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율의 세계 the essential of paintings on natural order

강하진展 / KANGHAJIN / 康夏鎭 / painting   2013_1008 ▶︎ 2013_1029 / 월요일 휴관

강하진_자연율10 natural rhythm1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97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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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008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유네스코 에이포트 Unesco A.port 인천시 중구 신포동 51-1번지 Tel. +82.32.762.2406 unescoaport.blog.me

자연율로 나타난 회화의 본질 ● 강하진의 작업은 자연율의 세계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자연율에서의 율은 동양미학의 전통적인 덕목 중 하나인 기운생동 가운데 특히 운과 관계가 깊다. 서양에서의 리듬에 해당하는 이 말은 사물들이 저마다 내재하고 있는 울림이거나 떨림을 의미하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생명력이다. 그러니까 율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고유한 속성인 셈이다. ● 설치와 평면을 통한 지금까지의 작가의 화력(畵歷)을 일별해보면 이러한 자연이 내재하고 있는 울림(내적 울림) 현상을, 그 고유한 생명력을 붙잡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과 교감하는 과정으로써, 자연과 동화되는 현상으로써 나타난다. 작가의 작업은 대략 개념적 성향의 설치작업, 자연생태환경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설치작업, 지지대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설치작업, 행위를 강조한 평면작업, 낙서회화와 신형상미술 경향성의 평면작업, 그리고 자연율을 주제로 한 평면작업 등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편의적인 것일 뿐, 실상 그 이면에서는 그들 작업이 서로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들 작업은 자연율의 주제의식이 실현되고 드러나는 다양한 계기들 즉 자연율의 다면성을 실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강하진_자연율12 natural rhythm1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5×140cm_2012

개념적 성향의 설치작업. 강하진은 1970년대 초 개념적인 성향의 설치작업으로서 자신의 화력을 시작한다. 큰 철사뭉치와 작은 철사뭉치를 나란히 배열해놓은 설치작업(1972)과, 한지의 가장자리 부분을 찢어 가운데에다 모아놓은 설치작업(1976)에서는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이 느껴진다. 이 일련의 설치작업들은 또한 원본과 사본, 모본과 부본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까지 확대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그리고 그 표면에다 축 사망, 이라 쓴 거울을 벽에 걸어놓고는, 그 거울을 들여다보는 이에게 자신의 영정을 대면케 하는 상황을 연출한 설치작업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반성적인 계기를 유도하기도 한다. 여기서 작가의 삶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 읽힌다. ● 자연생태환경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설치작업. 자연생태환경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1974년 작품으로 소급된다. 당시 녹음기로 채록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전시장에서 들려준 작업에서는 그 이면에 문명에 대한 비판과 자연회귀사상에 대한 공감, 그리고 일군의 아방가르드 작가들(특히 존 케이지)에 의해 시도된 자연음, 일상음, 우연음에 대한 공감이 읽힌다. ● 그런가 하면 그 당시에 제작된 솔잎을 소재로 한 설치작업은 근작(2000년대)에서의 일련의 쇠똥구리 설치작업으로 연이어진다. 신문지를 구겨 동그랗게 형태를 만든 다음, 그 표면을 부엽토(낙엽이 썩어 흙이 된)와 접착제를 섞어서 뭉친 것이 쇠똥구리 작업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크고 작은 원형의 형상들을 그대로 설치하기도 하고, 근작에서는 그 깨어진 파편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때 그 속의 신문지 뭉치가 부분적으로 드러나 보이기도 하는데, 작가는 이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이는 그러니까 쇠똥구리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보이도록 유도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실제의 쇠똥구리와 작가의 작품이 갖는 관계와 관련해 볼 때 작가의 작품은 능동적인 의미작용의 결과로서보다는 수동적인 의미작용의 소산처럼 보인다. 그 목적이 눈속임이나 일루전 그리고 환각적인 환경의 제안에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이 갖는 열린 의미구조는 쇠똥구리로 하여금 사과로의 변의 혹은 전의마저도 가능케 한다. 그러니까 쇠똥구리가 마치 사과처럼 나무 상자로 만든 궤짝에 넣어져서 제시되기도 하는 것이다. ● 이외에 이 경향에 속하는 작업으로는 기와를 소재로 해서 일종의 물받이 홈을 재구성한 설치작업, 장작을 쌓아 만든 설치작업, 그리고 철판 설치작업 등이 있다. 특히 장작개비가 쓰러지지 않게끔 서로 엇물려 쌓고는, 그 구조물 가운데로 홈이 지나가게 한 장작 설치작업은 촌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집 한쪽에 쌓아놓은 장작더미를 떠올리게 한다. 소재 자체가 자연물이기도 한 이 일련의 작업들은 반쯤은 자연이 만든 구조물처럼 보이며, 이로부터 가급적 인공의 손길을 최소화함으로써 오히려 자연의 본성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읽혀진다.

강하진_자연율11 natural rhythm1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3×106cm_2011

지지대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설치작업. 1980년대 초 강하진의 관심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바탕재로서의 캔버스가 아닌, 캔버스 자체가 갖고 있는 물질적이고 구조적인 조건에 집중된다. 예컨대 나무틀에서 벗겨낸 캔버스 천을 벽에 걸어 아래로 늘어트리는가 하면, 캔버스 천을 벽면으로부터 바닥 위로 길게 드리우기도 한다. 특히 캔버스 천과 함께 이를 나무틀에 고정시킬 때 생긴 가장자리의 각진 자국을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캔버스의 구조, 골격, 지지체(바탕재가 아닌)로서의 특정성을 암시해준다. ● 작가는 말하자면 캔버스를 그 표면에 덧그려질 이미지를 위한 부수적인 장치가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자족적인 존재, 오브제, 사물형식으로 이해하고 이를 표현의 한 형식으로써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천 자체를 대상화한(소재로 한) 이 일련의 작업들에선 일종의 모더니즘적 환원주의 혹은 이에 대한 안티테제의 한 형식이랄 수 있는 쉬포르 쉬르파스(지지체와 화면으로 나타난 표면이란 뜻으로, 캔버스 자체의 질료적이고 구조적인 특질에 주목하는)와의 상관관계가 느껴진다. ● 행위를 강조한 평면작업. 강하진은 캔버스 자체를 자족적인 사물의 한 형식으로 보는 것과 함께, 회화의 본질을 다분히 무의지적이고 무의식적인 층위에서 이뤄지는 행위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그 표면에 바니시가 칠해진,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빈 캔버스의 가장자리를 목탄으로 계속 두드림으로써, 이 과정 중에 목탄가루가 캔버스 표면에 흩어지면서 일종의 비정형의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1981). 이렇듯 그림을 그린다는 능동적인 행위보다는 그림이 그려지게끔 유도한다는 수동적인 행위가 돋보이는 작업에서는 회화를 성립시키는 한 조건으로서의 우연성의 계기가 느껴진다. 그러니까 일종의 수동성과 우연성을 매개로 해서, 오히려 회화의 본성이 드러나도록 유도하고 이를 강조한다는 전략인 것이다. 이는 흔히 그림을 창작주체의 분신에다가 비유하는 예술가 신화와는 반대되는 것이다(강하진은 이런 그림을 작가의 과욕의 소산으로 본다). ● 낙서회화와 신형상미술 경향성의 평면작업. 1990년대 초 강하진은 일종의 낙서회화와 신형상미술로 범주화할만한 경향성의 회화를 그린다. 서체 같기도 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상적인 기호 같기도 한, 분방한 드로잉의 궤적을 보는 듯도 한 일련의 그림들에선 서예의 필과 획에 대한 관심이 느껴진다. 한편, 형상들이 파편화된 채 드러나 보이는 일련의 형상미술에서는 시대적 정황이나 인간의 실존적 조건 등의 내용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지가 읽혀지는데, 이는 그 자체 회화의 본질에 바쳐진 대개의 작업들과는 비교되는, 작가의 다른 일면이 느껴지기도 한다.

강하진_자연율12 natural rhythm12_천에 아크릴채색_117×91cm_2012

자연율을 주제화한 평면작업. 199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강하진은 자연율이란 화제(畵題)로써 일련의 평면작업을 지속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처음에는 그 표면에 코팅 처리된 어망용 천에다 그림을 그리다가, 이후 점차 캔버스 작업으로 옮아오고 있다. 어망용 천 조각을 이어 붙인 박음질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든지, 천 표면의 비정형의 주름을 그대로 살려 이를 회화적인 한 요소로서 끌어들인다든지 하는 점에서 전작에서의 지지체에 대한 관심과의 일관성이 엿보인다. ● 그런가하면 캔버스에 그린 근작은 일종의 끼워 넣기로 정의할 만한 특이한 프로세스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흰색과 흰색, 검정색과 검정색, 주황색과 주황색으로 나타난 색의 지층 사이에다가 다른 색의 지층을 끼워 넣는 것이다. 예컨대 흰 그림의 경우를 보면, 흰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청색이나 적색 등의 원색의 색 점들을 덧그린 후, 재차 이를 흰색으로 덮어나가는 식이다. 이로 인해 마치 흰색 화면의 이면으로부터 원색의 색점들이 배어져 나오는 듯한 특유의 화면효과가 연출된다. 이로부터 일종의 사이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창호나 빈 문틀에 걸린 발을 통해본 사물현상과 같은 전통적인 미감이 느껴진다. 여기서 작가의 미감은 표면에 드러나 보이는 사물현상을 넘어 원형으로 부를 만한 어떤 지점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검정색 화면을 보면, 색채는 완전한 검정색이라기보다는 짙은 회흑색에 가깝고, 또한 그 표면질감은 마치 흑연으로 그린 듯 금속의 발광성이 느껴진다. ● 이처럼 단색조의 평면의 이면으로부터 수많은 다른 이질적인 색의 지층들을 암시하는 그림들이 분청의 귀얄자국을 연상시키는가 하면(특히 흰색 화면), 토기와 같은 도자기의 질박한 표면질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특히 검정색 화면). 빛에 대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특유의 마티에르가 감지되는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는 감각적인 사물현상을 넘어 아득하고 유현한 깊이감이 전해진다. ● 강하진은 그림이 논리의 도해(圖解)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물론, 그림을 설명해주는 궁극적인, 최종적인, 결정적인 의미 같은 것은 없다. 그림에 대한 모든 해석은 언제나 일면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 해석들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설명들의 집적으로써 그림의 의미가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린다는, 그리지 않기 위해서 그린다는 작가의 역설적인 표현은 헤겔의 지양(헤겔은 이성의 간계와 함께, 부정함으로써 긍정하는 지양을 이성의 한 속성으로 본다)을 연상케 한다. 논리에 대한 표면적인 부정은 사실은 논리의 적극적인 긍정과 통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역설적인 표현을 화두 삼아 회화의 본질에 대해 치열한 물음을 던져왔으며, 그 문제의식은 특히 70, 80년대를 전후한 국내의 실험미술과 모노크롬 화단에 뚜렷한 흔적으로 각인돼 있다.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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