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진展 / PARKSEJIN / 朴世珍 / painting   2013_0516 ▶ 2013_0613 / 월요일 휴관

박세진_서리 Frost_종이에 아크릴채색, 체리, 풀_150×358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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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8:00pm / 주말_10:30am~07:00pm / 월요일 휴관

두산갤러리 서울 DOOSAN Gallery Seoul 서울 종로구 연지동 270번지 두산아트센터 1층 Tel. +82.2.708.5050 www.doosangallery.com

사실의 감각 ● 박세진의 풍경에 다가서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첫 번째 관문은 그것이 볼품없는 풍광을 다루고 있다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박세진의 2007년 작「After Millet」는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린 바르비종의 목가적 풍경들과 조금도 닮아있지 않다. 그보다 앞서 그린「공터 6」(2003)은 꽃이 만발한 들녘이 그 중심임에도, 예컨대 반 고흐의「삼나무가 있는 풍경」이나 모네의 수련으로 덮인 연못과는 한 눈으로도 확연하게 구분된다. 이는 박세진의 풍경화가 피토레스크(pittoresque)의 노선, 곧 '그림이 될 만한 것'의 미학을 기꺼이 버린 까닭이다. 박세진의 회화는 첫눈에 감탄을 자아내는 정제된 스펙터클, 멋진 풍광과 세련된 그리기 기술에 대한 미적 편집인 피토레스크 미학에 대한 저항의 산물인 것이다. ● 박세진의 이런 미적 저항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reality)에 대한 그의 직관적 감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감각은 '멋진 풍광'이 아니라 '실재하는 풍경', 또는 '풍광의 실재'를 추구와 직결되는 것으로, '시선의 탐미'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추구했던 이 세계의 핵심 사안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세계를 단지 전통이거나 관습에 대한 형식적 거부 정도로 이해하는 건 매우 잘못된 접근이 될 것이다. 박세진의 회화가 문제삼는 건 미(美)라는 안전한 격리공간 안에서 붓으로만 혁명을 찬미해대는 알량한 전위주의의 관심사가 아니다. 여기서 의미는 그림이 될 만 한 소재, 풍광이 좋거나 정취가 그윽한 장소 따위가 아니라, 자주 소재 안에 감춰져 있거나 소재를 넘어서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박세진_서리 Frost_캔버스에 유채_80×100cm_2012

사실에 대한 이러한 감각은 일찍이 귀스타브 쿠르베가「안녕하세요 쿠르베씨」(1854)를 그렸을 때 이미 환기된 바 있는 것과 일면 흡사하다.「안녕하세요 쿠르베씨」에서 멀리 지평선을 향해 멀어져 가는 숲과 원근법으로 축약된 들, 오솔길과 마차, 근경의 길가에 핀 들꽃들은 작가가 경험하는 세계-후원자와의 긴장감으로 대변되는-와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다. 여기서 풍경은 실존적 상황에 견고하게 묶여 있으므로, 그 맥락을 등진 심미적 인식이나 판단은 아예 불가능하다. 비록 매우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쿠르베가 분리되거나 독립된 스팩타클로서 풍경을 그것에 내재하는 분열의 속성과 이데올로기를 인식함으로써 피했던 것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반면 통상적인 풍경화는 피토레스크 미학의 충실한 실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서 '그림이 될 만하지 못한 것들'을 추방함으로써 가능한 결과다. 전통적인 풍경화 연습이 자연의 열등한-것으로 간주되는-요인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제거할 것인가를 연마하는 과정이어 왔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풍경화는 자연 전체에서 보고 싶거나 보아야 할 것만을 남기는 선별적 인식론의 산물로서-선별의 근거는 주로 당대의 관례화된 미적 규범에 의한다-, 사실의 분량이 그만큼 위축되거나 감가된 자연이이라 할 수 있다. ● 공식화된 미술사의 분류개념을 굳이 빌자면, 박세진의 풍경회화는 'pittoresque'가 아니라 'realistic'의 노선에 귀속된다. 이는 이 세계가 미추(美醜)의 이원론으로 규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 경험과 몽환을 넘나드는 온갖 것들의 혼합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목전에서 펼쳐지는 실존의 풍광이 자주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작가는 거의 미쳐가는 중인 도시를 경험했다.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인, 그래서 기억과 상상 같은 사실의 다른 통로들을 필요로 하는 그런 도시 말이다. 한적한 시골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다. 거기서도 자연은 변화와 변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당신이 한국에 거주한다면, 한 시간만 차를 몰아 변두리로 나가보라. 당신을 맞이하는 것은 포장된 산책로와 주차장으로 할당된 마당들, 케이블카로 대체된 능선들이리라. 그것은 더 이상 고향도, 루소가 외치던 돌아가야 할 자연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당신이 정직하다면, 그 광경들을 하나의 멋진 스펙터클로 요약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갈 높은 개연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자연'은 사실에 대한 지독한 호도며, 미적으로 거짓된 것이라는 사실도 아울러서 말이다.

박세진_달려라, 달려!_종이에 아크릴채색, 체리, 풀_150×330cm_2012

분열의 인식론, 배타적인 정제미학에 저항하기 ● 박세진이 밀레보다는 쿠르베에 더 가깝다는 맥락은 이해의 초입일 뿐이다. 박세진의 회화가 그림이 될 만한 부분과 그렇지 못한 사실들에 대한 편협하고 왜곡된 인식론에 대한 저항을 내포하는 건 사실이지만, 피토레스크 미학의 폭력성을 극복하는 방법론은 쿠르베의 그것에 비할 바 아니다. 박세진의 탈정제, 탈분열의 미학은 훨씬 더 전향적이고 적극적으로 정제와 분열을 넘어서는 길, 곧 구분이 아닌 포용의 길, 배제가 아닌 수용의 길로 선회한다. 예컨대 문제투성인 도시를 폭파시키는 대신, 비록 사라져가는 지평선의 저 끝트머리, 소멸 직전의 시점에 보일랑말랑하게 배치하면서라도 기꺼이 포용해내는 것이다. 이 버리기를 대체한 미적 주워담기에 의해 많은 것들이 복원되고 되살아난다. ● 피토레스크의 분열의 인식론, 배타적인 정제미학에 저항하기 위해 작가가 고안해낸 이 미적 주워담기에 의해, 박세진의 풍경화는 '사실을 넘어서는 사실'의 회화로 나아간다. 정제되거나 규정되지 않음으로써, 매우 비사실적으로 보이는 진화된 사실주의의 드넓은 개활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사실을 포기함으로써 사실에 다가서는 이 풍경에서는 오히려 얼룩들, 재현과 탈재현의 공존, 묘사의 불균등성, 구성적 느슨함, 원근의 임의적 적용이 선호된다. 스펙터클의 예술론이 뒷전으로 물렸던 것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재주장하기 시작한다. 볼 것 없는 변두리의 나대지에는 공을 들이는 반면, 도시는 대수롭지 않게 원경으로 쫓겨나거나 현저하게 축소된다. 세련되고 장식적인 요인들은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원근법의 성실한 적용, 형태의 엄밀성 또는 정확성, 구성의 질서정연함, 사물의 묘사, 빛과 톤의 상호성 같은 전통적인 규범들은 새로운 사실주의의 도래를 위해 뒤로 물러선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세진의 풍경이 선택되어야 할 것들과 버려져야 할 것들 사이의 어떤 지연, 연쇄작용에 의해 허용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문명과 자연, 사물과 이야기, 과거와 현재, 시각적 사실과 비시각적 사실이 모두 회화라는 하나의 용광로 안에서 공감대를 가진 것들로 녹여진다. 이제 그것에는 합리 뿐 아니라 불가지론을 자리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일상 뿐 아니라 상상이나 몽환도 동등하게 개입한다. 기록 옆에 은유가 경험의 이웃에 꿈이 자리한다. 이 새로이 열려지는 세계에서 그 각각의 것들은 타자의 자리를 박탈하거나 훼손함 없이 자신들의 자리를 확보한다. 차원을 넘나들며 이질과 타자성을 아우르는 포월성, 추방과 단절, 분리와 분열을 수습하는 개방성과 연속이 이 세계의 미학적 지평인 것이다. 박세진의 풍경은 이렇듯 사물과 풍경, 그리고 사실에 대한 감각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여실한 과정을 보여준다.

박세진_Monday_캔버스에 유채_130×115cm_2012

포괄적 사실주의, 또는 포월의 실경산수를 향해 ● 극단적 형태의 논리실증주의와 실용주의가 사람들의 정신을 온통 짓누르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사실에 대한 감각'이 심각하게 뒤틀려 있다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논리실증주의가 사람들의 인식을 핏기라곤 없는 창백한 실험실로 만드는 동안, 실용주의는 필요한 것 외에는 생각하지 말 것을 종용해 왔다. 이런 시대에 과학실험실을 넘어서는 진실과 필요의 외부에서 사실을 탐구하는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이 시대의 사실성은 오로지 '법칙', '질서', '성향' 등과 같은 '비지성적인' 용어들에 의해서만 접근되는 것이 되어버렸다.(그런 것들이 비지성적인 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없는 내적 종합구조'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버트 K. 채스터턴(Gilbert Keith Chesterton)은 말한다. "나는 인생을 바깥에서 보는 이들의 명쾌한 논증보다 안에서 보는 이들의 공상과 편견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증명된 사실이나 객관적 기록보다 후자의 것들, 즉 사색과 상상, 신념과 동기에 사실과 사실성이 더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대인이 유독 상식, 합리성, 실용주의, 실증주의 등으로 불리는 것들에 빠져드는 것은 사실에 대한 그들의 감각이 그만큼 쪼그라들고 둔해졌기 때문일 뿐이다. 바로 여기가 예술의 진정한 임무가 환기되어야 할 지점이다. 예술의 위대한 순간이란 그 고유한 속성을 통해 사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얼마나 왜소하고 창백한 것인가를 일깨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뒤틀린 사실감각에 의해 사실 자체가 거의 언제나 잘못 정의되어 왔으므로, 이 시대는 사실 자체를 믿지 않는 회의주의자들로 넘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젠 회의주의자들의 그 회의도 거의 다 소모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회의하는데 지쳐버렸고, 진지한 척 하는 회의의 철학에 깃든 거짓에 대해서도 (비록 그 수가 소수일지라도)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회의에 지친 이 시대의 사람들은 이제 회의가 아니라, 회의를 끝낼 수 있는 어떤 '사실'을 간절하게 기대하고 있다. 아직도 예술의 많은 시도들은 여전히 미디어나 교체해가면서 편협한 사실과 사실에 대한 회의주의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 사이사이에서 사실의 동경심과 소중함을 여전히 간직한 채 그것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박세진이 그같은 사람들 가운데 중 한 명이다. ● 박세진은 자신의 회화의 노선을 겸재를 넘어서는 실경산수, 곧 포월적 실경의 미학으로 함축한다. 겸재조차 기꺼이 넘어서야 도달 가능한, 포월의 사실주의, 기존의 편협한 사실감각을 질타하면서 그리고 그것이 누락했던 것들 까지를 초대해 들이는 전향적인 사실주의가 하나의 궁극적인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현재의 풍경들은 '그림이 될 만한 것'으로만 제한했던 회화의 창구를 더 개방하는 것과 관련된 일련의 실험과정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포괄적 사실주의, 또는 포월의 실경산수를 추수해내기 위해 힘껏 밭을 가는 과정으로 말이다. ■ 심상용

Vol.20130517g | 박세진展 / PARKSEJIN / 朴世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