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만 낯선 것들

김미롱展 / KIMMIRONG / 金美㢅 / sculpture   2013_0703 ▶︎ 2013_0709

김미롱_I know the person_명함, 풍선빨대, 실, 철사_150×110×53cm_2012

초대일시 / 2013_0703_수요일_06:00pm

갤러리 각 공모 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6:30pm

갤러리 각 GALLERY GAC 서울 종로구 관훈동 23번지 원빌딩 4층 Tel. +82.2.737.9963,9965 www.gallerygac.com

미술은 경제를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가? ●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잘 안다고 생각한다. 가족 속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나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신용에 의해서 인정되는 지위이다. 이러한 믿음의 경제는 욕망과 이기심을 선의로서 전용하는 능력에 의해서 가정된다. 아담 스미스가 설파한 수요와 공급에 대한 신앙은 순수하지 않다. 경제학은 우리의 삶과 구분되는 영역에서 안락하게 논의될 수 있는 교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제신학'은 다르게 사유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김미롱의 작업은 그 답변의 루트를 모색한다. ● "나 그 사람 알아!" 우리는 이 말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명함과 풍선 빨대, 실 그리고 철사 등으로 이루어진 얼굴을 바라볼 때 알아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 혹은 그, 아니면 사람? 관계의 경제는 현대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명함으로 상징된다. 셀러브리티는 오히려 명함이 필요 없다. 그들 자신이 이미 토템이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는 명함이 필수적이다. 삶에 대한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 보증은 무겁거나 고정되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우리가 기리는 인물의 두상이나 전신상을 조각상으로 만나는 경우가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혹은 특정 기념관에서 조우하는 것들은 변하지 않고 영속적으로 그 특성을 드러낼 것만 같다. 이러한 염원은 미술의 경제를 이루는 강력한 토대로서 작동해왔다. 시각성과 짝을 이루는 조형성은 신과 인간, 남성과 여성의 관계처럼 확고 불변하는 규칙처럼 여겨져 왔다. 여기서 교환은 불가능하다. 신성모독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신학의 세속화는 내파(內波)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정과 미정 그리고 유동이 공존하는 입장들 속에서, 다시 말해서 교환의 과정에서만 존재하는 얼굴들이 탄생하는 자리가 정체성의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제에서 현대 조각(contemporary sculpture)은 가능할 수 있을까? 새로운 기능을 찾아낼 수 있을까?

김미롱_Monster_명함, 풍선빨대, 철사, 실_45×103×260cm_2012
김미롱_Herd_명함, 낚시 줄_50×140×75cm_2012
김미롱_Growing signboard I_간판사진, 폼보드_110×98×52cm_2012

무리지어 움직이는 속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반체제 인사도 명함은 필요한 것이다. 거기에는 조직과 문화 그리고 미학이 담겨 있다. 정치를 넘어 경제에도 심미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김미롱의 명함과 낚시줄로 이루어진 한 무리 혹은 무리들은 그(들) 자신의 사적이면서 공적인 위치를 장소 특정적(site specific)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예술가로서 작가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 명함들이 형성하는 형상에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는가? 그 사이, 틈들에서 혹은 그 '작품의 아우라' 밖에서 미루어 짐작되는 어디엔가 존재의 영역을 설정해야 하는가? 기존의 경제신학으로서 작동하던 미술의 경제가 내파를 겪으면서 이른바 미술가의 위상학 또한 색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현장에서 살고 있다. 살면서 조사하는 것은 문화인류학자의 일이다. 명함만큼 간판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몰두한다. 그리고 좀 더 공적이다. (그렇다고 아직 공공미술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김미롱은 자신의 거주지역인 안양의 간판들을 사진 찍고 현상 인화하여 폼 보드에 부착한 후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무엇인가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남'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마치 경제신학에서 경제성장에 대한 명상을 수행하는 제스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작가 자신은 간판들의 미학에 대한 자율성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했으나 끝내 그 신념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는 일종의 신앙고백을 하기도 했다.

김미롱_Diary_나무, 캔버스, 종이컵_84×104×10cm_2012
김미롱_Coffee picker_커피원두, 나무패널_97×130cm_2012

장소성보다 시간성에 대한 고찰은 우리를 더욱 현대성(contemporaneity)에로 이끈다. 달력과 일기는 역시 역사에 대한 최고의 메타포이다. 김미롱은 전시에서 보여주는 형태를 스무 살 시절에 처음 선보였다고 말했다. 21세기는 그 시간의 간극을 성장으로 여길 수 있을까? 일회용 종이컵들이 보여주는 형태들은 사적이지만 글로벌하게 공인된 시간 속에서 익명성을 유지하게 된다. 2012년 5월에 대한 형식(달력/일기)은 우리의 사유를 규정할 수 있는가? 시간의 지평에서 보이는 존재의 희미한 흔적이 일회용 종이컵으로 남겨진다. 지나왔으며 지속될 시간 속에서 일회성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선언 이전에도 존재했다. 명함이나 간판보다 내밀한 상징인 종이컵은 그래서 강력하지 않은 약한 사유의 흔적이다. 희미한 기억에 대한 보상으로서 작동하는 몸짓으로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수요와 공급이 강력하게 요청하는 시장처럼 기억과 망각의 변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신학과는 다른 연약하고 부드러운 기념이 가능하다면 그 곳은 달력으로 이루어지는 일기일 것이다. 사적이고 내적으로 심화된 경제에 대한 사유방식이다. ● 이와는 대조적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정치경제적인 스탠스를 취하기도 한다. 미학적으로는 전승된 방식을 따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더욱 강력한 개입을 하고 있는 사례이다. 이른바 공정 무역(fair trade)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다. 커피를 따는 아이의 형상을 바로 그 커피 열매로 담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가공하여 먹고 남은 찌꺼기로 도시의 풍경을 그려냈는데 소재의 선택이 매체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경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미롱의 정치경제적 사유는 미학적이다. 그리고 현지조사를 벌이는 문화인류학자의 태도를 닮고 있다. 수공예적 전승의 방식을 택하기보다는 다르게 사유하는 견고한 태도의 입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의 맥락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다. 또 그러한 전복적 사유를 가장 원초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적인 경제의 문맥에서 인류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참여관찰이라는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경제에 대한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를 수행하는 미술가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원적이고 다면적인 모색은 다양한 삶의 경제를 미술의 경제로 살려내려는 새로운 '살림살이'의 방식으로 채택될 수 있다. ■ 김병수

김미롱_Coffee city_캔버스, 사용된 커피가루, 스프레이 접착제_97×130cm_2012

과학기술과 더불어 끊임없이 발전과 개발을 추구하는 현대산업사회는 굴러가는 외바퀴(굴렁쇠)와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이 붙으며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되지만 멈출 수가 없다. 멈춤은 곧 쓰러짐.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나는 종이컵, 간판, 명함, 커피 등 일상적 오브제를 선택하고, 그 오브제 속에 담겨 진 이중적 의미를 파악하여 뒤집어 표현함으로써 현대산업사회의 속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명함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규격화되고 기계화되는 인간과 버려진 인간성을 표현하기도 하고, 커피와 간판을 통해 현대사회의 끊임없는 소비와 변화하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사회 속에서 안락함을 보장받고 사는 일원으로서 나 또한 그 이야기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따라서 비판적인 강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반성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 김미롱

Vol.20130703d | 김미롱展 / KIMMIRONG / 金美㢅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