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숨바꼭질 Hiding and seeking of memory

최윤정展 / CHOIYOONJEONG / 崔允靜 / painting   2013_0522 ▶ 2013_0602

최윤정_그리고, 어쩌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3×116.8cm_2012

초대일시 / 2013_052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30am~06:30pm / 주말,공휴일_11:30am~06:30pm

갤러리 도올 GALLERY DOLL 서울 종로구 삼청로 87 Tel. +83.2.739.1405 www.gallerydoll.com

어떤 몽상가의 반란 - 비루한 일상을 건너는 가장 완벽한 방법"나는 나를 닮은 영혼을 찾고 있었는데,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땅의 구석구석을 뒤졌다."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중에서) 꿈꾸는 기질을 가진 사람은 멜랑콜리하다. 이때 멜랑콜리는 작업의 영감 혹은 동인이 된다. 발터 벤야민은 "멜랑콜리한 인간이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유일한 쾌락은, 매우 강력한 것인데 바로 알레고리다"라고 강조했다. 몽상가의 알레고리, 아마 최윤정의 작품도 이러한 맥락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기억-꿈-몽상'이라는 테마에 집중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은 결국 '환상'과 '알레고리'라는 범주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사실, 유년 시절의 기억은 지각장면의 정확한 재생이 아니다. 기억은 꿈처럼 늘 왜곡되고 변형되기 마련이며, 어쩌면 현실인지 환상인지조차 구분이 안되는 '신화적인 영역'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최윤정의 작업은 '기억'이란 테제를 통해 '심리적 실체'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작가의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익숙함과 낯섦, 현실과 환상, 평화와 불안, 마법과 탈마법, 노출과 은폐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술가들이야말로 이런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존재들이고, 그 줄타기기 아슬아슬할수록 작품은 위태로운 미적 쾌락을 담보하기 마련이다. 최윤정 역시 그런 경계를 탐색하는 촉수를 가지고 끊임없이 이미지로 사유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이미지로 사유하는 작가의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은 자연스럽게 알레고리가 될 것이다. 알레고리는 본질적으로 환상적일 수밖에 없으며, 모든 환상은 알레고리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환상은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환상의 그리스 어원이 '가시화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환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현실은 오히려 환상에 의해 가시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환상문학 이론가인 로즈메리 잭슨이 설파한 환상의 모순어법이자 전복적 힘이다. 사실 문학이나 영화에서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물건은 거울, 렌즈, 초상화, 호수와 같이 시선을 환기하는 것들이 많다. 최윤정의 작품에서 환상의 매개체는 반드시 시선과 관련된 사물은 아니다. 어쨌거나 작가는 자신만의 이상한 나라(wonder land)에서 환상을 만들고 지우고 키워내고 있다. 그 환상을 구성하는 알레고리의 시각적 방식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작가 특유의 이미지로 떠나는 심리적 모험을 따라가 보자.

최윤정_작은기억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120cm_2013
최윤정_속마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193.9cm_2013

치밀한 이중교배의 미장센을 위하여 ● 최윤정의 작품에서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매개체는 무엇인가? 먼저 작가는 미장센적 배치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연출가가 연극이나 영화의 무대 위에 모든 시각적 요소를 치밀하게 배열하는 것 같다는 뜻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드러나는 주요 이미지는 앵무새, 회전목마, 실타래, 침대, 소파, 테이블과 같은 이미지들이다. 먼저 앵무새는 무엇인가? 작가는 자신이 그리는 앵무새는 박제된 앵무새라고 말한다. 작가는 앵무새를 통해 이중적 모순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나의 모순은, 말은 하지만 의미 없는 말을 지껄이는 앵무새 그러니까 자기의식 없이 의미 없는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앵무새에 관한 것이다. 또 하나의 모순은, 살아있는 척 하고 있지만 사실은 죽어있는 앵무새의 모습에 관한 것이다. 박제된 앵무새는 이중부정의 산물로 기능한다. 앵무새는 분명 청각이라는 감각에 대한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소리조차 낼 수 없는 박제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죽은 새를 고정시킬 수 있는 지지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단박에 그것이 박제된 새임을 인식하기에는 좀더 다른 시각적 장치가 필요해 보인다. 어쩌면 히로시 수기모토(Hiroshi Sugimoto)의 '자연사 박물관' 연작 중 박제된 새 사진이 살아있는 새 사진보다 훨씬 더 그로테스크하고 섬뜩한 느낌 즉 언캐니(uncanny)의 분위기를 드러낸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즉 최윤정이 그려낸 앵무새 이미지는 설명 없이는 독해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박제된 앵무새를 표현하고자 할 때 수반되어야 하는 시각적인 장치에 대한 섬세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 다음 이미지는 회전목마이다. 회전목마는 앵무새와는 달리 이미 박제된 사물이다. 보통 회전목마는 유년시절의 향수를 환기하는 매체이다. 누구라도 한번쯤 그곳에서 상하로 움직이며 원무를 추는 동안 환호를 질렀던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회전목마는 단순히 유년시절의 환상의 매개체가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한때 매료되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회전목마의 데드히트』의 메시지와 유사하다. 여기서 회전목마는 삶의 운행시스템을 의미하며, 그것으로 대변되는 삶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무데도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맘대로 내릴 수 없고, 맘대로 탈 수도 없으며, 누구를 따라잡을 수도 없고, 따라잡히지도 않는 곳! 정해진 공간 속에서 일정한 속도를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일상의 대한 메타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런 회전목마 위에서 가상을 적을 향해 치열한 '데드히트'(경마 따위에서, 둘 이상이 같은 시간에 결승점에 닿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일)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최윤정은 무의식적으로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삶과 죽음의 순환고리를 직시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유지하기 위해선 라캉의 아포리즘처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그것을 환상대상(오브제 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또 하나의 주요한 오브제는 실타래다. 보통 실타래는 도상학적으로 얼기설기 꼬인 인간관계, 그중에서도 연인 관계의 복잡다단함을 의미할 때 자주 쓰인다. 그러나 최윤정의 실타래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작가는 복잡한 심경을 뜨개질로 해소하거나 정리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실타래는 기억의 뭉치 혹은 우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뜨개질이라는 작업을 통해 기억을 불러내고, 지우고, 되새기는 등 심리적 행위를 반복했던 것이다. 따라서 화면의 실타래들은 작가의 자유연상의 메타포로 기능한다. ● 그 다음으로 드러내는 이미지들은 소파, 침대, 테이블, 의자와 같은 아주 일상적인 소재들이다. 침대와 소파와 같은 오브제들은 삶충동과 죽음충동 즉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교차하는 공간이다. 예컨대 침대와 소파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 안락과 휴식을 제공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불면증의 사람에게 그곳은 더 이상 잠과 휴식의 장소가 아닌, 끔찍한 상징적 죽음의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침대와 소파는 앨리스의 토끼굴과 같은 자신만의 환타지의 세계로 넘어가는 분기점이지만, 그곳으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는 일조차 현실에서는 그다지 녹록치 않은 일임을 드러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최윤정이 사용하는 주요 모티프들이 의미하는 바를 짚어보았다. 문제는 작가가 의도했던 것보다 묘사된 이미지들이 자명한 동시에 다양한 의미의 층위를 드러내기에 아직은 좀 미흡해 보인다는 점이다. 먼저 작가가 사용하는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소재들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낯설게 보이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보다 정치(精緻)한 메커니즘이 필요해 보인다.

최윤정_잠기는 몽상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162.2cm_2013
최윤정_시간이 스친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162.2cm_2013

멜랑콜리의 색채감각에 관하여 ● 무엇보다 최윤정 작업의 핵심적 요소는 색채이다. 사람들은 보통 색채에서 기쁨과 슬픔같은 정서를 느낀다. 따라서 색채가 치유력을 가진다는 것은 명백하며, 최윤정 작업의 시발점 역시 색채를 통한 자발적 자기치유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작업에서 색채의 작용과 효과는 요긴해 보인다. 먼저 작품의 기본 색채는 분홍색이다. 그런데 그 분홍색은 채도와 명도가 높은 색이 아닌, 회색이 섞인 파스텔톤의 다소 어두워진 분홍색이다. 색채심리학에서 분홍은 영적인 아름다움, 정신적 고양, 인류에 대한 사랑과 연민, 잠재성의 성취 등을 상징한다. 통상 분홍색을 사용하는 주체는 온화하고 다정하며 평화주의자이다. 따라서 분홍은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있고 충분히 보호받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색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분홍색은 일상에 지친 사람, 고난과 학대를 받은 사람이 선호하는 색이기도 하다. 그것이 심신을 안정시키며, 공격적인 감정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효과를 지니기 때문이다. 마치 동양의 음양의 논리처럼 어둠 속에 빛이 있듯이 결여와 잉여가 분홍이라는 하나의 색채 안에 공존하는 것이다. ● 최윤정 작품의 기본색조인 회색톤의 분홍색은 화면을 다소 멜랑콜리해 보이게 만든다. 흔히 회색이라면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 없이 평화를 추구하는 색채인지라, 방향성이 없는 중립적인 것, 즉 최상도 최악도 아닌 것으로 인지된다. 회색은 활기가 부족하며 의지의 박약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편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회색은 부활한 예수를 나타낸다. 회색이 신성을 뜻하는 흰색과 죄와 죽음을 의미하는 검정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또한 회색은 그 자체가 흰색과 검정색의 결합인 것처럼 빛과 어둠의 양면성을 갖고 있는데, 긴장과 안심, 명료와 모호함 사이를 왕래한다. 이렇듯 회색은 타협적인 색채로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진정시켜주기도 한다. 결국 분홍색과 회색의 결합은 차분하고 이완시키는 에너지를 가져다준다고 볼 수 있다. ● 미술사적으로 보면, 르네상스 이후 대부분의 종교화는 천상의 색으로 엷은 분홍을 사용하고 있다. 천사와 에로스 등 천상의 존재들의 몸이나 옷에는 분홍색이 칠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동양의 종교화에서도 분홍은 피안의 색으로 사용된다. 불교에서 분홍은 열반을 상징하는데, 인도의 아잔타 석굴사원의 벽화 속 보살의 얼굴과 연꽃은 분홍색으로 채색되었다. 이처럼 분홍색은 고대부터 천상과 지복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피카소의 분홍색시대 역시 피카소의 '벨 에포크(좋은 시절)'에 탄생된 것이다. 피카소가 가난하고 우울했던 시절에는 차갑고 무거운 파란색을 사용했으며(청색시대), 사랑하는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 가난하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낼 때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장밋빛(분홍색시대)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것만 보다도 분홍색이 어떤 상징을 가졌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 분명 무의식적으로 선택되었을 최윤정의 회색톤의 분홍색은, 작가로 하여금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사고를 유지시켜 주는 동시에 불안과 고독을 진정시켜주는 치유의 색채가 되었을 것이다. 주지하듯 이런 색조는 멜랑콜리한 정조를 드러내지만, 이런 색조야말로 진정 환상의 베일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최윤정은 색채 하나만으로도 어쩌면 진리가 드러나는 방법, 즉 드러내는 동시에 숨기는 알레테이아(aletheia: 비은폐 혹은 탈은폐)를 실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윤정_기억지우기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7×162.2cm_2011
최윤정_어느 날에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62.2cm_2013

욕망의 베일에 관하여 ● 환상은 현실에서의 불가능한 꿈과 욕망을 포장함으로써 견디기 힘든 현실을 통과하도록 만드는 장치라는 점에서 현실타협의 기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환상의 힘은 그것이 상징질서에 포획되지 않은 잉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잉여야말로 라캉이 말한 실재계의 오브제 아 혹은 환상대상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상이야말로 욕망을 구성하면서도 그런 욕망을 가리는 베일이라고 주장하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은 그대로 최윤정의 작품에도 적용된다. 또한 최윤정이 자신의 영감의 텍스트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 바로 환상의 세계와 논리의 세계가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 그리고 그 지점에서 탄생되는 유쾌한 농담과 아이러니에 관한 탐구를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윤정의 작품의 모호함과 취약함은 바로 이런 절묘한 모순적 만남에 대한 치열한 사유의 부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최윤정이 좀더 지독하게 무의식적인 이미지들과 유희적 만남을 가졌으면 좋겠디. 어쨌거나 현대미술은 작가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잘 놀아주어야 한다. 더불어 끊임없이 자신을 타자화시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포지셔닝을 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견고한 수사(rhetoric)를 담보한 정교한 이미지의 연출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상식과 인습의 틀을 깨는 스토리텔러로서의 최윤정의 다음 작업이 사뭇 기대된다. 누가 말했던가! 모험심 없는 앨리스의 독보적인 명석함이 없었다면 이상한 나라가 어디 있었겠느냐고. ■ 유경희

Vol.20130522g | 최윤정展 / CHOIYOONJEONG / 崔允靜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