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있다

이은미展 / LEEEUNMI / 李銀美 / painting   2013_1001 ▶︎ 2013_1030

이은미_놓아두다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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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3_1001 ▶︎ 2013_1010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cafe.daum.net/gallerydam

2013_1001 ▶︎ 2013_1030

더 코너 갤러리 THE CORNER GALLERY 서울 종로구 재동 5-2번지 우드앤브릭 레스토랑 코너 Tel. +82.2.747.1592 http://www.woodnbrick.com

있음을 응시하다1. 그저 있는 것들 "침묵이 있다", "고요가 있다"와 같이, 다만 "있다"라는 말로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이들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분명 그곳에 있다. "바람이 있다", "빛이 있다", "따스함이 있다"처럼 감각할 수 있는 것을 "있다"라는 말로 전할 때도 있다. 그러나 확실하게 드러나는 존재들이, "있다"라는 말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여기, "벽이 있다", "바닥이 있다", "모퉁이가 있다." 이들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있어 왔기에 새삼 "있다"라는 말이 절실해진다. ● 이은미의 여섯 번째 개인전 『그곳에 있다』는 이렇듯 "있다"라는 말을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곳에 있다"라는 말을 더듬어 볼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의문은 "그곳은 어디일까"이다. 그러나 이은미의 작품에서 그보다 먼저 해명되어야 할 것은 "그곳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이다. '그 무엇이 있는 곳'이 곧 '그곳'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여기」이다. ● 「여기」는 벽에 붙어 있는 어떤 계단의 일부분을 보여준다. 두 단 정도만 보이는 이 계단의 오른편에는 밝은 빛의 벽이 있는데, 이 벽의 색은 보는 이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더구나 이러한 색은 이 작가의 이전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기에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여기」의 벽을 들여다보노라면 마치 노란빛의 입자가 차곡차곡 포개져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듯한, 높은 밀도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왼쪽 위에서부터 빛이 비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맨 위의 계단이 가장 밝은 톤을 띠고 있고, 수평의 칸보다 수직의 칸이 더 어둡기 때문이다. 또한 왼쪽을 보고 있는 벽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톤을 유지하고 있는데, 뒤로 살짝 들어가 있는 모서리 부분은 상대적으로 더 어둡게 표현되었다. 따라서 「여기」는 말하고 있다. 여기에 계단이 있다, 벽이 있다, 빛이 있다, 그리고 여기는 빛이 머무는 벽과 계단이다.

이은미_여기_캔버스에 유채_38×46cm_2013

2.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날 때 ●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대수롭지 않게 존재하는 것들을 응시하고, 그것이 그 자리에 있음을 말하는 데 마음을 기울인다. 『그곳에 있다』의 작품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있을 법한 사물이나 공간이다. 2006년에 있었던 『숨이 깃든 사물』이라는 전시에서 이은미는 방안이나 책상 위와 같이 실내에 있는 사물들에 주목했었다. 그 후 5년 만에 열린 『풍경, 결』에서 작가는 밖으로 나가 벽과 문, 집과 나무들을 바라봤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다』에 와서는 실내냐 실외냐, 사물이냐 풍경이냐 등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들에 주목한다. 실내든 실외든, 사물이든 풍경이든 상관없이, 작가는 자신이 고민해 온 주제를 좀 더 심도 있게 파고들어가는 것에 집중한다. 화폭에 담기는 대상은 실내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실외에 있는 것일 수도 있으며 사물로 볼 수도 있고 풍경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제 이러한 구분은 이번 전시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 『그곳에 있다』의 작품들은 주로 벽과 계단과 바닥을 다루고 있다. 벽 혹은 담은 이전의 전시인 『풍경, 결』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던 소재이다. 『풍경, 결』에서 벽 혹은 담을 다룰 때 작가는 이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되 벽이나 담 그 자체에 집중하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우리는 벽을 덮고 있는 나무 그림자나 담에 나 있는 문을 더 주의해서 보거나 담 너머의 풍경을 상상하곤 했다. 이는 계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숨이 깃든 사물』에 나온 「도달하기 어려운」이라는 작품에서는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의 종아리와 발이 보인다. '도달하기 어려운'이라는 제목과 연결해 볼 때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계단이 아니라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사람이다. 『풍경, 결』의 「빛의 의존Ⅱ」에서도 계단이 나온다. 그러나 이 계단은 그림자에 의해 감추어져 있다.

이은미_오래된 결_캔버스에 유채_73×61cm_2013

이에 반해 『그곳에 있다』에서 벽과 계단은 그 자체로 중요해진다. 『그곳에 있다』에 나오는 벽과 계단과 바닥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한눈에 이 대상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벽이고 계단이며 바닥임을 인지하는 것으로는 이 그림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감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이 작가가 그러한 사물과 공간을 모사(模寫)하거나 재현(再現)하는 데 마음을 쏟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작가의 마음을 통과한 벽과 계단과 바닥은 흔히 우리가 보아 왔고 알아 왔던 형태와 색을 지니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그곳에 있다』의 벽과 계단과 바닥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이 벽을, 이 계단과 바닥을 오래도록 응시하라고만 말한다. ● 벽과 계단과 바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모서리를 품고 있는 공간, 혹은 모서리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예를 들어 바닥을 다룰 때에도 작가의 시선은 완전한 부감(俯瞰)이 아니다. 내려다보고는 있되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기에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구석이나 모퉁이가 바닥과 함께 눈에 들어온다. 벽을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인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오래된 결」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벽의 측면을 올려다보고 있는 작가의 시선을 감지할 수 있는데, 이는 세로로 길게 벽을 분할하고 있는 모퉁이와 모퉁이 위쪽의 모서리에 자연스레 눈이 가기 때문이다. 「오래된 결」의 벽은 벽돌로 쌓아올린 것이다. 벽돌은 사각형의 형태를 지니고 있기에 그 자체로 네 개의 모서리를 가진다. 즉, 이 작품은 '벽'이 아니라 '모서리들'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을 만큼 수많은 모서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 모서리는 면과 면의 경계를 이루는 부분이다. 그러나 모서리는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서리는 두 면이 만나는 부분으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모서리는 그 자체로 다층의 특성을 지니는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나면 어떤 면은 벽이 되고 어떤 면은 바닥이 되면서 삼차원적인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에서는 구석과 모퉁이가 존재하게 된다. 대개의 공간이 그러하듯이 구석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 공간을 오래 바라보거나 세심하게 살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 작가는 『그곳에 있다』를 통해, 그러한 것들이 여기에 있노라고 말한다.

이은미_벽_캔버스에 유채_194×130cm_2013

3.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는 것 ● 『그곳에 있다』에서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 공간은 대개 비어 있다. 그러나 이 작가는 여러 작품들을 통해 그곳이 비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비어 있되 비어 있지 않은 공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놓아두다」이다. 「놓아두다」를 볼 때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게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세워 놓은 캔버스이다. 이 캔버스는 두 가지의 경우로 해석될 수 있는데, 하나는 그림이 완성되고 난 후 하얀 천으로 캔버스를 덮어 두었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빈 캔버스를 세워두었다고 보는 것이다. 캔버스의 하얀 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치 바람결에 잔잔히 흔들리고 있는 수면을 보는 듯하다. 왼쪽 벽에 있는 수평의 두 선은 벽을 더 깊숙하게 들어가 보이게 하고, 벽을 감싸고 있는 색은 고요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공간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사색으로 이끈다. 저 안에는 어떤 그림이 있는 걸까, 혹은 저기에는 어떤 그림이 담기게 될까. 분명 놓아둔 것은 캔버스일 테지만, 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저것이 빈 캔버스라면 캔버스의 주인은 기다림, 설렘, 두려움 등을 놓아두었을 테고 완성된 그림이라면 작업이 진행되던 순간의 긴장, 고뇌, 인내 등을 놓아두었을 테다. 사실 어떤 식으로든 해석이 가능하며 무엇으로 읽혀도 어색하지 않다. 이렇듯 여러 겹 혹은 다양한 결의 의미를 지닌 작품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세상이나 삶에 대한 이해가 그리 간단하게 혹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것이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 「놓아두다」가 캔버스라는 소재를 통해 비어 있으나 비어 있지 않음을 표현했다면, 흔적과도 같은 엷은 얼룩으로 이를 나타내는 작품들이 있다. 「구석」, 「바닥」, 「흩어지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비어 있었다기보다는 어떠한 사물이 자리하다 사라지고 난 후 비어 있게 된 공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작가는 있던 것이 없어지고 난 후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상황, 비어 있으나 사라진 것의 보이지 않는 흔적이 남아 있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작가가 응시했던 것은 그곳에 있었던 것이 머물렀던 흔적이다.

이은미_두고 온 것_캔버스에 유채_41×53cm_2013

있던 것이 없어진 자리 혹은 그 흔적에 주목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닿을 수 없는 것을 캔버스 안으로 들여오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러한 작업에 몰두하는 것일까.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 혹은 미련이라면 그러한 흔적들을 더듬으며 그것이 있었던 때를 추억하거나 그러한 때를 복원하려는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 작가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그저 그 공간 자체이다. 사라진 것의 흔적 또한 그곳에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있다'라는 말로밖에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이 작가가 그 대상이 사물이든 공간이든 존재 그 자체 혹은 존재하고 있는 상태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것을 『숨이 깃든 사물』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좀 더 분명해지는 부분이 있다. 『숨이 깃든 사물』에서부터 『풍경, 결』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사물이나 세상의 일면만을 보게 되거나 표현하게 될까 염려했었고, 그 때문에 '의도한 모호함'을 추구해 왔다. 이는 이 작가가 꽤 오랜 시간 삶이나 세상의 진실에 가닿기 위해 고투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있다』에 와서 이 작가는 모호함을 포기하지 않되 그것을 강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숨이 깃든 사물』에서 작가는 자신의 의도나 생각이 담긴 구체적인 사물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였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모호한 형태의 어떤 더미, 주름이 있는 사물, 겹쳐져 있거나 포개져 있는 책과 같은 것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정말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방법을 택했다. 의미를 강조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고도 편안하게 그 의미를 내보이는 것, 그리고 상대가 그것에 공명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 그렇게 오래 바라볼 수 있도록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그려 보이고, 또 이전과는 다른 색을 구사한다. 이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어야 할 면이며 이 작가의 세계가 한 걸음 더 나아갔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작가가 한층 더 깊어졌음을 느끼게 된다.

이은미_비어있음_캔버스에 유채_53×65cm_2013

4. 담담함이 내려앉은 자리 ● 맨 얼굴의 캔버스를 마주할 때, 작가는 그곳을 채울 내용과 톤을 결정하느라 꽤 오랜 시간 캔버스를 응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톤과 그 다음에 올 색은 작가의 직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직관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이미 작가의 몸과 마음을 통과하며 다른 것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화폭에 담기는 색채와 형태는 자연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색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마음 깊은 곳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색에 대한 여러 생각, 느낌 등을 길어 올린 다음 그 색을 만든다. 즉, 작가란 색을 만드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이은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 이 작가는 오랜 시간을 들여 색을 만진다. 여기서 '만지다'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작가가 색의 물질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벽돌공이 벽돌을 쌓는 것처럼 이 작가는 견고하게 색에 색을 더한다. 이는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과 『숨이 깃든 사물』의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보다 명징하게 드러난다. 『숨이 깃든 사물』의 작품들에는 의도한 듯 붓질의 흔적이 남아 있다. 푸른 계열의 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 더 그러하겠지만, 얼핏 보면 이 사물들은 마치 물에 잠겨 있는 듯 투명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로의 형태로 얇게, 가늘게 남아 있는 붓 자국은 사물이 유영(遊泳)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사물의 운동성을 드러내면서 이들이 숨을 쉬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특히 『숨이 깃든 사물』을 대표하는 작품인 「푸른영혼」에서는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투명하고 맑은 느낌을 준다. 화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초록색 사물은 소파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 위에는 무언가 큰 덩어리가 푸른색의 천을 덮어쓰고 있는데, 형태로 보아 옆으로 누운 사람인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대상의 형태가 비교적 명징하게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소파의 윤곽은 흐리게 처리되어, 소파의 색과 배경이 되는 색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이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가로 모양의 붓 자국은 숨의 드나듦과 같이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드러낸다. ● 『풍경, 결』을 채우고 있는 것도 "일렁임"이란 말로 집약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집」인데, 이 그림은 흔들리거나 부유(浮游)하는 색들로 가득하다. 『숨이 깃든 사물』에서는 가늘고 얇은 느낌으로 나타났던 붓질의 흔적이 『풍경, 결』에 와서는 보다 부드러운 형태로 드러나거나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와 같은 붓질은 고정된 형태나 윤곽을 부드럽게 지워가면서 풍경의 결을 채우고 있는 질감이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 그러나 『그곳에 있다』에 이르면 내려앉지 못하고 흩어지거나 부유하던 색은 확연히 줄어든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색은 가로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부유하면서 그 층에 공간을 만들었다. 이에 반해 이번 전시에서의 색은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만약 엷은 빛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다면, 그렇게 견고하게 쌓인 빛은 어떤 느낌일까. 빛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흐려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에 있다』에 나타나는 색도 그러하다. 캔버스 위에 색은 겹쳐진다. 색과 색 사이에는 시간이 지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간 흔적 위에 다시 색이 겹쳐진다. 셀 수 없이 많은 색으로 겹쳐져 있는 만큼 그 사이사이의 결에는 시간이 스며들어 두터운 질감을 구축한다. 이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은 「벽」과 「비어있음」이다. 「벽」의 벽이나 「비어있음」의 구멍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하면서도 차분한, 어떤 심연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밀도가 강화되면서 물질적 견고함을 획득한 색이 더 깊은 공간을 만들었고, 그곳에는 담담함이란 감정이 내려앉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은미_열매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13

5. 단단하고 깊은 ● 이제 이 작가는 비어 있는 공간에 머물렀던 눈길을 거두어 들이고 아마 뭔가를 품고 있는 것으로 관심을 돌리게 될 것이다. 「열매」라는 작품이 이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운데에는 타원형의 구(球)가 있다. 이제까지 이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드물게 발견되는 형태는 '구'이다. 아마도 타원형의 구는 열매일 텐데, 이것이 무슨 열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열매의 윤곽을 드러내는 선이 다른 작품의 윤곽을 처리하는 방식과 조금 다르다는 점이다. 이는 『숨이 깃든 사물』과 『풍경, 결』에서 작가가 윤곽을 처리해 왔던 것과 비교해 보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열매」의 윤곽은 다른 것에 비해 선명한 편인데, 이는 이 열매가 딱딱한 물건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표면이 얇거나 무른 것은 많은 것을 품지 못한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표면이 찢어지거나 터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작지만 단단한 열매는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열매는 계절을 보내며 여물고 그러는 사이 그 안에는 새로운 씨앗이 자리한다. 그 씨앗은 싹을 틔우고 세상에 나와 나무가 되고 꽃이 되고 또 다른 열매를 품는다. 그러므로 열매는 시간을 품고 있다. 「열매」에 나타난 열매의 윤곽이나 색을 고려할 때 이 또한 단단한 열매일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작고 단단한 열매가 품고 있을 크고 깊은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열매가 이렇게 큰 캔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숨이 깃든 사물』에서부터 『그곳에 있다』에 이르기까지 이 작가는 마치 벽돌로 쌓은 담처럼 반복과 변주를 계속해 왔다. 자신이 탐구해 왔던 주제를 반복하며, 또 그 위에 변화를 더하며 이 작가는 한 걸음씩 더 깊게 들어가고 있다. 반복과 변화를 거듭하며 다른 지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더디게 시간을 통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작가는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할 것이다. 그것은 작은 열매가 품고 있는 것에 대한 탐구로 시작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어떠한 세계로 이어질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로 이어지는 길이든, 아마도 이 작가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천천히, 아주 오래 걸을 것이다. ■ 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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