. ● 우리를 섬뜻함의 올가미로 얽매는 것은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기억속의 그 어떤 정보와도 아예 연관되지 않는 것은 무서운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캐니 개념을 처음 제기한 프로이드가 지적하듯이 낯선 두려움 속에 긴밀하게 섞인 친밀함이야 말로 은근하면서도 동시에 강렬하게 관람자의 안락함을 위협하지만 다른 한편 이상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 '이숙'의 이미지를 보자. 일곱 개의 물동이에 드리워져 잠기며 드레스 하단에 삼투압으로 생긴듯한 이끼로 착각할 만한 녹색 이미지는 실은 드레스 위에 뿌려진 무수한 씨앗들이 인위적으로 분무된 습기와 설정된 온도에서 발아되어 성장하고 쇠락하는 과정을 김주연이 연출한 결과이다. 언캐니는 물활론적 사고양식을 활성화 시켜주는 것으로 보이는 경험의 순간에 느껴지는 두렵고 낯선 감정을 묘사하는 말로서 이런 전형은 이미 본적이 있는 듯 한 느낌 즉 기시감(데쟈뷰)이나 죽은 누군가가 살아있다는 느낌 같은 것인데 그것은 이미지와 같은 허구를 통해 관람자의 의식으로 들어온다. ● '언캐니함'이란 이 개념을 '기이함'이나 '섬뜻함', '신비스러움'과 같은 단어로 대체할 경우 이런 용어로는 지시되지 않고 오히려 소외되어버리는 뭔가의 묘연한 부족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탁월한 예술가들이 언캐니를 쫓는 것은 이미 언어화된 현상이 아니라 기존의 명료한 정서적 반응들의 틈새에 존재하는 기이한 중간적 감흥을 끌어내기 위하여서이다. 그런 점에서 '언캐니함'은 과학적 대상이 아니라 바로 미학적 대상이거나 뛰어난 예술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회화 혹은 예술의 재편성이 아니라 그 범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기 때문이다. 언캐니는 메타언어(meta-language)이다. ● 일찍이 초현실주의자들은 언캐니를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이 외면으로 표출된 것으로서 삶 속에 내재한 죽음을 예고하는 매개체라고 주장했는데 오늘날 '언캐니함'은 작품을 상투적인 예술행위나 예술의 상징적 질서의 견고함을 와해시키는 벡터라 할 수 있다. 라캉을 빌어 말하면 상징계에 의해 억압되었던 '실재'(the Real)나 '욕망'이 귀환된 풍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주연의 작품은 관람자의 관음증적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노력하는 여타작가와 달리 오히려 철저히 작가의 욕망을 위한 이미지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가 발아시킨 새싹 생명체들의 욕망과 더불어. ● 좋은 작가나 예술 그리고 생명체는 개체고유성(individuality)을 지닌다. 그리고 그 개체고유성의 기원이 욕망이다. 욕망은 대상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그 대상을 통해 욕망이 규정되거나 유발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욕망은 본능의 욕망 즉 소유론적 욕망과 본성의 욕망 즉 존재론적 욕망으로 나눌 수 있다. 본능적 욕망은 오늘날의 소비사회에서 기호 가치를 탐익하는 현대인들의 욕망과 다를 바 없어 이를 탈현대 사상이나 예술이 이를 비판하게 되는 까닭이 된다. 이에 대해 자연성과 같은 본성적 욕망의 소산이랄 수 있는 새로운 예술적 사유는 일종의 암적 상태가 된 상투형의 예술이나 기억과의 한바탕 전투로서 그 기억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고 전복하는 것일 것이다.

김주연_Metamorphosis VII_옷, 나무파레트, 씨앗_2013
김주연_Metamorphosis VII_옷, 나무파레트, 씨앗_2013_부분

2. 녹색의 언캐니함 ● 지각현상학자 메를로 퐁티는 그의 「눈과 마음」에서 세잔의 풍경화를 언급하면서 가역성과 모호성을 바탕으로 한 회화공간은 더 이상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색채의 문제라고 한다. 재현의 짐을 벗어버린 김주연의 미술언어도 이와 같은 표현을 빌릴 수밖에 없다. 이를 그의 작품에 항상 동행하는 새싹들의 녹색이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녹색은 색채심리학에서 안전과 안정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색채이지만 동시에 괴기스러움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색이라는 점에서 동일성과 차이와 같은 이중성(duplicity)을 지닌다. 실제로 이 같은 이중성은 김주연이 연출하는 작품을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서서 주의를 집중하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싹의 욕망이, 그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가운데 싱그러운 생명체의 이면에서 그 흔적도 동시에 만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식물의 세계는 수동적이며 평화롭고 안정되어 있어 안전하다는 이미지와 동일시 하지만 실제로 식물도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관계적이며 의타기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투쟁적이고 공격적이다. 식물계에도 절대선은 없어 그들은 그들의 개체고유성을 지키기 위하여 관용보다는 오히려 무자비할 정도로 잔인하기까지 하다. 건강한 생명체의 욕망에는 필연적으로 상극과 상생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김주연의 녹색이미지가 던지는 언캐니함이다.

김주연_Metamorphosis VII_옷, 나무파레트, 씨앗_2013
김주연_Metamorphosis VII_옷, 나무파레트, 씨앗_2013

3. 기념비성과 언캐니함 ● 실내에서의 김주연의 작품은 설치로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규모가 방대할 뿐 아니라 천정에 닿거나 닿을 정도로 높은 수직적구조물로 이루어진다. 신문지로 축적된 작품들도 대부분 그 수직적인 양적 규모가 엄청나고 이번 전시를 위하여 수집된 옷들이 축적된 수직적, 양적 규모도 엄청나다. 큰 규모는 흔히 숭고(sublime)와 상관적으로 고찰 되지만 김주연 작품에서는 이에 더하여 '언캐니함'을 치열하게 나타내고 있어 보인다. 미미한 존재인 새싹들 때문이다. 시각적으로는 새싹들은 녹색더미로 보이지만 촉지각적으로는 씨앗마다의 개체고유성을 유지하기위하여 엄청난 수직적인 구조물의 표면 즉 가장 열악한 생태조건에 매달려 뿌리를 내리는 가운데 치열하게 타자를 욕망하는 장이며 동시에 관계를 맺는 장이며 투쟁하는 장이어서 존재들의 함성이 가득한 공간이다. ● 구축물 규모의 방대함과 그 구축물의 표면에 생명의 닻을 내린 시물라크르 같은 존재들의 컨트라스트가 만드는 김주연의 언캐니한 작품은 이 시대에 대한 은유적 기념비라고 생각한다. 몇 년전에 고양시가 초대한 한 야외전시회에서는 대부분의 작가가 거대한 모뉴멘트 작품을 출품한데 대하여 김주연은 넓은 풀밭위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작품으로 설치한 바가 있다. 놀라운 반전이다. 김주연은 규모의 정치학을 능수능란하게 펼치는 작가이다. ● 대부분의 기념비나 기념비성은 수직적이고 자기중심적(ego-centric) 사고의 산물이다. 김주연의 작품세계가 놀라운 것은 이를 극한으로 몰고가 자기부정(self-negation)가운데서 궁극에서는 자기중앙적(network-centric)세계로 돌려놓는 해체적인 사유의 깊이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network-centric란 용어는 의존적 존재, 독립적 존재, 상호관계적 존재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자의(字意)대로 해석하면 특정한 중심이 없이 마치 그물망처럼 어느 꼭지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예술을 매개로 수행하는 철학자이다. 그래서 그의 명제가 Metamorphosis일 것이다. ■ 엄기홍

Vol.20130504i | 김주연展 / KIMJUYON / 金周姸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