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OCI YOUNG CREATIVES

이지영_이현호展   2013_0509 ▶ 2013_0529 / 월요일 휴관

이지영_My Chemical Romance_잉크젯 프린트_144×190cm_2013

초대일시 / 2013_0509_목요일_05:00pm

이지영展 /『Stage of Mind : obsessive compulsive』 이현호展 /『어떤 날』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이지영의 페인팅-조각-설치 그리고 사진혹은 마음의 방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마음은 공간으로, 공간처럼 묘사되었다.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우라"는 불교의 가르침으로부터,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 나비가 되어 그대 마음에 날아가 앉으리"라는 노랫말에 이르기까지 마음은 공간에 빗대어졌다. 수녀 이해인은 마음을 방과 동일시하며, "내 마음의 벽 위에도/'기쁨'이란 달력을 걸어놓고/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는 「내 마음의 방」이라는 시를 쓴다. ● 사실 방이 마음의 공간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방은 어느 무엇보다도 그 거주자의 경제적 여건, 생활습관, 미적 취향, 마음의 상태를 징후처럼 드러내기 때문이다. 호화스런 가구는 거주자의 부를 나타내며, 바닥에 내던져진 양말과 속옷은 규율에서 멀어진 생활을 지시한다. 벽에 붙은 재즈, 펑크 가수의 브로마이드는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가치관을 드러내며, 언제나 커튼이 드리워진 방은 고독하고 폐쇄적인 거주자의 성격을 암시한다. 따라서 어느 작가가 타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기 표상을 위해 어느 특정 공간을 선택한 후 그곳을 자기 방으로 연출, 구성한다면, 그곳은 분명히 그/그녀의 미학적 입장, 내면성 혹은 세계에 대한 태도를 일정 부분 혹은 상당 부분 드러내기 마련이다. 작가 이지영은 그녀의 개인전들을 통해 이를 분명히 했다. 자신이 꾸민 무대, 작가가 출연한 방 혹은 작가를 대신해 모델이 연기하는 공간은 그녀의 'stage of mind'라고. ● 이지영의 마음의 방 혹은 내면의 무대는 페인팅-조각-설치작업 이후, 모델이 등장하며 완성되는 연출사진staged photography이다. 이 복합적이고 중층적 작업은 모더니즘 미술이 고집한 매체의 경계를 허문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애호하는 매체혼합, 이종교배의 전형으로 사실 이제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이지영의 작업 방식은 세계적 대가의 반열에 오른 샌디 스코글런드Sandy Skoglund(1946년생)의 그것과 많은 부분이 겹쳐 있다. 우선 실제 현실의 오브제 혹은 공간을 참조하지만, 강박관념적인 색과 형상의 반복으로 그것을 비일상적인 현실, 환영의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양상이나, 페인팅은 물론이고 연출에 필요한 소품들을 손수 제작하는 깐깐한 부지런함도 동일하다. 공들여 제작한 무대에 모델을 배치한 후 최종 사진을 찍음으로써, 힘겨운 무대 연출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도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점들도 있다. 미국 작가는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연출무대를 최종 사진과 함께 전시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스코글런드는 무대를 이동 가능한 것으로 제작했다. 그리고 공들여 만든 주요 소품을 주형용 수지casting resin처럼 항구적 보존성을 지닌 재료로 제작하여 별도의 '작품'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반면 이지영의 경우 연출무대는 그녀의 작업실 토대 위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전시장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녀가 사용한 소품들은 그 자체로서는 독립성을 가질 수 없는 일종의 부품적 성격을 띠거나, 스티로폼, 골판지 같은 물질로 만들어져 보존성이 취약하여 각개 판매가 거의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두 작가의 중요한 차이점은 스코글런드의 연출사진에는 자전적autobiographical 요소가 배제되어 있는 반면, 이지영의 경우에는 거의 모두가 자전적이라는 점이다. 그녀가 연출한 무대는 'my' 'stage of mind'인 것이다.

이지영_Anxiety_잉크젯 프린트_147×200cm_2013 이지영_Anxiety_잉크젯 프린트_147×200cm_2013

최신작 「My chemical romance」는 이지영과 스코글런드의 작업 방식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닥과 벽, 배관 모두는 주의, 경고를 표지하는 노란색 바탕의 검정색 사선이 강박관념처럼 반복되고, 배관들의 과도한 밀집성과 그 연결의 단절로 뿜어져 새나오는 수증기는 대형 기계실을 암시함에도 불구하고, SF 영화 혹은 브루스 윌리스Bruce Willis의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북새통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조금도 급박하지 않다. 혼란을 수습하려는 제스처를 쓰지만, 상황에 대처할 의지도 물리적 힘도 박탈된 듯 보인다. 그리고 커다란 검은 개도 무심히 혹은 무력하게 무대 왼쪽 밖으로 느릿느릿 나간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와 검은 개의 명확한 관계 설정은 거의 무망해 보인다.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려는 어떤 제스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 상이한 방향을 향하기 때문이다. 되풀이되는 주의와 경고의 표지를 바탕으로, 멎을 것 같지 않은 수증기의 배출 속에서, 즉 위기와 위험의 상황 속에서 말이다. 되풀이되는 연결과 소통의 단절, 이것이 야기하는 혼란은 이지영의 연출무대에서 스코글런드를 연상케 만든다. ● 그런데 이지영은 이 소통의 단절과 혼란의 무대가 자기 내면성의 연출임을 작품제목, 「My chemical romance」를 통해 분명히 한다. 스코글런드의 연출사진처럼 현대사회, 작가를 포함한 일반 현대인이 겪는 소통의 부재, 종말론적인 소외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지영의 그것은 오직 '나의my' '화학적 연애담chemical romance'의 연출이라고 명시한다. 'my romance'의 종말, 실패가 야기한 무관심, 무기력의 '화학적chemical' 연출인 것이다. 삐걱거리며 끝장난 '나의 연애담'의 무대를 연출한 '화학' 물질은 당연히 노란색과 검정색 페인트, 플라스틱 배관들 그리고 수증기처럼 기화하는 글리콜액(glycol-based fluids)이다. 「Gamer」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인 모두는 생존과 자기이익을 위해 매일 서바이벌 게임을 하지만, 이지영이 연출한 'gamer'는 일반 사회인이 아니다. 사출한 대형 레고 블록으로 홀로 색을 맞추며 새로운 형태미를 구상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이지영이 2011년에 연출한 「Gamer」는 일반 현대인의 생존경쟁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을 자신의 직업으로 선택한 이지영을 표상하는 것이다. 물론 예술가 역시 사회 속에서 타자와 '게임'을 한다. 예술가의 목표도 사회적 생존과 성공이지만, 그 과정은 색과 형태와의 무사무욕한 disinterested 거래를 통해서이다. 예술의 수단과 방법, 더 나아가 테마는 레고 블록처럼 기성품으로 주어지지만, 그것들을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취향에 맞게 선택하고 조합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이지영은 페인팅-조각-설치-사진이라는 예술에 있어서 레이디메이드 레고 블록들을 선택해 2007년 이후 작업해오다, 2013년과 더불어 새로운 레이디메이드 레고 블록을 그녀의 작업에 추가했다. 비디오이다. 「My chemical romance」의 해체과정, 작가의 용어를 빌면, 'deinstallation'을, 구성construction의 과정처럼 거꾸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해체deconstruction의 시간을 구성의 시간으로 바꾸어 상영하는 것이다. 스코글런드와 차별성을 부각하는 새로운 레고 블록으로 시간을 거꾸로 거스르는 비디오 작업을 선택한 것이다. 분명히 레고 게임은 이지영의 작업과 흡사하다. 평면구성이 아니라 공간 유희이며, 그녀가 탐구하는 유년시절과 맞닿아 있고, 레고는 언제나 이지영의 예술처럼 새로운 디자인, 현대적 취향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지영_This is not enough_잉크젯 프린트_144×180cm_2012
이지영_anxiety_3채널 HD 비디오, 컬러, 사운드_00:07:27 loop_2013

2010년 작 「Panic room」은 레고 게임처럼 유년시절의 경험을 'stage of mind'의 한 주제로 삼는 이지영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어린이-성년의 연기는 벽, 바닥, 옷장, 소파, 탁자는 물론이고 대형 못핀, 커터, 잔들도 체커보드의 격자문양을 반복하는 무대에서 일어난다. 바닥과 벽은 융기, 굴절되어 탁자는 기울어져 쓰러졌고, 못핀과 커터는 공중을 난다. 현기증 나는 그곳에서 여자는 옷장 속으로 몸을 숨기려 한다. ● 옵티컬 아트optical art의 형상figure/배경ground의 착시효과를 차용한 「Panic room」은 어지럽고 위협적인 외부환경으로부터 안온한 밀폐공간으로 도피하려는 요나 콤플렉스Jonah complex를 현대적으로 개작한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적대적인 삶의 조건에 직면한 성서의 요나가 커다란 물고기의 뱃속에서 위험을 피하듯이, 「Panic room」의 여자는 - 이지영의 작업은 거의 언제나 자전적이기 때문에 몸을 숨기는 여자는 작가의 분신이다 - 굴곡지고 요동치는 공간으로부터 옷장으로 도피하고자 한다. 고래의 뱃속처럼, 어머니의 자궁처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퇴행regression의 공간을 찾는 것이다. 작가 는 옵티컬 아트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정도의 예술적 역량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언제나 회의하고, 자신을 공격하듯 요동치는 예술계에 두려움을 갖는다. 그래서 어머니의 뱃속처럼 안온하고 어둑한 옷장-자궁 속으로 몸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이지영에게 있어서 예술적 성공의 욕망과 실패의 두려움은 'stage of mind'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f이다. 「I'll be back」이나 「Resurrection」, 「Reaching for the star」, 「Neverending race」는 「Panic room」의 변주곡들variations이다. 이 작업들을 통해 작가는 예술의 공포를, 예술계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탁월한 무대장치로 연출한 후, 예술가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으려는 모순된 시도를 도모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언제나 충분치 않고, 예술가로서의 자기성취는 언제나 더디기만 하다. 그리고 예술의 두려움은 계속적으로 작가를 위협한다. 최신작 「This is not enough」는 이러한 작가 이지영의 모순된 'stage of mind'의 탁월한 연출이다. ● 벌집 속에서 한 여자가 주저앉은 채 밖을 지켜보고 있다. 옷 색깔은 주변 육각형 벌집 방의 색과 유사하여 흡사 보호색처럼 느껴지고, 긴 머리 역시 속이 빈 벌집 방과 구별되지 않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가 힘들다. 오직 벌집 방 하나를 통해서만 여자의 이마와 눈썹이 조금 선명히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 벌집-무대 속에는 어떤 수벌과 일벌들의 형상이 전혀 없다. 그래서 마치 새로운 여왕벌이 주인공 여자만 남겨두고 모든 벌을 끌고 나가 분봉을 했다는 인상을 준다. 꽃가루와 꿀이 넘치고 유충이 번식하는 활기찬 벌집이 아니라, 한 여자-여왕벌만이 버려진 벌집에 남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지영이 제작한 무대 속에 자리 잡은 모델은 언제나 작가의 분신인 까닭에, 이 황량한 벌집은 작가의 마음의 방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예술의 자양분이 메말라가는 폐허의 방, 밀랍조차 생기를 잃어가는 불임의 방, 그 안에 작가가 망연자실 앉아있다. 그렇게 앉아 또 다시 밖을 보며 작가는 여전히 도래하지 않는 예술적 성공과 망막한 삶을 또 다시 자기 예술의 원천으로 삼아, 벌들이 날아들고 꿀과 밀랍이 흐르는 자기 예술의 도래를 꿈꾸는 것이다. 이지영의 결핍은 언제나 예술가로서의 자기성취의 욕망에 연결되어 있다. ● 이지영의 연출사진들은 분명히 예술가의 삶의 조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회의와 결핍 등이 강박관념적인 색상과 형태의 반복 속에서 스멀거리며, 환각적인 현실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 힘겨운 예술에 대한 좌절이 은연중에 스며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지친 예술가의 삶을 진술하는 작업들은 의문의 여지없이 이지영의 수작들로 남는다. ● 이지영이 한국미술사의 주요한 인물로 남을 가능성은 커 보인다. 우선 매체에 의한 전통미술의 경계를 해체하고 통합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업은 파격적이고 도전적이다. 그리고 장인적 기예 없는, 허망한 개념주의적 작업이 설쳐대는 작금의 미술계에서 그녀의 작업은 손의 노고와 정교한 기예가 결합된 작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적 역량은 페인팅-조각-설치-사진-비디오 등 현대미술 매체 전반에 걸쳐 있으며, 컨셉 역시 현대성과 아울러 깊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업방식을 약술하면서 글을 맺기로 하자. 작가는 2-3개월에 걸쳐 조형, 설치작업을 한 후, 그 세팅작업을 디지털카메라로 테스트한다. 아울러 모델들의 배치를 고려하면서 최종 촬영의 조건을 모색한다. 그리고 모델의 위치와 자세를 조정해나가면서, 4x5 인치 원판 필름으로 사진을 연출사진을 확정한다. ■ 최봉림

이현호_가로등_한지에 채색_170×300cm_2013
이현호_녹색옥상_한지에 채색_130×130cm_2013

일상의 풍경, 그 사변적인 표정 ● 오늘의 한국화가 지니고 있는 외연은 실로 대단히 넓은 것이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루어진 다양한 조형적 경험들을 축적하며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혹자는 한국화 정체성의 훼손이라 평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시대적 변화에 따른 필연적인 과정이라 말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오늘의 한국화는 여전히 급변하는 사회 현상에 맞춰 파격적인 변혁이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이는 과거 경험해 보지 못 한 새로운 시각적 자극으로 우리들에게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국화의 외형은 일단 다양한 조형 실험의 결과와 분방한 개성의 발산을 통해 현대라는 시공을 부유하고 있지만, 그 내면은 심각한 자기 정체성의 상실과 현대회화로서의 자괴감이라는 숙명적인 그림자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곡에 대해 혹자는 굳이 한국화라는 고루하고 경직된 가치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현대회화로서의 가능성을 직접 타진하고 모색하기도 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전통적 가치의 재인식을 통해 서구중심의 현대회화와의 차별성 확보하고자 하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이든 한국화는 변화의 와중에 있으며, 이러한 변화를 효과적으로 개괄하여 설명할 수 있는 효과적인 결론을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의 솔직한 현실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시간과 거리일 것이다. 이는 오늘이라는 역사를 판단하고 가늠하는 기본적인 조건인 동시에 가장 이성적인 평가를 담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일 것이다.

이현호_숲_한지에 채색_131×97cm_2012
이현호_흰연기_한지에 채색_131×97cm_2012

작가 이 현호의 작업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업은 외형상 자연을 다루는 서정적인 내용을 지지체로 삼고 있다. 안정적인 색채의 운용을 통한 빼어난 묘사력은 작가의 작업 수평을 담보하는 기본적인 요건이라 여겨진다. 울창한 여름의 신록들이 가득한 화면은 일견 실경산수를 연상시키지만, 이를 산수라는 장르로 규정하기에는 무엇인가 마뜩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를 단순히 풍경으로 수렴해 버리는 것 역시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의 작업은 바로 산수와 풍경의 미묘한 경계에 위치하는 것으로 굳이 이를 구분하는 것 자체는 별반 특별한 의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바로 확장된 한국화 외연의 한 자락이기 때문이다. ● 일단 작가는 굳이 빼어난 경관을 취하거나 명소를 택하지 않고 일상의 주변에서 마주할 수 있는 평범하고 익숙한 자연을 취하지만, 그가 포착한 자연은 인위적인 것에 의해 가공되거나 꾸며진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것이다. 그는 이에 최소한의 인공적 사물을 더하여 그 평범함에 또 다른 표정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독특한 풍광으로 가공해 내고 있다. 그것은 카메라 포커스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엄격한 원근과 투시의 원칙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화면에서의 자연은 관념적으로 개괄되어진 부호로써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색채와 양감을 지닌 실체로 제시되고 있다. 일견 그의 작업에 있어서 최대 관심사는 자연의 재현에 있다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의 작업은 기계적으로 포착된 이미지를 수공에 의한 가공의 과정을 거쳐 인간적인 체온을 더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이라는 대상을 물질적 실체로 인식하는 풍경화나 이상화를 통해 자연을 재구성하는 산수와도 다른 것이다. 이는 작가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일상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시각을 통해 낯선 것을 반영함으로써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풍경이나 산수의 정형화된 틀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라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계적이고 기능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한 솔직한 표현으로 작위적인 의도를 배제하여 있는 그대로를 표현해 냄으로써 일상적인 자연의 표정을 돌연 낯선 것으로 변환시켜 보는 이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는 형식상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형식을 띄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시선을 그 속에 은닉시키는 것이다. ●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에 대해 굳이 구분하자면 간(看)과 관(觀)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간은 대상에 대해 물질적이고 현시적인 접근, 즉 육안(肉眼)에 의한 관찰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관은 대상에 대한 일정한 사유와 사색을 동반한 심안(心眼)에 의한 시각이라 해설할 수 있을 것이다. 간이 형상을 통한 객관을 전제로 한다면, 관은 사유를 통한 주관화라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의 look과 see는 바로 이 두 가지의 차이점과 유사한 것이다. 작가는 대상에 육박하여 객관이라는 조건을 확보하고, 이를 관조적 시각에 의한 가공의 과정을 거쳐 그 속에 내재된 언어와 운율, 표정 등을 포착하고 표출함으로써 자기화, 개별화하고 있다. 그가 작업일지에서 서술하고 있는 "숲, 산 등 자연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혀 있는 인공적 건축물들에서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익숙하게 바라보는 모호한 시선이 나에게도 놀라움을 준다. 그저 하나의 구도로써 바라보면 빽빽이 들어선 숲속에 작은 변화들이라 재밌게 바라보게 되다가도 점차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지는 순간 나의 시선의 흥미만으로써 바라볼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작은 변화였지만 반복되어 지는 순간 일상이 되어버리고, 일상은 익숙해져 버려서 점차 변화에 무감각해져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단계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토로인 셈이다.

이현호_포인트_한지에 채색_130×161cm_2013

작가의 작업은 수용성 안료를 표현 매재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화면의 객관적인 자연의 형태감과 어우러져 수채화와의 연계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킬 수 있겠지만, 색채의 반복과 중첩을 통해 발현되는 그윽하고 깊이 있는 색채의 심미는 전형적인 채색화의 그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구축되는 특유의 운율은 서정적인 화면의 한계를 넘어 또 다른 공명으로 보는 이에게 전해진다. 이는 작가의 작업이 단순한 서정적 풍경이나 재현이나 묘사에 집중하는 객관적 사실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특유의 화면을 구축할 수 있는 효과적인 조형적 설정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오늘의 한국화가 지니고 있는 외연은 실로 광대하고 다양하다. 이는 이미 전통적인 감상관이나 심미 체계로는 수용해 낼 수 없을 정도로 폭넓은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전혀 새로운 조형의 세계로 전이된 것도 존재할 뿐 아니라 여전히 온전한 평가가 유보된 채 미완의 상태로 현대라는 시공을 부유하는 것들도 있다. 작가가 일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평범한 풍경의 개별화는 분명 서구적인 시각과 표현, 그리고 전통적인 조형 방식이 혼용된 것이다. 이를 단순히 절충과 융합이라는 시대적 경향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선뜻 내키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이라는 인간에게 제시된 삶의 조건을 일상이라는 시간성을 통해 개별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속에 내재된 자연의 또 다른 표정을 읽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객관이라는 조건을 통해 사유를 동반한 관조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표현을 통해 자연을 주관화, 개별화함으로써 이전의 자연에 대한 표현과는 사뭇 다른 소통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러한 현상을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과 거리가 필요로 함은 당연하다. 이를 확보할 때 까지 우리가 응당 취해야 할 자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부단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일일 것이다. 적어도 작가는 이를 충족시킬만한 건강한 작업의식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 김상철

Vol.20130516a | 2013 OCI YOUNG CREATIVES-이지영_이현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