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지流刑地에서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painting   2013_0505 ▶︎ 2013_0718 / 월요일 휴관

한상진_유형지 a place of exile-tear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021l | 한상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0706_토요일_05: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마을기업행궁솜씨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대안공간 눈 ALTERNATIVE SPACE NOON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 82-6(북수동 232-3번지) Tel. +82.(0)31.244.4519 www.spacenoon.co.kr cafe.daum.net/artspacenoon www.facebook.com/artspacenoon

한상진의 유형지(流刑地)에서 ●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찾아 배회하는 지금 이곳은 알 수 없는 끝을 기다려야 하는 무기의 징역을 살아야 하는 유형지와 같다. 끝도 없는 시간 속에서 한상진을 견디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의 작품을 들여다봤다. 그와 내가 각기 유형지에 놓인 처지라면 죄질과 형기가 다를 것이고 같은 수인囚人이라하더라도 자백이라는 고백과 토로가 또 다를 것이므로 한상진의 세계를 보고 토해내는 것은 오독誤讀에 가까울 것이다.  

1. 류流 ● 아.직.도. 아직도 흐르고 있는가. 실망스럽지만 지금도 흐르고 있다. 이 땅 위에서 흘러가야 할 시간이 아직도 남은 것 같다. 모든 것들을 압살해 온 절대의 무기武器 같은 무시무시한 무기無期의 시간을 따라 가겠지만 무한 같은 유한을 무기한으로 착각하며 나른한 낮잠 같은 추락을 느끼는 이 있다면 작가 한상진과 공범이겠다. ● 휘황찬란하고 힘세고 잘 나가는 것들이 상류로 거슬러 가는 동안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뿐인 별 볼일 없는 것들은 하류로 하류로 흘러 떠내려가고 있다. 지.금.도. 그렇게 모여드는 것들의 집합지, 유형지에서 거칠고 텅 빈 손을 맞잡고 유유상종의 현실을 맞닥뜨릴 때 그 옆에서 한상진의 시간은 흐르고 있겠지. 아니, 버티고 있겠지. ● 파편처럼 흩어지는 삶을 요요한 불빛으로 유혹하여 걸쭉하고 진득한 캔버스 위에 박제 시켜 놓은 『Melancholia』는 사각의 유형지에 점점이 모여든 그렇고 그런, 겨우 하루나 이틀 살다가는 것들의 적나라한 처절함이 아닐까. 인간 군상들의 축소판이었다. 공간과 시간이 사각의 캔버스와 하룻밤으로 집약되고 모든 것들이 정지된 캔버스는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 했다. 유형지에서 보내는 하루가 캔버스에 붙박혀 있는 하루살이의 하루와 무엇이 다를까. 꼼작 없이 바로 여기, 어디를 가봤자 하얀 캔버스 위 같은 흰 거짓말 같은 곳들 아닌가. 흐름이 딱! 정지된 것에서 흐름이 보이는 아이러니.

한상진_Gaze & Meditation-a sku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3×181.8cm_2013

2. 형刑형形 ● 멀리 있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인 것. 희미해지는 것. 안 보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있어도 없는 것. 비닐하우스에 비치는 희미한 풍경을 담은 작품 『응시와 명상-희미한 풍경』처럼 유형有形 이지만 무형無形처럼 본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형벌의 현장에서 어쩌면 스스로 모습과 자취를 감추려 하는 또 다른 유배인인 나 자신을 희끄무레하게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지.   속일 수 없고 변신할 수 없는 거울의 모습을 흐르는 물에 뿌옇게 풀어서 아무도 모르게 흩어져 사라지는 일. 유형지로부터의 증발을 꿈꾸게 한다. ● 한상진의 드로잉을 보는 시간은 아찔하다. 이어질듯 끊어질듯 아련하게 나타날 듯 말 듯한 대상물은 연기처럼 허공에 반쯤 섞여 벌써 사라진 것의 끄트머리를 겨우겨우 붙잡고 서 있는 그런 찰나의 어떤 것이라고 할까. 그렇기에 버리고 싶고 버려지는 형形을 가까스로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감히 말하자면 형形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형刑이다.

3. 지地 ● 여기가 아닌 어딘가, 멀어지는 줄 모르며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줄 모른 채 그곳과 가까워지는 그 모든 어디이기도 한 이 유형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유형지에서 무형無形이 되기 전 백골로 증언하는 작품『응시와 명상-유형지20132』은 무한無限 같은 유한의 적나라한 죽음이었다. 결국 유형지流刑地는 무형지無形地이기도 한 곳. 유형지 수인囚人의 삶은 있어도 없고 없지만 있으면서 외면 받는 것 아니던가. 또한 그런 곳 아니던가. 공간은 벌판처럼 더없고 개방되어 있지만 너무 멀고 넓다는 이름으로 목책처럼 우뚝하다. 너무 먼 곳은 내부에 있게 마련이어서 천리를 간 꿈을 꾸었다고 해도 깨고 나면 제자리이듯 유형지라는 공간은 요람처럼 한 평 남짓할 잠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다. 형形과 색色이 없는 시공으로 돌아가기 전 머무르는 곳, 퇴행의 완성.  

4. 유형지로 부터, 유형지에서 ● 그의 유형지 방문을 마치고 내 유형지로 돌아오는 길의 장맛비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루했다. 한편으로 비가 그치지 않는 어떤 유형지가 있다면 기꺼이 그곳으로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비를 캔버스에 담아 본다면 어떤 형形과 어떤 선이 될까. 색 없는 빗줄기를 그리겠다는 거부하지 못하는 욕망이 인다면 어쩌면 그것은 형벌이다.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고자하는 불가능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의지. 그것으로 유형지에서 한 삶을 버티는 것이겠지. ■ 이수환

* 유형(流刑) : 구형(九刑) 가운데 죄인을 귀양 보내던 형벌. 죽을 때까지 유배지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감형되거나 사면되는 경우도 있었다.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장소의 멀고 가까움이나 주거지의 제한 정도에 차등을 두었다.

한상진_Gaze & Meditation-a sku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1.8×227.3cm_2013

한상진의 근작들 : 『유형지(流刑地)에서』 ● 이 글은 한상진의 2013년 개인전 『유형지(流刑地)에서』를 비평적 관점에서 이해해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에 대해서 여러 접근이 가능할 테지만 여기서 나는 몇 가지 키워드를 설정하고 그 키워드를 문제 해결의 단서로 삼아 접근하는 방식을 취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은 다분히 주관적인 경향성을 띠게 될 것이다. '아마도'와 '어쩌면'을 남발하는 글쓰기. 이로써 글은 객관적 설득력을 놓치게 될 것이지만 그만큼 현재 시점에서 나의 한상진 이해를 드러내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다.

1. 유형지(流刑地) ● 먼저 전시제목인 『유형지(流刑地)에서』에 대해서 언급해 보기로 하자. 유형(流刑)의 사전적 정의는 '죄인을 귀양보내는 형벌'이고 '유형지'는 '죄인이 유형살이를 하는 곳'을 뜻한다. 이러한 제목은 우선 근래 생활과 작업의 근거지였던 서울을 떠나 한동안 경기도 일산과 파주의 외딴 곳에 작업실을 두고 생활했던 한상진의 개인적 사정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더불어 이러한 개인사는 한상진 작업에 특징적인 '본래 있어야 할 곳에서 떨어져 있다는 느낌'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 "서울에서 일산으로 일산에서 파주로,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는 어느새 이렇게, 점점,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공장 앞 논두렁 가에 앉아 이름 모를 넝쿨 잎을 그려 넣었다. 최근의 작품은 이렇게 쓸모를 다하거나 버려진 것, 그러나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감지하는 매혹에서부터 시작된다(한상진 작가노트, 2013)" ● 한상진 자신의 표현을 빌어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화가는 (자신과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인) "쓸모를 다하거나 버려진 것"에 애착을 갖는다. 실제로 200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때부터 이 화가의 작업에는 줄곧 어떤 '고향상실' 또는 '노스탤지어'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노스탤지어를 그 어원을 참조하여 "되돌아가는 일(nostos)을 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픔(algos)"으로 이해한다면 한상진의 작업에는 분명 '그리운 어떤 곳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몹시 아프다'는 느낌, 또는 정조(情調)가 항상 두드러졌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두고'노스탤직'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한상진의 작업을 "낭만적이다"라고 보는 것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 하지만 낭만적 경향의 작가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감정의 격앙이나 흥분을 한상진의 작업에서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오히려 지배적인 것은 극도로 절제된 화면 구성과 지극히 차분한 조용한 울림이다. 그의 붓질은 격렬해 보이는 순간에도 차분하다. 거기에는 토로(吐露)의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픔을 토로하기보다는 그 아픔을 관찰하는 식으로 작업한다. 곧 한상진의 작법(作法)은 '나를 아프게 하는 것', '아프게 나를 찔러오는 것'에 반응하여 아파하면서 그것을 관찰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오래 전에 나는 이러한 양상을 마르셀 프루스트의 '비자발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과 관련하여 설명했는데 지금도 꽤 적절한 전유였다는 생각이다. 가령 초기 시절에 그는 담벼락에 비친 개나리 그림자를 그렸다. 개나리 그림자는 '개나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것이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화가를 꽤 뚫는다. 그 시절 그는 이렇게 자신을 찔러온 것을 프루스트처럼 또는 (카메라 루시다의) 바르트처럼 더듬었다. 개나리 그림자의 절단된 파편이미지들, 그 독특한 실루엣들, 캔버스 위에 (칠해졌다기보다는) 덧붙은 물감들은 아픔의 근원을 찾아 기억을 더듬은 자(者)가 남긴 흔적들이다. ● 하지만 그런 종류의 더듬기는 그 아픔의 근원에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가 없다. 그것은 파악됐다고 여겨지는 순간에 부서진다. 또는 구름처럼 흩어진다. 그러니 결국 먼 것은 가까워질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유형지'는 꽤 설득력있는 비유다. 유형지는 속성상 자발적으로 또는 자신의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언제든 마음 내킬 때 떠나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유형지다.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 다가가려는 노력,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들이란 처음부터 실패를 예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가가는 것의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유형지, 이곳이 바로 한상진 작업의 거처다(그러고 보니 일산으로, 파주로 이주하기 전, 그러니까 서울에 있을 때에도 그의 작업실은 항상 외부와 차단된 마치 고립된 섬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예고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한 화가로 하여금 자꾸만 어딘가로 다가가게끔 하고 무언가를 더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상진_응시와 명상-분리 불가능한 Gaze & Meditation-indivisible

2. 프란츠 카프카 ● 사실 『유형지에서』는 프란츠 카프카의 한 단편 제목이다. 이 단편에는 어떤'사형 집행기계'에 대한 이상한 신념에 사로잡힌 장교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 기계는 그가 원했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또는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그 기계에 눕히지만 그것은 아주 덧없고 당황스러운 그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어떤 어긋남의 이야기다. 카프카가 다른 소설에서 묘사한 '진입하고자 배회하지만 끝내 진입할 수 없는 성(城)'처럼 기계는 장교의 믿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 그런데 한상진이 이렇게 시니컬한 카프카 단편의 제목을 자신의 전시제목에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한상진 스스로가 "이미 시니컬하기 때문"이라고 답하면 어떨까? 앞서 나는 "거리를 좁히고 멀어진 것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노력은 실패가 예고되어 있다"고 썼거니와 지금 한상진은 -카프카를 따라- 기의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기표, 개념에 도달하지 못하는 형식에 깊이 몰두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한동안 비닐하우스 비닐 너머의 아른아른한 풍경을 그렸다는 것을 사례로 들 수 있지 않을까? 비닐 너머의 풍경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확실하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것을 '확실하게 포착할 수 없다'아른아른한 풍경. 오히려 우리의 눈에 좀 더 확실하게 포착되는 것은 그 비닐의 '주름들'이다.

3. 메탈릭 글리터 파우더 ● 그런데 한상진의 작업은 '기의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기표' 그 이상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이 화가는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양상 자체보다는 기표의 (왕복/순환) 운동을 일으키는 동인(動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카프카를 다시 꺼내면 왜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은 '성'에 진입하기 위해서 그 주변을 배회할까? 그는 왜 그 기계에 대해 터무니없는 믿음을 갖게 된 걸까? 와 같은 물음이 던져지기 시작했다. 이 물음을 한상진의 방식으로 번역하면 "왜 나는 저기 아른거리는 비닐 너머를 보게 되었을까? 와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거울의 이면에 붙어있는 얇은 박피가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이것은 한상진이 쓴 글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그 너머에 빛이 있다. ● "사물과의 대화, 비닐하우스 너머의 아른아른하고 희미한 사물의 미미한 존재감은 커텐의 굴곡을 따라 흐느러진 사라져버릴 흔적, 빛의 흐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와 감각의 찰나를 형용한다" (작가노트, 2012년) ●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 너머/이면에서 이미지를 가능케 한 근원으로서 '빛'을 본다. 또는'보이는 것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실재와 만난다. 이것은 그가 왜 지난 십 여 년 간 그토록 반짝이는 것들에 열중해왔는가를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다. 반짝이와 형광물질, 메탈릭 글리터 파우더(metallic glitter powder)..., 이렇게 반짝이고 번뜩이는 찰나적인 것들과 더불어 기표의 왕복 운동은 언제나 다시 시작된다.

한상진_파편 fragment_패널에 유채_22×14cm_2013

4. 다 먹고 남은 사과 찌꺼기 ● 좀 더 할 이야기가 남아있다. 그것은 버려진 것, 죽은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앞에서 나는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화가가 자신과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인 쓸모를 다하거나 버려진 것에 애착을 갖는다."고 썼다. 확실히 무언가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음을 느끼는 이는 그 무언가와 가까이 있던 순간을 경험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버려진 것들은 예전에 분명 어떤 쓸모를 지니고 있었을 게다. 공터에 버려진 개의 뼈들은 또 어떤가? 그것은 잡아먹히기 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며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던 한 생명체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 모두는 하나의 흔적, 하나의 완벽한 구조물이다. 가령 다 먹고 남은 사과 찌꺼기는 그 사과를 베어 물었을 한 인간의 몸틀, 행동의 궤적을 반영하는 완벽에 가까운 구조체다. ●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이미 멀어진 자들, 버려진 것들, 죽은 것들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기의에 닿으려는 기표의 왕복운동은 여기서 지극히 무력하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것들은 기의의 통제 내지는 질곡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기표다. 게다가 그것은 그 자체 완벽에 가까운 구조를 갖고 있다. 바르트라면 이것들을 '텅빈 기표'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기표들처럼 본래의 것,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강박에 연루되기보다는 그 자체 완전히 자유로운 의미작용의 가능성을 제시할지 모른다. 한상진의 경우에 그 가능성은 캔버스에 안착한 날벌레 시체들이 그린 드로잉 궤적들, 뒷산에서 주은 죽은 동물의 구조적 양상들 같은 것이다. 기원, 근원에의 강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기표들의 의미작용은 그리움을 알지 못하는 유희다. 다시 말하건대 비닐 너머의 아른아른한 풍경보다 그 비닐의 '주름들'이 보다 생생하다. ● 그러나 그것들은 소생할 수 있을까?

5. 그들을 나를 무엇으로부터 낫게 하려는 걸까? 어떤 상태로, 어떤 삶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려는 걸까? ● 한상진이 내게 보내온 바르트의 단상. 이 글의 결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 "그러나 별로 반갑지 않은 위안들. 애도는, 우울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을 나를 무엇으로부터 낫게 하려는 걸까? 어떤 상태로, 어떤 삶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려는 걸까?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속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존재, 아주 귀중해진 주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 불멸.이 특별하고도 회의주의적인 입장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건지, 나는 한 번도 이해한 적이 없다. 그리하여 내가 아는 건, 나는 모르겠다는 사실뿐."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중에서)홍지석

한상진_넝쿨 ivy_패널에 유채_22×14cm_2013

구조의 결핍(缺乏)과 존재론 (ontology, 存在論) - 도시 공간 ● 본인의 작업은 도시의 건축적인 구조물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내, 외부의 풍경을 응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숨쉬는 시간들 속에서 조우하게 되는 사물과 현상들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도시공간의 무심한 풍경(spectacle)을 통해 이면의 실재를 드러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면적인 시공간으로부터 연유한 체감과 울림을 담아 시대의 삶과 감각을 반영하려는 기표들, 가변적 설치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근간의 작업이 되었다. 선형적 시간개념과 유클리드기하학, 계몽주의로 대별되던 근대성은 절대적인 의미의 해체로 이어진다. 니체의 전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절대적인 숭고를 의미하려 했던 기표들(종교 혹은 이념적인)은 이제 수행적인 리듬 안에 녹아들어 존재하고, 도시의 건축적인 구조들이 보여주는 경계들, 세련된 디자인의 모던한 공간구조, 아파트 등의 획일화된 공간이 보여주는 지속성, 수평과 수직의 구조적인 공간점유 방식, 백화점, 대형마트의 소비와 연계되는 인위적인 동선, 명품과 고급승용차는 자본주의 혹은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구조적인 시스템(System)을 보여주며, 다양성과 차이라는 스펙트럼 안에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영화 『모던 타임즈』는 작업공정을 통해 파편화되고 부속물처럼 전락해가는 산업사회의 인간군상과 강박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드(Grid)는 자본주의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체계화된 구조의 하나라고 보며, 도시의 공간과 사물을 암시하는 형상들은 이러한 통제체계와 이데올로기가 겹쳐있는 시각기표로서 등장하며 종이 위에 그려진 두터운 물감 층, 그리고 스며드는 기름의 얼룩, 종이와 검은 안료, 그 안에 미세하게 혼합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분말, 색조 는 바라보는 이의 시점과 이동에 따라 다양한 표정과 변화를 지닌다. 평면작업과 가변설치작업의 공간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와 이미지의 단편들은 일종의 메타포(Metaphor)로서 파편화되고 고립되어가는 존재의 결핍을 드러내는 내면의 풍경화이다. 작품은 다중적인(Multiple) 공간 속에 삶의 울림과 실존을 반영하려는 조형의지로부터 수직과 수평의 사회적인 공간으로, 그리고 하나하나의 파편화된 실재들이 모여, 사적인 그리고 공적인 기억의 실마리와 연계되는 심연의 장소가 되고자 하며, 한편으로는 정사각형의 수평과 수직의 배열을 통해 사회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주체들(기표들)의 동등한 위상과 조화를 꿈꾸는 행위이기도 하다. 개인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는 그 지점에서 동시에 사회적인 이념,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것임을 근거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들과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고자 하였다. ● 무수히 많은 존재들의 삶과 죽음이 스치고 지나간, 이 도심의 한 모퉁이,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간과 그림자들의 잔상은 존재의 희노애락과, 그리움과, 애뜻함이 숨 쉬는 시간과 공간의 채집이 되었다.

한상진_Melancholia_캔버스에 모기, 날벌레_130,3×162.2cm_2013

소요(逍遙)의 기표(記標) ● 길 위에서 만나는 타자(others,他者)적 주체, 아스팔트, 오래되고 얼룩진 도시의 시멘트 구조물과 그 구조물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들은 차가운 도시의 삶과 시선들에 대한 괴리감을 드러내려는 시각적인 언어로서 수용하게 되었고 갈라진 시멘트 축대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담쟁이, 이끼, 들풀, 산야와 하늘은 시간의 흐름과 변화 속에서 강한 생명력과 함께 온기를 발휘한다. 주체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근대의 영웅들은 변두리 음식점을 장식하는 마네킹과 같은 낡은 초상으로 화석처럼 굳어져있고, 하늘의 구름은 우리를 내려다본다. 삶은 허공을 떠도는 구름처럼, 바람처럼 주름진 굴곡과 닮아있고, 공기와 호흡하며 생멸하는 가능태로서의 실존은 정의하고 지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하나의 목적을 밝히려는 폭력적인 구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요의 기표로 이어진다. 비표상적 사유- 비닐하우스 풍경 ● 거울의 이면에 붙어있는 얇은 박피가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온전한 것(신)은 보이지 않는 틈을 기반으로 현현한다. 실재(Real) 그것은 보이는 것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거울의 이면과 같다. ● 침묵과 빛 그림자와 실내풍경은 자위적으로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정원과 같다. 정연히 정리되어 있는 책장이나 선반 위의 그림들, 공구, 재료들은 개인적인 취향에 뿌리 박혀있는 고집과 감성을 반영하는 시각적인 표상이면서 물질이라 할 때, 사물과의 대화, 비닐하우스 너머의 아른아른하고 희미한 사물의 미미한 존재감은 커텐의 굴곡을 따라 흐느러진 사라져버릴 흔적, 빛의 흐름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와 감각의 찰나를 형용한다. 명명할 수 없는, 언어에 의해 포획될 수 없는, 실재적인 어떤 것(the Real)을 드러내려는 응시와 명상 연작들은 메탈릭 글리터 파우더의 반짝이면서도 가벼운 속성과 함께 캔버스 위에 그려지게 된다. 이 재료는 크리스마스 카드나 장식적인 오브제를 만들때 사용하는 분말이다. 현실이 비현실적인 환상으로 채워짐으로 현실이 가능해지는 것처럼, 검푸른 입자의 이합집산은 실재적인 영역으로 다가가기 위한 매개물이고자 한다. ● '표상의 논리'는 특권적(特權的) 동일성(同一性)으로 다른 어떤 것을 재단하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대상이 지닌 잉여를 모두 만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대상과 지각하는 나와의 거리를 가지게 되며 그 거리는 기억과 연관된다. ● 어쩌면 존재가 지닌 내재성이란 만지거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타자를 통해 나를 비추어 바라보는 감각의 순간,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타자가 주체화되는 일이다. ● 스치고 지나가는 향기가, 봄날 담벼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불현듯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고 현재의 나를 일렁이게 하듯이 주체의 빈틈, 대상화 시킬 수 없는 사물과 기억과 시간이 대화하고 그 감흥을 그려가는 일이 작업의 과정이라 할 때, 작업실은 의미화를 위한 공간이며, 대상을 통해 의미를 해체해가는 공간이 된다. ● 파주에 위치한 창고 작업실, 전원풍경, 생활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의자, 테이블, 선반, 나무기둥과 벽, 지붕, 천정의 구조물, 화분, 책장, 공구, 대나무, 산에서 주워온 가축의 두개골, 잡동사니들 - 사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구조와 흐름에 기인한 소요의 기표들 - 그리고 비닐하우스 너머의 희미한 풍경, 구조의 강박 안에서 그려지는 응시와 명상 연작은 빛과 그림자의 풍경이 드러내는 사유의 존재론이다.

한상진_분홍선 vein_종이에 잉크, 펜_12.8×18.2cm_2011

기억 그리고 소멸 ● 나는 걸어서 다니는 것을 즐긴다. 산책은 거리의 스펙트럼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좌표처럼 성좌처럼 이끄는 걸음들은 하나하나가 모여 모종의 풍경을 이룬다. 무심히 지나가는 자동차나 사람들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아니 지워진 듯 보이나 희미하게 심연의 상태에 각인되어 있는 감각이나 의미와 같다. 기억은 희미한 풍경의 파편처럼 아련하고 아득하다. 기억은 의미의 체계가 아니며 우리는 온전하게 기억할 수 없어서 반복 한다. 우리는 인과관계를 모두 파악할 수 없지 않은가? 삶은 지속되고 변화하며 지연된다. 언어나 의미로 포획할 수 없는 사물의 있고 없음은 구름처럼 비처럼 물처럼 순환하며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것 아닌가?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동그란 여운의 겹침이나 파장의 흔적들은 존재를 감각적인 사유의 영역으로 이끈다. ● 기억은 소멸하고 바람처럼 흩허진다. 소멸된 기억은 의식의 이면에서 존재를 이끈다.

유형지(流刑地)에서 ● 서울에서 일산으로 일산에서 파주로 -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는 어느새 이렇게, 점점, 무언가로 부터 멀어져 가는 것에 익숙해져있다. ● 파주 작업실 옆에는 씽크대 공장이 있다. 그 앞에는 MDF,PB 조각들이 차곡차곡 버려져있다. 어느 날 손바닥만한 MDF조각을 보았는데 펄이 들어간 백색도장에 투명필름이 코팅된 것이었다. 매혹적이었다. 공장 앞 논두렁 가에 앉아 이름 모를 넝쿨 잎을 그려 넣었다. 최근의 작품은 이렇게 쓸모를 다하거나 버려진 것, 그러나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감지하는 매혹에서부터 시작된다. 동한거 임시방편으로 실내에 지어진 비닐하우스, 버려진 포유류의 두개골을 주워와 그리거나, 작업실 문틈으로 들어온 날벌레들, 죽은 대나무를 살려보겠다고 세우는 일, 봄, 겨울 후미진 학교 축대에 가서 이끼와 개나리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일 등이 그것이다. ● 산책의 걷기를 통해 얻어진, 도시공간을 구성하는 기하학적인 그림자의 형상, 기억과 연관된 기표를 그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본인의 작품은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기저로 한다. 파편화 되어가는 인간군상을 기하학적인 형상과 기표로 은유하였던 초기 작업은 소요(逍遙)와 실존의 체감을 감각적으로 드러낸 것이었고, 이러한 존재론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 반복은 차이를 낳는다, 차이의 소멸은 죽음을 의미한다. 차이와 반복의 구조는 동일시와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발생하며 이러한 거리는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핵이며 공백이다. ■ 한상진

Vol.20130505i | 한상진展 / HANSANGJIN / 韓相振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