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진展 / LIEMHEIZY / 李熙鎭 / painting.sculpture   2013_0501 ▶ 2013_0507

이희진_왜 나는 여기에 존재하는가 3_캔버스에 유채_117×91cm

초대일시 / 2013_0501_수요일_07: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포터블 스페이스 PORTABLE SPACE 서울 양재2동 314-13번지 B02호 Tel. +82.2.451.8427 www.portablelollipop.com

● 그 수많은 집들이 빼곡히 쌓여 있는 서울을 보게 되면 뭐 그리 저렇게 따닥따닥 붙어사나 싶다. 중심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사람들같이 집들도 중심에서 멀어지기 싫어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바다와 같은 아파트와 집들로 가득한데 왜 저기에 나하나 빌붙을 곳 없나 생각했었다. 마음의 안식처하나 구할 곳 없는 사람들로 넘쳐나는데 뭐 그리 잘났는지 으리으리하게 으스대는 치장하고는 참 사람 꼴과 같았다. 인간세상의 표출, 표현이 집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희진_왜 나는 여기에 존재하는가 2_나무, 케이블 타이_63×55×40cm

인간은 자의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한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이런 상태를 하이데거는 피투성이라 불렀다. '왜 나는 여기에 존재 하는가', '왜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에 대한 생각들은 인간 스스로가 자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듯하다. 인간이 관계하는 장소와 공간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집이란 공간은 그것이 어떠한지에 따라 인간의 존재적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집은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고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집이란 장소는 욕망으로 탕진된 에너지를 충전하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곳이다. 이런 순환이 바로 삶이다. 집의 존재 방식은 다름 아니라 인간 존재 방식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집 내부, 외부가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에 따라 집의 의미도 변화하고 그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인간도 변화한다. 우리가 집을 잃는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표현하기 위해 스펙을 쌓아가듯이 우리에게 집은 과거의 보호와 안식의 장소에서 새로운 자아표현으로 변화해간다.

이희진_왜 나는 여기에 존재하는가 5_캔버스에 유채_53×80cm

세상에 얽혀있는 인간들처럼 우리의 집들도 net망 속에서 관계한다. 어느 한 부분을 잘라낼 수 없는 관계처럼 얽혀있는 형상들은 집을 나타내지만 본연의 모습은 인간들이다. 세상에 스며들 수 없는 존재들은 세상과 반대되는 색들로 가득 차 있고, 견고한 듯 보이는 존재들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는 엮여서 비벼대는 존재들은 자의적이라고 외치지만 절대 타의적이다.

이희진_왜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가 1_렌티큘러_17×30cm
이희진_왜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가 2_렌티큘러_17×30cm

허례허식에 과장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의 집들이란 그들의 존재를 대변한다. 그런 자 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결합은 사회가 되었고 그 사회에서는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그 모든 것들이 얽혀있는 세상을 집들의 색으로 표현한다. 렌티큘러 인쇄를 통해 부촌과 빈민가는 색으로 바뀌었고, 그 존재들은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 이희진

Vol.20130505b | 이희진展 / LIEMHEIZY / 李熙鎭 / painting.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