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Friends)

박보나展 / PARKBONA / 朴寶娜 / installation   2013_0703 ▶︎ 2013_0724 / 월요일 휴관

박보나_피아노 퍼포먼스_00:02:33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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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퍼포먼스 / 2013_0703_수요일_06:00pm

주최 / 갤러리 조선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조선 GALLERYCHOSUN 서울 종로구 소격동 125번지 Tel. +82.2.723.7133~4 www.gallerychosun.com

Enough is Enough ● 2'33'' . 피아니스트는 갤러리에 앉아서, 간헐적으로 연주를 한다. 연주자는 사실, 꽤나 마음대로 연주를 한다: 연주를 거의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전시 기간 동안, 연주자는 그냥 거기에 앉아 있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바틀비 Bartleby'와 다소 비슷하게, 연주자는 '안하는 것을 선호한다. I would prefer not to.' 그리고, 연주자가 몸을 움직여 피아노를 잠깐 칠 때, - 마치 지루함에서 벗어나려는 듯 - 계속 반복되어 연주되는 듯하며, 무자크 Muzak가 되어 버린,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한다는 것에는, 무언가 가볍고, 심지어 습관적이며, 일상적인 면이 있다. ● 박보나는 미술과 삶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상당히 많이 하는데, 그것이 박보나 작업 전반의 주요한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이전의 공공 프로젝트 작업, 픽션 보다 낯선, 2011에서 작가는 서울의 거리에 퍼포먼스를 펼치는 시위자를 배치하고, 퍼포머는 시위자의 진심과 헌신이 드러나는 역할을 연기한다. 인터넷으로 시위자들을 찍은 사진 - 자신의 퍼포머를 포함한 - 을 모으면서, 작가는 다양한 추가적 경로를 통해 그 사진들을 유포한다. 실제 시위자로서의 퍼포머의 위치, 혹은 미술 작업으로서의 위치, 그리고, 구경거리로서의 시위자의 기록, 혹은 휴머니스트적인 다큐멘터리 이미지 사이에서 생기는 모호함은, 애매한 반응, 작업에서 보이는 행동에 대해 불편한 양면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미술은 매일의 삶 속에 존재하지만, 또한 점점 더 삶처럼 보인다; 삶은, 결과적으로, 미술처럼 보이게 되었다. 퍼포머가 그렇게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것이 지시 사항인지, 혹은 퍼포머가 연주를 거부하는 것인지, 퍼포먼스가 의도한대로 잘 되지 않는 건지, 혹은 일부로 편하게 치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픽션 보다 낯선에서 보이는 사람들이 작업인 것인지, 어려움과 시위의 진짜 분출인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형식의 미술도 일단 받아들인다면, 어떤 제스처가 진짜 상황인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만약 미술이 계속해서 매일의 삶을 모방한다면, 모든 제스처들이 결국에는 미술로 이해되거나, 심지어 오해될 위험성이 있지는 않을까? 삶을 닮은 미술은 실제의 삶을 가볍거나 우습게 만든다는 논쟁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박보나_무제 (사이) #1 & #2 Untitled (Between) #1 & #2_단채널 비디오_2013

엘리제를 위하여가 익숙한 곡이라는 건 확실하다. 이 곡이 연주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그것을 기억해낼 수 있을 만큼, 전시장에 오래 머무른다면, 마치 계속 반복 연주되는 것처럼, 이 곡을 여러 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연주자는 갑작스럽게 연주를 하기도 하고, 가끔 부분적인 음을 내기도 한다). 픽션보다 낯선이 미술적 제스처와 시위의 소진을 보여줬던 것처럼, 엘리자를 위하여는, 그것이 연주될 때, 박보나의 작업2'33'' 에서 닳아 없어진다. 우리는 그러한 반복이 '미술'을 '삶'으로 끌어내리면서, 모든 힘을 효과적으로 비워 낸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존 케이지가 '침묵'의 작품, 4'33"를 녹음했을 때, 심지어 엄청난 정적(무향실anechoic chamber), 미미한 소리조차 여전히 인지될 수 있었기 때문에 (퍼포머 데이비드 튜더 David Tudor는 계속 연주를 하고 있었다), 작업이 이루어졌다. 만약 엘리제를 위하여가 게으르게 반복되면서 비워진다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곡의 연주, 따분함의 퍼포먼스일 뿐이다: 우리는 건반 위에서 지루해 하는 손가락의 움직임, 피아니스트의 점점 더해지는 무료함, 퍼포먼스에 의해 변하는 음악의 감수성을 듣는다: 이것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그의 책, 열린 작품에서 묘사한 음악에 대한 모든 작업의 열림으로 연결될 수 있다. (에코Eco는 궁극적으로 이 해석의 공간을 음악적 과정의 근본으로 묘사하지만, 작곡가들이 연주자에게 도전 의식과 자극을 주기 위해, 어떻게 그들의 음악에서 구조적으로 열린 요소를 남기기 시작하는지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2'33'' 에서 박보나가 탐구하는 지점이다.) ● 검은 사각형도 비슷하게, 예술 작품의 열림을 탐구한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바닥에 놓여진 포스터 작업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이 작업에서( 5-10년 전에 매우 인기 있는 형식으로 쓰여서, 그 특별함이 비워진), 박보나는 표면적으로 인터넷에서 수집한 멸종 동물에 대한 다소 감정적인 묘사를 하면서, 포스터가 그 정치적인 기능으로 되돌아가도록 만든다. 관객들은 물론 포스터를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보통 웹 2.0의 긍정적인 - 회전 - 상호작용 안에서 체계화되는, 관객의 참여가 조장되지만, 관객은 온라인에서 가져온, 어둡고, 심지어 종말론적인 메세지를 마주하게 된다. 관객의 감정적인 참여는 아직 모호하다: 우리는 포스터의 텍스트가 무엇을 탐구하기를 원하는지 정말 상관하는가? 우리가 미술 작품에 기초해서 행동하는가? 작업을 집어드는 우리의 성실함은 심문을 받는 듯하며, 제스처로서, 잠재적인 가치를 가진 미술 작품으로서, 포스터를 집으로 가져가는 우리의 습관은, 곧 잃어버릴 과거라는 중심 메세지를 가진 작업에 대한 신체적인 참여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 이 지점에서 박보나의 작업 전반에서 드러나는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재구성된다. 포스터가 줄어들면, 멸종 동물에 관한 기록도 공간에서 사라진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제도 안에서 작업하는 동안 이루어진, The Missing, 2009이라는 제목의 프로젝트에서, 박보나는 유사한 비가시성을 탐구한다. 이탈리아 비엘라에 위치한 피스톨레토 파운데이션에서 레지던시에 참여하는 동안, 비자 문제 때문에 레지던시 기간 보다 짧게 머물게 되는 결과가 작업으로 보여진다. 박보나는 레지던시에 실종된 여성에 관한 비디오를 만들겠다는 작업 계획서를 냈지만, 비자 문제로 전시가 열릴 때까지 작업과 함께 남아있을 수 없게 된다. 작가는 전시가 끝날 때까지, 비엘라에서 사라지는 것은 오직 작가 자신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박보나는 레지던시가 끝날 무렵 비엘라에서 실종되었고, 마치 포스터가 지금은 멸종된 동물의 텅 빈 흔적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흔적만 남게 된다. 포스터가 다 없어지든, 그렇지 않든간에 (그럴 가능성도 있다), 관객은 한계와 결핍을 인지하고, 작업과 그 제스처의 소진에 익숙해진다.

박보나_검은 사각형 Black Square_7 포스터_2013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작업인 무제(사이)도 부재와 가시성의 또 다른 혼합을 보여준다: 마술과 환상. 여기서도 박보나는 '엔터테이너' 직업과 '이민자'라는 정치적 신분을 대조적으로 놓는다: 프랑스인 마술사가 프랑스어 엑센트가 묻어나는 한국어로 설명을 하면서, 도구 없이 마술을 펼친다. 여기서 보이는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속임수 과정을 드러내는 능숙한 손의 제스처만 남고, 마술이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는 부재한다. 퍼포머는 도구로부터 관객의 주위를 돌리는데, 그가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 관객을 휘어 잡는 마술사로서 - 속임수로부터 나오는 아이디어가 아니다. 사실, 그가 드러내고 있는 것은, 마술의 메커니즘 자체와, 이민자이자 노동자로서 그의 신분이다. 마술은 물론, 인간의 시각, 빠른 속도에서 도구 너머의 행위를 감지하거나 볼 수 없는 능력의 한계에 대한 확장된 놀이이다. 마술사가 관객이 봐서는 안 되거나, 볼 수 없는 것으로부터 항상 관객의 시선을 돌린다면, 박보나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주의의 전환이 계속되지만, 그것은 마술사와 마술이라는 노동의 전면façade을 드러내기 위해 도치된다: 완결된 속임수를 지닌 마술의 혼란스러움을 걷어 내면서, 연습과 리허설이 드러나고, 관객을 위해 재연된다. 마술사가 퍼포먼스에 집중하는 동안, 관객은 도구가 없는 상황에서 그의 '이민자'로서의 신분을 좀 더 필연적으로 깨닫게 된다(그의 프랑스어 엑센트에서). 이민자의 우선적인 과제가 동화될 것에 대한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리허설은 외국어로 보여주는 정제된 환상의 퍼포먼스를 할 때, 퍼포머가 일하고 있는 성실함의 생산을 드러내준다. 우리는 우리가 일상의 페르소나와 좀 더 공식적인 노동, 두 가지 모두의 수행을 어떻게 권장받는 지를 본다. ● 박보나가 비엘라에서 했던 The Missing 작업에서 명백히 드러났던 이주에 대한 관심은, 이 작업에서 완전한 형태로 정교해진다. 박보나의 언어, 대화, 그리고, 퍼포먼스의 통합은, 언어의 권력과 우리의 이해 범주 밖에 있는 언어에 대한 인식을 다룬 이전 작업, Warning in Urdu (do not feed the pigeons), 2008와 연결되면서, The Missing에서 확장된다. 이 경우, Warning in Urdu는 일부 유럽인과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공포와, 아랍어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는 호전성에 대해 장난을 친다. (사실 이 문구는 명백히, 대중들에게 광장에서 새모이를 주지 말라고 요구하는 영국의 경고문을 드러내지만, 현수막으로서 불안감을 주는 형태를 띠고 있다.) 박보나가 거의 단순히 투사하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이렇게 근거 없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가정은, 무제(사이)에서도 계속된다. 이 작업에서 퍼포머는 마술의 속임수가 매끄럽고 그럴 듯 하다면, 퍼포머는 그의 이국적인 특징과 더불어 관객을 즐겁게 해주겠지만, 성공적인 퍼포먼스 밖에서 퍼포머는 철저한 검토와 비평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박보나가 번역을 이용하는 것과 여러 언어를 보여주는 것은 타자의 지위에 대한 분명한 탐구이다. ● 박보나는 제스처들과, 그것의 소진과 한계에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킨다고 할 수 있다. 미술이 전형적으로, 요소들의 재구성을 통하여, 새로운 형태의 전체로서 새로운 방식의 보기를 제안하려고 하는 지점에서, 박보나의 단순한 제스처는 관객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가 3차원적 복제 시대의 아우라의 이동The Migration of the Aura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제스처의 역사와 그것의 변형. 여기에서 예술 작품은 물질적이고, 개념적으로 지속적인 변형 과정에 있는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 작가가 사용하고 있는 전유의 거대한 제스처를 주장하려고 시도하지 않으면서, 각 작업을 다른 작가의 작업에 공공연히 연계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위대한 성취의 순간으로 떠받드는 이 우상적 작업들은 필연적으로 끌어들여져서, 변형되고, 위대함으로 승천하는 지점에서 종종 텅 비워진다. 박보나는 제스처의 변형을 보여주면서, 주로 표면에 계속해서 신경을 쓰는 시대에, 우리의 가시성의 한계를 지적한다. ■ 던칸 울드리치

박보나_쉽게 끝나지 않는 순간 Indestructible Moment_단채널 비디오, 오프닝 퍼포먼트_2013

Enough is Enough ● In 2'33", a pianist sits in the gallery and plays intermittently. She plays, in fact, quite casually: she seems barely to be playing at all. For a lot of the exhibition, she seems to just sit there: a little like Herman Melville's 'Bartleby', she 'would prefer not to'. And when briefly she might spring in to life and play - as if just to cease being bored - there is something casual, even rote and routine, about the playing of Beethoven's Für Elise, which seems to be on loop, which has become muzak. ● Bona Park frequently explores the relationship between art and life, so much so that we might consider it a core theme in her work. In an earlier public project, Stranger than Fiction, 2011, she placed a performing protestor in the street in Seoul, acting out a role which that is associated with authenticity and dedication. Collecting documentation of protestors from the web - including those of her own performer amongst the many others, she then disseminated the pictures through a variety of additional channels. An ambiguity between the performer's place as a genuine protestor or as artwork and, between the works documentation as human spectacle or humanist documentary image, led to an indeterminate response, an uncomfortable ambivalence to the action: Art exists in everyday life, but art also increasingly looks like life; life, consequently, has begun to look like art. We cannot be sure in Stranger than Fiction as to whether the individuals are artworks or genuine outpourings of hardship and campaigning, just as we cannot be sure if the playing of Für Elise is instruction or refusal, the performance bad or intentionally careless. How are we to tell, once we accept art appearing in any form, whether a gesture is genuine or contrived? If art has continued to mimic the everyday, is there not a risk that every gesture eventually becomes construed, even misconstrued, as art? Is this productive? Might we argue that art's appearance as life has made light, or made comic, real life itself? ● We have become used to Für Elise, that is for sure. And if we linger long enough to hear it play, to recall it, we will probably hear it multiple times, as if on a loop (the performer plays in bursts and occasional flurries). Für Elise, when it is played, is exhausted in Park's 2'33", just as Stranger than Fiction shows the exhaustion of artistic gesture and of protest. We become aware that something with such repetition is effectively emptied of all its potency, elevated 'art' descending to 'life'. When John Cage recorded 4'33", his 'silent' composition, he did so because even with the greatest quiet (an anechoic chamber), slight sounds could still become still perceptible (the performer, David Tudor, was still performing). If Für Elise is emptied, repeated lethargically, all we can hear is its playing, a performance of banality: we hear the dull thumping on the keys, the sped up boredom of the pianist, music's susceptibility to be changed by its performance: this would lead Umberto Eco to describe in his book The Open Work, the openness of all works of music (Eco ultimately describes this space of interpretation as fundamental to the musical process, but is focused moreover on how composers began to structurally leave open elements of their work, to challenge and provoke the performer, something which Park exploits in 2'33''). ● Black Square similarly explores the openness of artwork. Directly recalling Felix Gonzalez-Torres floor-based poster works (something which, five to ten years ago, had become so popular as a form as to be emptied of its specificity), Park returns the poster to its political function, inscribing on its surface a rather emotive description, drawn from the web, of extinct animals. We are meant to remove the posters of course, but our participation, now usually codified in the positive-spin-interactivity of web 2.0, is encouraged but met with the dark even apocalyptic messages sourced from online. Our emotional engagement is up in the air: do we actually care about what the text implores us to do? Do we act based upon works of art? Our sincerity in picking up the work seems under interrogation, and it would appear that our inclination to take the poster home, as a gesture, as a work of art of potential value, runs in opposition to our physical engagement with the works core message, of a past that is soon lost. ● Visibility and invisibility are reconstituted here, as they are across Park's practice. As the posters are taken, so the record of the extinct animals also disappears from the space. What we cannot see we are unaware of. In a project which came to be called The Missing, 2009, Park explored a similar invisibility, constructed during the institutional time of the art work. As Park took up a residency at the Fondazione Pistoletto in Biella, Italy, she was limited by visa restrictions, to a stay just shorter than the duration of the residency and its resulting exhibition. Park had proposed to produce a film about a missing woman, only to find that, by the end of the exhibition, she herself would be gone, prohibited from staying long enough to appear with her work at the exhibition. Park herself was missing from Biella by the end of her residency, and all that remained was a trace, as the poster remains an empty trace of an animal, now extinct. Whether or not the paper posters run out (which they can), we become accustomed to and aware of limitation and scarcity, to the exhaustion of the work and its gesture. ● Another work in the exhibition Untitled (Between) displays another comingling of absence and visibility: magic and illusion. Here Park also sets out a contrast between the occupation 'entertainer' and the political status 'immigrant': a French magician performs magic tricks without the objects, describing them in his francophonic accent. What is visible here is what is usually invisible, and what is usually foregrounded is in turn out of sight: the objects that facilitate magic are absent, leaving the sleight of hand gestures to reveal the processes of the trick. The performer, who distracts the viewer from the object, here points not an idea outside of the trick - as magician in control of the audience - but in fact to the mechanics of magic itself, and to his own status as both immigrant and worker. Magic of course, is an extended play upon the limitations of human vision, our inability to see at speed, to perceive of actions behind an object. If the magician usually diverts our gaze away from that which we should not or cannot see, here a diversion continues, but is inverted to reveal the façade of the magician and the labour of magic: a practice and rehearsal is revealed and re-enacted for us, de-mystifying the product of the finalized trick. Whilst the performer is used to taking centre stage, we are necessarily more aware of the man's status as 'immigrant' (in his thick set accent) when the object is absent. If the immigrant's first task is to fulfill the expectation to become assimilated, rehearsal functions to reveal the production of sincerity at work in performing a refined illusion in a second language. We see how we are encouraged to perform both our everyday persona and our more formalized labour. ● Park's emphasis on migration was apparent in The Missing from Biella, but is elaborated here in its fullest form. Park's integration of language, dialogue and performance extends upon The Missing, whilst connecting to her previous Warning in Urdu (do not feed the pigeons), 2008, which addresses the authority of language, and the perception of languages that fall outside of our comprehension. In this case, Warning in Urdu plays off the fear and presumed militancy of Arabic script as perceived in some European and American populations (the script in fact reveals a distinctly British warning that asks the public not to feed the birds which congregate in public squares, though the script looks unnerving as a banner). These presumptions, which Park reveals to be little more than projections, are continued in Untitled (Between), where the performer will entertain us with his exoticism if the trick is slick and convincing, but be subject to scrutiny and condemnation outside of a successful performance. Park's use of translation, and the presentation of multiple languages is a clear exploration of the status of the other. ● We might say that Bona Park draws our attention to gestures and their exhaustion or limit. Where art typically attempts to propose new ways of looking through a reconfiguration of elements into a new gestalt whole, Park's simple gestures allow us to see the gestures as they are: their histories and the state of their transformation in what Bruno Latour calls The Migration of the Aura in an age of three-dimensional facsimiles. Here the work of Art is understood as something in constant transformation, both materially and conceptually. It is no coincidence that Park overtly links each work to the practice of another, singular artist, without attempting to claim a grand gesture for her own appropriation. These icons, held up as moments of great achievement, are necessarily co-opted, transformed and sometimes emptied in their ascension to greatness. Park demonstrates the transformation of the gesture, and points to the limit of our visibility in an epoch that continues to be concerned primarily with surface. ■ Duncan Woold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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