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문옥자의 초상

문옥자展 / MOONOKJA / 文玉子 / sculpture   2013_1004 ▶︎ 2013_1110 / 월요일 휴관

문옥자_젊은 오빠의 초상-Hunter(Portrait of Oppa in His Day-Hunter)_점토_32×30×20cm_2011

초대일시 / 2013_1008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 GWANGJU MUSEUM OF ART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동 311-1번지 Tel. +82.62.613.7141 www.artmuse.gwangju.go.kr

2013년 광주시립미술관 중진작가 초대전의 주인공으로 호남대학교 문옥자 교수가 선정되어 전시를 준비하면서 먼저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는 작가의 입장에서,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교육자로서 또한 조각가로서 「무엇을 보여주고 기록하고 싶을까?」 하는 점이었고, 둘째는 큐레이터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조각가 문옥자를 쉽게 소개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 두 생각을 동시에 아우르는 것이 전시기획의 기본이지만, 이번 전시가 큐레이터가 기획하는 주제전이 아니라, 미술관의 정례적인 중진작가 초대전이고 또 개인전이어서 당사자인 문옥자 교수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다양한 종류의 작품들, 즉 좌대위에 놓인 인물의 형상을 담은 작품들, 공공건물의 대형 조형물 사진들, 작가의 철학적인 생각이 많이 담긴 설치작품들, 작가 또는 작품을 소개하는 영상과 사진들은 이번 여름 내내 문옥자 교수가 쉬지 않고 땀 흘리며 작업한 작품들이다. ● 전시가 열리는 상록전시관은 6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2층 180평의 공간으로 일반적인 개인전을 열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미리 방으로 구획되어지므로 방마다의 특색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며, 사실 이 공간을 단순히 채우는 것만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이번 전시는 문옥자 교수가 조각가로서 살아온 과거를 보여주는 회고전적 성격이 제일 우선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문옥자 교수는 이를 위해 몇 가지 작품들을 준비하였다. 출품작품의 종류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인 조각 작품들, 공공기관의 조형물 사진들, 설치작품들 등이다. ● 제일 먼저, 조각 작품들의 재질은 대리석, 화강암, 브론즈, 테라코타, 나무, 지점토 등으로 다양했는데. 작품의 내용은 두 가지로 분류되어질 수 있다. 문옥자 교수 조각작품의 첫 번째 목록에 들어갈 작품들은 평화, 화합, 결실, 그리움, 휴게실, 추억, 기다림, 설레임, 생각, 만남, 이브, 결실, 언약, 염원, 해질 무렵, 도약, 이브의 방, 회상, 휴일, 가족, 모자(母子). 이런 제목들이 상징하듯 작품의 형식과 주제가 교과서적이고 따뜻한 느낌의 작품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브론즈나 대리석, 테라코타 등을 이용한 세련된 작품들로 규정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이다. ● 문옥자 교수의 또 다른 조각 작품들은 이른바 「점례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2000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앞서의 교과서적이고 제도적인 형식과 내용에서 벗어나 문옥자 교수만의 주제와 이미지를 내세운 작품들이다. ‘점례’라는 이름은 모두가 짐작할 수 있듯이 시골 고향에서 도시로 올라와 현대사회를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친구, 누나, 언니의 상징이다. 문옥자 교수는 순박했던 시골 처녀 점례의 성적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모호한 메시지를 던진다. 순박했던 시골처녀가 망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 환경을 탓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녀 스스로 성인이 되어 성적 환상을 즐기는 것인가? 문옥자 교수 스스로는 이에 대해 「순수했던 시골 처녀의 변모된 모습을 통해 순수에 대한 인간 내면의 원초적 향수를 일깨우고 싶다」고 했는데, 그것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일단 작품이 만들어지면 그것은 보는 사람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인데, 점례의 초상 시리즈는 사실 작품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다르다고 하는 것이 정답일 것 같다. 어떤 점례에게서는 고향의 순수를, 또 어떤 점례에게서는 에로티시즘을, 또 어떤 점례에게서는 현대사회에 대한 풍자를 느낄 수 있다. 이 시리즈와 관련한 작품으로는 「젊은 오빠의 초상」 시리즈가 있는데, 이 시리즈 또한 고귀해야 할 성(性)의 타락에 대한 비판과 풍자이다. 이 역시 점례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수많은 점례들을 탐하는 장년 남성에 대한 비판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남성의 성기에 중심을 맞춘 「젊은 오빠의 초상-헌터」라는 작품은 모호한 해석의 여지라곤 없다. 배설의 욕망에 사로잡혀 여성을 사냥하는 남성에 대한 직설적 비판이다.

문옥자_점례의 초상-당신의 안락의자(Portrait of Jeomrye-Your Armchair)_브론즈_46×58×22cm_2007

두 번째로 문옥자 교수의 대표적인 작품을 꼽을 때 공공기관에 설치된 조형물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조각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대형 조형물이 아닌가. 기존 문옥자 교수의 작품이 주로 가족이나 여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대형 조형물은 작품이 설치되는 공공기관의 성격에 맞는 상상력과 표현력을 가지고 제작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로 공모를 통해 당선이 되어야 제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가가 제작을 맡게 된다. 조각가로서는 대단히 명예스러운 일이다. 광주와 전남 지역의 공공기관에 설치된 문옥자 교수의 작품들은 사진과 영상으로 이번 전시에 소개된다. ● 세 번째로 이번 전시의 조연에 해당하는 작품은 문옥자 교수의 심경을 고백한 설치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젊은 오빠의 초상」 같은 작품을 통한 설치작품을 제작했던 문옥자 교수는 이번 전시를 위해 위의 일반적인 조각작품 이외에 문옥자 교수의 가족사진을 이용한 설치작품을 제작하였다. 문옥자 교수 부모님이 살던 옛 한옥의 문짝을 이용해 격자틀 사이사이마다 문옥자 교수 가족의 사진이 채워져 있다. 툇마루 위에 놓여진 이 문짝은 사실은 관람객을 위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작가 자신을 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문옥자 교수의 글에서 보듯, 가족은 문옥자 교수가 살아가는 근원적 힘이었다. 이제 정년퇴임을 앞두고 본인을 위한 작품 한 점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관람객은 조각가 문옥자의 내면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문옥자 교수는 「삶-부활을 꿈꾸며」라는 나무와 기타 재료로 만들어진 설치작품을 새로 제작하였는데, 이 역시 작가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개인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 주지하다시피 문옥자 교수는 30여년 가까운 세월을 광주에 있는 호남대학교 예술대학에서 교육자로 재직하여왔다. 그 이전엔 전남 벽지의 시골학교에서 창작을 향한 열망을 키워왔다. 진정한 조각가가 되기 위한 열망과 기다림의 시간들이었다. 수많은 시간들, 그러나 찰나와 같이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지나, 이제 국화꽃이 피는 지금 서정주 시인의 시속에 나오는 누님처럼 문옥자 교수는 본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2의 작가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이제 점례도, 젊은 오빠도 없는 새로운 시간 속으로 자유로운 젊은 조각가의 삶이 시작되고 있다. ■ 변길현

문옥자_삶-부활을 꿈꾸며(Life-Dream of Rebirth)_나무, 오브제_254×203×85cm_2013

내 삶의 여정과 작품 ● 유년시절 내 기억의 시작은 마당 장독대옆 채송화와 봉숭아, 펌프식우물, 아담한 한옥 기둥 사이사이에 미장된 흰 회벽이다. 이른 아침 가게로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다섯 살이 된 나를 돌봐 주셨던 숙모의 눈을 피해 연필 크래용 등 도구를 찾아내서 하얀 회벽에 낙서 같은 뭔가를 마구 그리는 게 가장 흥미로운 나의 놀이이자 일과였다. 일터에서 돌아오신 부모님께 심할 땐 회초리까지 동원돼 야단맞는 게 내 일과의 끝이 되었는데 결국 어느날 아버진 내 몫의 크래용과 도화지를 한 묶음 사오셨고 점차 마당안의 모든 것들은 내 그리기의 대상이 되었다. 유치원 학예회 장래희망 노래자랑에선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될테야 될테야 화가가 될테야"라고 소리 내 불렀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신 부모님께서는 일찍부터 여러 사업에 부지런히 종사하셨다. 덕분에 생활에 부족함은 없었고 오빠와 남동생 사이의 외딸인 나는 아들을 중시하신 부모님의 관심을 비껴갈 수 있어서 초 중등학교를 거쳐 미대에 입학할 때까지 뭐든 내 의지대로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시절 결석하고 집근처의 극장에 어른을 따라 딸인 양 몰래 들어가 영화를 보던 재미가 나쁜 습관이 되어 공부보다는 영화, 만화, 소설을 좋아하고 동네친구들이랑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지만 그림 그리는 취미만은 여전했다. ● 여고시절 천경자작품에 매료돼 잠시 동양화가를 꿈꾸던 때, 국전에서 큰상을 받아 지역신문에 실린 희재 문장호선생을 보게 되었고 무작정 찾아가 초면에 당돌하게도 제자가 되고 싶다며 결국 육개월 넘게 사군자를 배우기도 했었다. 평소에도 인물스케치나 만화 등 나름의 그리기는 지속됐고 수업 중 몰래 그리기 외에 분필에 깎거나 껌을 재료로 선생님이나 주변 친구얼굴을 만들어 쉬는 시간에 보여주면 깔깔대며 즐거워해 만들기에도 재미를 붙였다. 학교수업 시간엔 주로 한눈을 팔아 당연히 성적은 좋지 않았고, 워낙에 오랫동안 제멋대로 그려와선지 미대 입학을 위한 입시생들의 의례적 배움터인 화실도 적응이 안 돼 포기했다. 그냥 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석고상인 쥬리앙과 정물들을 내방식대로 몇번 그려본 게 전부여서 규격화된 화실그림의 세련된 솜씨엔 못 미쳤다. 1969년 다행히 문제로 쥬리앙이 출제돼 집가까운 지방대학교 사대 미술교육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문옥자_참회(Confession)_테라코타_45×30×20cm_1992

대학 입학 후에도 화가의 꿈은 늘 무의식속에 잠재해 있었다. 학과의 전공은 형식상 동.서양화와 디자인 조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당시 조소 담당교수는 홍대출신으로 인체소조를 제작하셨던 조용한 성품의 조재현교수 이셨다. 조소실은 실외 조각실습장 시설은 아예 없었고 실내 소조실만 그것도 4층에 위치해 있었다. 1973년 갑자기 대학을 퇴임하신 조재현교수 후임으로 전임이된 양두환선배는 국전에 큰상들을 수상했으나 다음해에 아깝게 사고로 타계하고 말았는데 당시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주로 학교 밖 개인작업장에서 목조에 열중해 신입생인 나로선 고작 한두 번 마주쳤고 그외 선배도 한두 명에 불과해 자주 볼 수 없었다. 변변한 공구하나 없이 소조만 할 수 있는 작은 실기실은 수업외 시간엔 거의 비어있어 휑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인지 운명인지 왠지 모를 친근감의 점토와 소조는 마치 절대 적성을 찾은 듯 나를 열중하게 했다. 졸업 할 즈음 계속 꿈꿔왔던 화가의 꿈은 까맣게 잊은 채 나는 점점 예비조각가가 돼가고 있었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부모님의 사업은 큰 어려움에 봉착하여 기울기 시작했고 하필 그 시점에 직장을 그만두게 된 남편과 결혼, 변두리 작은 단칸방에 비키니 옷장과 소형라디오가 유일했던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결혼 한달 후 벽지에 위치한 중등학교 미술교사 발령, 임신과 출산 등 1973년의 초봄부터 겨울까지 결코 만만치 않은 내삶의 여러 가지 변화가 한꺼번에 행해졌다. 자유롭고 별반 부족함 없이 마냥 꿈꾸며 살았던 내게 현실은 너무 버거웠다. 소조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재료, 전기시설 마저 없는 벽지시골학교 생활에서의 작품제작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그나마 방학 중에 광주 친정집에 머물며 어렵게 소품 한 점을 완성해 초대전에 출품한 게 활동의 전부였었다.

문옥자_초야 Ⅱ(The First Night Ⅱ)_합성수지_50×16×14cm_1987

1978년 교직생활 5년만에 광주에서 한시간반 정도 출퇴근이 가능한 시골학교에 전입되어 다시 광주에서의 단칸셋방 생활이 시작되자 먼저 한 평이 못되는 담벼락 옆 공간을 확보했다. 휴일과 틈새를 이용, 심봉과 회전롤러가 없는 상태여서 기다림을 주제로 한 120㎝크기의 작은 여인 입상을 석고로 완성해 그해 국전에 첫 출품하였고 결과는 입선으로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으로는 꽤 희망적이었다. 다음해 국전에는 출 퇴근과 살림살이 육아 등 여러모로 더욱 어려워진 상황이었으나 좀 더 노력을 기울여 등신대크기의 모자상을 제작 출품했으나 낙선되었다. 뭐든 아니다 판단될 때 포기가 빠른 성격인데다 대학재학중 순조롭게 지방공모전 성과로 졸업하던 해 지역공모전 추천작가가 된 후 조각가로서 처음 맛보는 좌절은 출품작품을 반출해 서울역에서 깨어 버리고 하광해 더 이상의 국전출품을 포기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 무엇보다 내게는 작업할 수 있는 공간과 내집 마련을 위한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했다. 때문에 교직은 내게 유일한수입원 이어서 도시근교로의 전입을 기다렸고 대학에 몸담고자하는 기회도 기다려 중등교직생활 12년만에 운좋게 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더불어 조각가로서의 작업도 겸할 수 있게 되고 은행융자를 얻어 변두리에 작은 내 집까지 마련 셋방살이도 면하게 됐다. 뭐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나름 열심히 살았기에 삶에 필수적 기반을 갖춰졌으나 여전히 삶은 팍팍했고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늘 가슴속에 있었다. ● 대부분의 어른들처럼 나 역시 일찍이 사랑과 행복은 영원성이 없다는 걸 깨우쳤으나 현실을 부정하며 힘든 삶에 희망을 실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체면을 걸듯 언젠가는 닥아올 이상적인 사랑과 영원한 행복을 위해 늘 노력하고 기다렸으며 모든 바램들도 함께 꿈꿨다. 이같은 바램은 나의 작품에 끊임없는 인내와 기다림의 형상으로 드러났다. 어쩜 그것은 의도적 표현이라기보다 나의 내면에 잠재된 관념적 여체형상과 더불어 삶의 이런저런 바램이 무의식적으로 융합돼 기다림이란 모티브로 귀결돼 오랫동안 작품으로 표출 되어졌다.

문옥자_언약(Promise)_브론즈_400×400×120cm_1993

대학에 몸담은지 3년째인 1988년 광주에서의 첫 개인전은 여체의 일상적 형상미와 내면의 바램처럼 주로 기다림을 주제로한 나름의 형식을 추구해 보려는 작품들로 발표 되어졌다. 1990년 서울전과 이후의 개인전 작품들은 자연과 여체의 동화된 이미지와 순수한사랑, 가족, 기다림 등을 주제로 한 이미지들로 형상화돼 전시되었다. ● 여행 중 봐 왔던 세계의 기념비적 조형물들은 내게 많은 느낌과 감동을 주었다. 주먹크기의 작은 작품도 보는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조각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 주어진 주제에 예산 걱정없이 규모있는 기념비적 모뉴먼트를 소신껏 창작해 남기고 싶은 강한 욕구는 내게 또 하나의 커다란 바램이 되었다. 어느날 모 건축가의 당선 프로젝트였던 광주학생독립기념관의 대형상징탑 계획에 부수적으로 계획된 인물군상과 부조작품들의 구상을 의뢰받은 나로서는 늘상 꿈꾸던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3미터 이상의 인물 43인군상을 구상 계획했고 길이 9미터규모의 좌우부조 2면도 함께 구상한 대형 프로젝트 였다. 1992년 당선된 프로젝트인데도 발주처인 광주시청의 예산문제로 10년의 긴 기다림 끝에 2002년 제작설치의 기회가 왔으나 25억의 예산이 깎이고 깎여 10억으로 줄어져 건설하청업체에 전자입찰 되었다. 사실 큰규모 작품의 최소한의 기본적 제작비만 남은 상황이었다. 되도록 원작자에게 의뢰토록 한 광주시청의 요구를 무시한 채 자회사에 득을 좀 더 남겨보겠다는 업체의 줄다리기에 의해 결국 예산을 8억으로 낮춰 제작해 내겠다는 후배조각가에게 낙찰되었다. 오랜 꿈이었던 직접적인 나의 제작기회는 하루아침에 거품이 되어 멀어졌다. 대부분 인물군상들의 등 부위를 작품중심에 있는 바위에 붙여 예산을 줄이는 방법으로 나의 구상안은 아쉬운 대로 후배작가에 의해 제작 재현되어 설치되었다. ● 그 외 상무지구에 5·18조형물 공모에도 다른 작가들과의 컨소시엄으로 연2회에 걸쳐 응모했으나 두번 탈락된 후 큰 규모 프로젝트는 포기하게 되었다. 허나 작은 규모의 공개공모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도전해 일부 당선되 설치됐고 건물 앞의 조형물들도 의뢰받아 설치했다. 이와 같은 작품들의 제작은 그간 주로 여체를 대상으로 한 작품에 몰두해있던 나를 다른 관점의 조형작업에도 몰두하게 만들었다. ● 1993년 나에겐 뜻밖의 큰슬픔과 정신적 위기가 닥쳤다. 내가 유독 좋아해 가슴에 묻은 40대중반을 막넘어선 친정오라버니의 갑작스런 암발병, 투병과 수술, 사망. 그전에 먼저 뇌출혈로 쓰러지신 친정어머니의 9년간의 긴투병과 부모님의 생활부양, 이 모두에 필요했던 적지 않은 비용부담에 대한 절박함과 남편의 여의치 않는 사업 등은 나로 하여금 조형물프로젝트를 따내기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했고 사실상 그로 인한 수입은 치료나 부양 생계유지에 큰 몫을 담당할 수 있었다. ● 1994년 4회 개인전은 피붙이인 오라버니 사망의 슬픔을 떨쳐내기위한 돌파구의 일환으로 갖게되었다. 이후에 다음개인전을 개최하지 못했으나 생각과 관점의 변화로 작품에 대한 새로운 모색과 시도가 계속 되었다.

문옥자_점례의 초상-애완녀(Portrait of Jeomrye-Pet Girl)_점토_39×31×18cm_2013

2000년이후 나의 작품들은 성적 욕구와 관련된 설치적 작품인 「젊은 오빠의 초상」을 제작하기도 하며 「이브」등 세태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워낙에 익숙한 것에 안정감을 느끼고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선인 성격인 나는 나날이 급속도로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반해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아날로그적인 것들에 대해 왠지 아름다운 감성들의 사라짐 같은 안타까운 느낌이 있었다. 더불어 우리사회 가치기준의 빠른 변화에 대한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외적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이 인간평가의 우선적 척도가 되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형화돼가고 있는 현실과 돈으로 인간이 인간을 애완견처럼 소유하려 하거나, 돈이라면 스스로 애완견을 자처하는 상황들이보편화 되가는 모습들이다. 이 같은 현실은 우리들의 영혼마저 기형을 초래할 것 같은 기분에 나를 수시로 빠트렸다. 때문에 그것들은 내 가치관의 기반이었던 과거 순수시대의 향수와 그리움, 가능하다면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본능적 바램과 교감되어 「점례의 초상」시리즈를 시작으로 나의 작품들은 영혼의 원초적 향수를 일깨우려는 의도를 품기시작했다. 오로지 아름다운 외모의 실현을 위한 일관된 집착을 성적으로 상징적인 부분만을 모아 강조하고 목과 눈을 생략하여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듯 한 무의식적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서 그것들은 영혼없는 육신만으론 결코 진정한 아름다움을 완성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 사실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는 나의 열망은 삶의 여정에 따라 내 의지와 달리 평생을 교직에 몸담게 되고 말아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작가와 교육자 어느 쪽에도 충분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나름 능력의 한계 내에서 교육자로서 노력했고 조각가로서 쉴 틈 없이 노력했음에 후회는 없다. 내게 있어 정년퇴임은 신진작가로서의 새로운 시작이며 그간의 무거운 짐들을 모두 내려놓고 온갖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과 자유로운 작품으로 소박한 바램을 계속 꿈꾸고 싶다. 숨 막히게 뜨겁던 여름의 끝자락, 빈 물병 가득 쌓인 작업장에서 ■ 문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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