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과 金正喜, 김정희

김정희展 / KIMJEONGHEE / 金正喜 / painting   2013_0519 ▶ 2013_0608 / 월,화,수요일 휴관

김정희_Thing-001 歲寒圖_에나멜 페인트, 판지, 글기_72×190×7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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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1:30pm~06:30pm / 월,화,수요일 휴관

누하동 72번지 nuha 72 서울 종로구 누하동 72번지

누하동과 김정희 ● 누하동에 조그맣고 낡은 한옥이 한 채 있다. 워낙 낡아 오랜 시간 수선하다보니 새록새록 애착이 생겼다. 살림집을 생각하고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앙증맞은 한옥의 멋을 보니 그 자체가 보기 좋아 당분간이라도 보면서 즐겼으면 하는 마음 생겼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미술 작품이 있고 좋은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라도 나누는 공간이 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 누하동은 누상동, 옥인동, 필운동, 체부동, 통의동, 통인동, 창성동, 효자동 등과 이웃하고 있다. 누하동 집은 아주 작은 한옥으로 근처에는 동양화가 청전 이상범 선생의 화실(누하동)이었던 곳, 최초의 근대건축가인 박길룡 선생이 설계한 한국화가 박노수 선생의 집(옥인동-박노수 선생께서는 얼마 전 돌아가셨으며, 이집은 조만간에 '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활용된다함.), 천재시인 이상의 집터(통인동), 윤동주 시인이 하숙하던 집(누상동), 동백꽃으로 유명한 시인 김유정의 집(사직동) 등이 있어 많은 예술인들의 흔적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궁술을 계승하기 위해 현재도 사용하는 황학정과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부암동의 석파정(얼마 전 '서울미술관'이 개관하며 미술관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욱 뽐내고 있는)의 모습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김정희_Thing-007 蘭_에나멜 페인트, 판지, 글기_110×93×7cm_2013

그리고 우리의 최고 성왕인 세종대왕께서 나신 곳이 통인동이며, 근처에는 지금은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어 다른 묘목들이 자라고 있는 백송나무의 터가 있다. 백송 터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추사 김정희의 삶의 향취를 느낄 수도 있다. (추사는 월성위궁(月星尉宮)에서 어린 시절부터 살았다고 한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며 월성위(月星尉)에 올랐으며, 영조는 그들을 위하여 월성위궁을 지어 주었고 자신이 아끼는 백송 나무를 선물하였다 한다.) ● 또한 이 동네는 영·정조시대의 문예부흥의 기틀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동네에서 빤히 보이는 인왕산은 우리 문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진경시대와 북학파라고도 불린 실학의 산실이었던 이 동네를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실학은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며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초기 개화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듯 누하동을 비롯한 서촌은 많은 문화와 그에 따른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은 서울시에서 한옥보존지역으로 지정하여 동네 곳곳이 조금씩 단장을 하며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서촌은 북촌과는 달리 좁은 골목들로 이어져있기에 아기자기하며 서민-조선시대에는 주로 중인계급들-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골목문화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주 유명한 화랑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화랑과 대안공간,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밖에도 경복궁, 사직공원, 광화문광장, 각급 학교와 기관, 도시락 카페로 유명하며 문화와 예술이 함께하는 전통시장인 통인시장 등이 자리하고 있고, 특색 있고 재미있는 작은 식당, 커피숍이나 까페, 작가들의 작업실 등이 어울리며 이웃하고 있어 새로운 모습의 문화와 예술이 자라고 있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

김정희_Thing-008 蘭_에나멜 페인트, 판지, 글기_93×110×7cm_2013

金正喜와 김정희 ● 나의 이름이 추사와 같은 것은 추사의 광팬이며, 교육자이며 시를 쓰셨던 아버지의 뜻이었다. 어린 시절-지금도 약간 그렇기는 하지만-여자 이름과 비슷한 것이 싫었던 적도 있었지만 성장하며 그 이름의 해석-바름과 기쁨. 세상에는 바르지 못한 것에도 기뻐하는 인간들이 있기에-이 마치 내 인생의 좌우명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누하동 집을 수리하며 주변에 관심을 두다보니 그전보다 더 추사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름도 같아 늘 무언가 기대어 있는 듯한 마음도 있고 아버지의 뜻이어서인지, 워낙 평가가 대단하여서인지-누구나 학문을 하고 예술을 한다면 다 그렇겠지만- 나도 언젠가부터 추사의 작품과 삶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 추사가 살며 그의 학문과 예술에 뜻을 세웠던 곳과 이웃해있는 집을 수리하다보니 추사의 작품으로 작업을 하여 조금 더 추사에 가까이 가보고, 이참에 마음 한구석의 무언가도 탕감해 보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 유홍준 선생은 그의 저서인 '완당평전'에서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라고 하였다. 나도 일반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기에 대충 아는 바이다. 보통 사람들은 추사하면 추사체를 떠 올리며 글씨 잘 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들하고 있으나 추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서예가가 아니라 시와 문장에도 능했음은 물론이며, 고증학, 금석학 등에서도 뛰어난 선비 중에 선비이며 학자 중 학자로 감히 함부로 논한다는 것이 불경스럽게 느껴지게 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흔히들 김정희하면 추사체를 연결하게 된다.

김정희_Thing-005 竹爐之室_에나멜 페인트, 판지, 글기_23×100×7cm_2013

그러나 추사체라는 것이 그 글씨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완당평전에 보면 추사와 동시대 인물인 초산 유최진은 "추사의 글씨는 그의 서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며,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추사체의 특징을 설명하였다 한다. 이렇듯 추사의 글씨는 작가의 조건이자 사명인 실험정신의 결과이며, 타고난 천재성 뿐 아니라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천 자루의 붓을 없앴다는 자신의 말과 같이 노력과 수양을 통한 진화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추사의 작품은 그림 같은 글씨이며, 글씨 같은 그림이다. 그러기에 그의 글씨는 회화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마치 회화 중에서도 정신세계를 담고 있는 개념미술처럼 보인다. 1960년대에 시작된 개념미술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 이미지를 표현한 비약적인 변천이었으며, 사진이나 문서, 일상적인 단어나 문장 따위 등을 수단으로 삼고 있다. 추사는 이미 이러한 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었으니 서구의 비물질적 반미술 운동인 개념미술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 추사는 기존에 있는 글이나 문장보다는 자신이 글자의 새로운 조합으로 그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글자 한 글자의 뜻에 숨어있는 개념과 이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뜻과 개념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극히 개념미술의 특징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희_Thing-012 谿山無盡_에나멜 페인트, 판지, 글기_60×160×7cm_2013

세한도가 있다.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한도는 그림과 20여개의 발문이 붙어있는 총 길이 13m에 이르는 두루마리 형태로 그의 나이 59세에 그린 작품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의 결과물인 작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되 뇌이게 된다. 어디까지가 그림이며, 어디까지를 작품이라 해야 하는가. 완성은 무엇이며, 미완성은 무엇인가. 세한도는 1829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지내다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유배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위리안치-당했을 때, 그를 잊지 않고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찾아온 역관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으로 추사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 한다. 세 그루의 잣나무, 한 그루의 소나무와 들판에 외로운 집 한 채를 그린 이작품의 세한도라는 제목은 옆에 직접 써 놓은 발문인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라는 공자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간결하게 그려진 세한도는 회화의 절정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최고의 작품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김정희展_서촌과 金正喜, 김정희_누하동 72번지_2013

김정희와 오늘 ● 외가가 왕족인 명문 경주 김씨-나 또한 경주 김씨이다.-의 자손으로,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청나라의 대표적인 학자 옹방강(翁方綱) 등과 교류하며, 여러 분야의 학문에 눈을 뜨고 그것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며 독보적인 서체인 추사체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의 대학자 추사의 연구는 일본 학자인 후지쓰카 치카시(藤塚隣.1879-1948) 선생에 의해 이루어졌다. 선생은 추사를 청조학에 능통한 경학의 대가였다는 사실을 연구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1944년 아무런 대가없이 '세한도'를 한국에 기증하였다. 또한 선생의 아들까지도 2006년 선생이 평생을 바친 연구 자료와 유물_추사의 친필 여러 점이 포함된_을 과천문화원에 기증하였으며, '청조문화 동전의 연구'의 한글 완역본 '추사 김정희 연구' 발간을 위해 200만엔을 함께 기증하였다.

김정희展_서촌과 金正喜, 김정희_누하동 72번지_2013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유홍준 선생의 표현처럼 그의 깊은 세계를 짐작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당쟁으로 인한 오랜 유배생활이 자신의 학문세계와 인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한 인간으로서의 고충과 어려움에 연민을 느끼게도 하며, 천하의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홀대하였다는 것은 국가나 시대를 생각해 보더라도 매우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라 하겠다. 추사는 실학 사상가이기도 하다. 항상 법고창신(法古創新)을 강조하였다. 법고창신은 옛것을 바탕으로 하되 변화시켜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으로 이번 작품을 진행하며 더욱 그 정신이 가슴 깊이 남게 되었다. ● 추사의 작품을 나의 방식으로 모사하며 인간으로서의 분노와 사랑, 안타까운 현실의 어려움과 이를 학문과 예술로 승화시킨 추사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읽혀지길 바라는 것이 나의 어리석은 욕심일 것이라 느끼게 한다. 또한 자신이 생각하였던 것을 예술로 승화하며, 실제 생활에서도 항상 깨어 있는 자세로 이를 실천하며 실아 간 예술가이자 실천가인 추사를 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의 자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추사의 학문과 작품, 그리고 그의 삶이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어떤 울림으로 자리할지... ■ 김정희

Vol.20130523e | 김정희展 / KIMJEONGHEE / 金正喜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