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풀 이야기 : 부처 俗 풍경, Intro 와 Cross

황인선展 / HWANGINSON / 黃仁羨 / installation   2013_1010 ▶︎ 2013_1016

황인선_Golden buddha_잡곡밥풀 캐스팅_12×8×9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930e | 황인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3_1010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10:00pm

갤러리 골목 Gallery GOLMOK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34-23번지 1층 5호 Tel. +82.2.792.2960 www.gallery-golmok.com

밥풀 오브제와 밥풀 회화50%의 나즈막한 유쾌함과 50%의 내재화된 슬픔이 깃든 비평 "정말이지, 지배현실에 도전하여 싸울 수 있는 수단으로서 마지막 남은 것이 시적 상상력이다." (월터 부르그만(월터 부르그만, 예언자적 상상력, 김기철역, (복있는사람:서울, 2009), p.100.)) 밥풀이 소주병과 돼지저금통을 만들 때 그것들은 단연코 사물 이상의 것이 된다. 물론, 2012년 작 「지기知己」나 「실연失戀」에서 보듯, 소주 자체가 이미 적지 않은 것을 말한다. 소주는 '삶의 고비고비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하는 소중한 친구'다. 「빨,노,초 신호등­밥풀」(2011), 「mosaic pig」(2012)등을 통해 친숙해진 돼지저금통은 물질만능과 세속적 풍요가 망각 속으로 파뭍어버린, '배고팠지만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이다. 그것은 '군것질 하고픈 마을을 꾹 참아가며 한푼 두푼 동전을 넣었던', 손에 쥔 건 없지만 가슴에는 많은 것들을 가졌던 시절의 상징이다. 황인선이 즐겨 다루는 것은 주로 빈자(貧者)의 사물이다. ● 예술의 역사는 탁월한 화가와 시인들이 자주 빈자의 우물에서 영감을 길어올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페터르 브뤼헐은 거지의 행렬이나 누더기를 걸친 시민들, 종교적으로 핍박받는 자들을 자주 그렸다. 장 프랑수아 밀레도 끼니마저 거르길 밥먹듯 했던 소작농의 애환에서 인생의 참 비밀을 보았다.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정치미학적 감각이 아니었다면, 삼등열차에 몸을 실은 아낙과 젖먹이 아이가 부패한 현실정치를 응징하는 상징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광산촌의 전도사 시절이나 아를르의 무명화가 시절이나 반 고흐의 눈에는 늘 감자로 끼니를 때우는 가난한 이들이 어렸다. 이런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던 걸출한 예술가는 통 털어도 소수거나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황인선_밥풀 아이 II _자연밥풀 캐스팅_81×55×29cm_2013
황인선_Mosaic pig I_염색밥풀 몰딩_13×17.5×13.5cm_2012

황인선이 사용하는 밥풀은 부귀나 영화와는 거리가 먼 질료다. 구하기 어렵거나 값비싼 것도 아니다. 밥풀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오브제들만큼이나 빈자의 리얼리티에 가깝다. 그것은 예컨대 데미안허스트가 사용했던 8006개의 다이아몬드와 정반대 쪽의 것이다. 황인선이 차용한 상표인 '진로(眞露)'가 무라키미 다카시가 그것과 관련되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던 '루이뷔통' 브랜드와 대척점에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밥풀은 이미 황인선의 세계를 지지하는 삶의 신조와 예술이 노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한다. 그것은 다이아몬드의 허영에 호소하는 찌질한 예술, 늘 구찌 양복을 빼입는 제프 쿤스 같은 작가, 마돈나와 주드로가 동원되는 미술시상식 등으로 요약되는, 연예사업으로 곤두박질친 거짓의 세계에 귀속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 오늘날과 같이 병들고 아픈 지구라는 별에서 다이아몬드와 구찌, 루이뷔통, 헐리웃의 감각산업의 산물들로 치장한 예술은 결코 명예로운 것이 아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치장하더라도, 그 세계가 제국의 소산이요 자본의 폐해의 일환임을 다 감추지는 못하리라. 제국 경제의 궁극적인 목적은 시민들의 배를 불려 눈을 뜨지 못하는데 있는 반면, 황인선의 밥의 경제는 가난 구제와 빈자의 연민, 그리고 아이들의 양육에 훨씬 더 가까이 가 있다. 이 밥의 경제학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밥풀의 미학이다. 밥풀의 미학은 어떤 포장 없이도 자신의 탈제국적 정체성을 자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여전히 인류 최대의 적인 궁핍과 주림을 환기함으로써, 역사와 문명의 속살을 단번에 문제삼는다. ● 이런 맥락에서 황인선의 밥풀의 미학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폐악성과 그에 의해 추동되는 조작적인 글로벌 미술을 객관화할 자격을 지닌 것이 된다. 그럼에도 황인선의 밥풀로 성형한 사물들은 비평문학보다는 상징시에 훨씬 더 가깝다. 이 세계는 거친 어투나 격한 주장, 이념적 지향, 강령에의 몰입, 통제되지 않은 분노 같은 비판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비난이나 고발, 대안, 심지어 문제제기조차 이 세계의 본령이 아니다. 어찌보면 '빈자(貧者)'와 같은 최소한의 뉘앙스조차 밥풀미학의 진정한 형질을 이념적으로 고착시킬 우려가 있다. 작가는 단지 금속제 튜브에 든 화학안료를 밥 짓기로 대신하고, 전통적인 대리석이나 청동 대신 밥풀을 재료로 삼았을 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비평의 형식으로 나아간다.

황인선_지기 知己_염색밥풀 캐스팅_실물크기_2012
황인선_실연 失戀_염색밥풀 캐스팅_실물크기_2012

황인선의 밥풀의 미학은 사물들을 파토스의 차원으로 돌려보낸다. 사물의 로고스적 명료함은 즉각 종료된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사물의 규범들, '서류가방, 리무진 승용차, 기자회견, 수출입할당량, 신무기체계'와 같은 것들로 대변되는 세계는 일거에 정지된다.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소설 「통조림공장 골목, Cannery Row」(문학동네역간)의 주인공 닥이 인생의 본질을 숙고하며 물었던 질문이 그 비유가 될 수 있다: "세상을 다 얻은 다음, 위궤양과 전립선비대와 다초점 렌즈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인간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이것이 바로 야망과 신경과민과 탐욕에 매몰된 채 사랑가는 사람들에게서 명료한 듯 보이는 일상을 빼앗아 파토스로 되돌려보내는 질문인 것이다. 황인선의 세계에서는 밥풀이 그 꼭꼭 감추어진 신랄함으로, 사물들의 운명을 질문의 영역, 파토스의 차원으로 돌려보내는 매개자를 자처한다. 밥풀로 캐스팅(casting)된 사물이 비판의 궁극적 형식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밥이 사물이 되고 사물이 밥이 되는 이것은 사물이 무관심한 중성, 무감정(apathy)하고 파토스가 부재하는 중립적 대상으로부터 구제되는 절차이기도 하다. 또는, 사물을 그것의 모든 상징적 가능성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철저하게 통제가능한 형태로만 남게 하려는 힘과 맞서 싸우는 것이기도 하다. ● 사물을 다시 파토스와 관련시키는 이 해독(解毒)의 과정이 바로 비평적 차원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밥풀 신체를 덧입는 순간 어떤 사물도 더 이상 무기적 대상이나 소비재의 형태로 머물 수 없다. 부처가 밥풀부처가 되고, 소주가 밥풀소주가 되는 순간, 질료적 전환을 훨씬 넘어서는 놀라운 역전이 시작된다. 사물들은 단지 소비되고 사용되고 대체되기를 중단하고, 기꺼이 기쁨의 춤을 추고 아픔의 인식에 동참하며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낸다. ● 작가는 상상력을 동원해 사물의 지배를 해체하고 그 힘을 무효화한다. 상상력이야말로 사물들을 그것들의 병들고 메마른 유배지로부터 이끌어내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지배현실에 도전하여 싸울 수 있는 수단으로서 마지막 남은 것이 시적 상상력이다. 그것만이 왕권의식이 우리 공동체와 '나' 의 심장으로 파고들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수단이다." 왕권의식은 사람들을 끝없이 무감각상태로, 죽음의 무감각 상태로 몰아가기 때문에, 그것과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부름의 본령이다. 상상력이 허용하는 한, 더 많은 것들을 왕권의식의 창고에서 빼내어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보내는 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인 것이다.

황인선_고통의 다리-몽유도원도_캔버스에 잡곡밥풀, 색연필, 수채_30×30cm×3_2013
황인선_Buddha faces_캔버스에 흰밥풀, 잡곡밥풀 몰딩_20×20cm_2013

황인선의 창작으로서의 밥짓기와 밥풀의 미학은 작지만 필연적인 연상(聯想)에서 시작되었다. 밥짓기도 창작이라는, 더 나아가 밥짓기야말로 창작이어야 한다는 생각! 실제로 밥짓기와 창작의 경계는 구분짓기가 무의미할 만큼 모호하다. 밥은 양식이고 작품도 그렇다. 나쁜 식사가 몸을 상하듯, 나쁜 예술은 정신을 그르치고 잘못된 미적 경험은 감성을 왜곡한다. 밥은 아이들을 살찌우고, 좋은 예술은 속사람을 키운다. 양자 모두 동일한 과정 동일한 공을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게다가 황인선은 엄마인 동시에 작가다. 황인선의 삶에서 그 둘은 정체적으로 충돌하지 않고-않아야 하고-, 기능적으로 양립가능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밥짓기의 예술과 밥풀의 미학은 또다시 이 시대의 주류예술론, '난해함과 철학의 과잉 속에 표류하는 현대미술'의 규범을 해체하고, 그 담론들의 공허한 속내를 폭로하면서 '진정한 예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의 파토스로 되돌려보낸다. ● 황인선의 창작으로서의 밥짓기와 밥풀의 미학은 그 강한 상징성에 의해, 관련되는 사물들과 그것들의 규범의 체계를 신속하게 비평적 담론의 장으로 이전시킨다. 그의 '밥풀-사물'들은 현저하게 파토스의 차원을 회복하고, 조건반사적으로 왕권의식과 대립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곁을 지켜온 삶'을 기억하고, 지금 이곳의 실존을 기념하며, 빈자의 리얼리티를 드러낸다. 이는 '서구미술 따라가기에 급급한' 작금의 우리 현대미술 풍토, 중독된 문화사대주의(事大主義), 척박한 예술정신을 고려할 때 실로 의미있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그렇더라도, 황인선의 밥풀 오브제와 밥풀 회화가 구성하는 비평적 담론은 50%의 나즈막한 유쾌함과 50%의 내재화된 슬픔으로 구성된다. 신랄함은 안쪽에 감추어져 있다. 감상은 그 안의 것을 발견해내는 과정이 될 것이다. ■ 심상용

Vol.20131015e | 황인선展 / HWANGINSON / 黃仁羨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