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하는 감각들 Sense of Absence

박지혜展 / PARKJIHYE / 朴智惠 / video   2013_1028 ▶︎ 2013_1127 / 주말,공휴일 휴관

박지혜_Labyrinthos_2채널 영상, 사운드트랙_00:07:39_2013

초대일시 / 2013_1101_금요일_06:00pm

송은 아트큐브는 젊고 유능한 작가들의 전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재)송은문화재단에서 설립한 비영리 전시공간입니다.

관람시간 / 09:00am~06:30pm / 주말,공휴일 휴관

송은 아트큐브 SongEun ArtCube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3448.0100 www.songeunartspace.org

친밀감 속의 폭력 - 0.징후로서의 미디어 ● 폴 비릴리오는 영화와 속도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착시현상을 재해석한다. 이른바 지각의 한계에 의해 만들어진 착시를 감각은 깨어있지만 기억이 순간적으로 끊어졌다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현상/증상을 피크노랩시(poicnolepsie, 기억 부재)로 제안한다. 부재의 시간은 인식적으로는 존재하는 시간이 아닌 셈이다. 기억 부재란 한 방향을 향한 일정한 시간의 움직임이 발작이 일어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일원적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는 현상이다. 연속사진을 한 방향으로 회전시키면 자연스레 사진의 대상이 움직인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착시, 혹은 환영이라 부른다. 비릴리오의 사유가 가진 고유함은 착시현상을 감각적 속임수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순간들이라 정의 내린다. 즉 부재는 존재하지 않음이 아닌 그 존재가 보이지 않는 상태, 어딘가 존재하지만 실종된 순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전시「부재하는 감각들」은 반어적 표현이다. 박지혜의 작업은 구체적 사건을 지시하지 않은 채 사건 이전이나 이후 만을 보여준다. 사실 사건이 발발하는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사각지대(Blind Spot)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비행기가 충동하는 영상은 전세계인 대부분이 목격한 사건이지만 충돌하는 순간을 눈을 뜬 채 바라보기란 쉬운 게 아니다. 사건은 그것이 벌어지는 순간의 이전과 이후에 대한 묘사와 해석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며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부재하는 감각들」은 원인이 불분명한 불안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그것은 잠복하는 폭력성 때문일 수도 있고 이미 일어난 폭력 이후의 상태일 수도 있다.

박지혜_Labyrinthos_2채널 영상, 사운드트랙_00:07:39_2013
박지혜_Labyrinthos_2채널 영상, 사운드트랙_00:07:39_2013

-1.욕망과 욕구 ● 박지혜의 영상은 실제 시간보다 느리게 움직인다. 오로지 연기자들의 행동만이 담긴 영상은 구체적인 사건을 재현하지 않지만 음향/음악만이 추상적으로 심리적 상태의 흐름을 유도한다.「부재하는 감각들」은 인간 관계 속에서 잠재하는 욕망의 정체를 추적하지만 명확한 사건을 극화하기보다는 기이할 정도의 심리적 불안감을 드러낸다.「The Impure Vacuum」(2012)은 수직으로 세워진 영상에 한 쌍의 남녀가 마치 오르골 위에서 회전하는 인형처럼 서서히 움직인다. 그리고 세 개의 분활 화면 속에 남녀의 신체가 확대된 장면이 나타난다. 초반에는 결혼식 장면을 연상시키는 커플이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여자의 허리띠를 강하게 조르기 시작하고 여인은 고통과 쾌락이 공존하는 모호한 표정을 띤다. 욕망의 강도는 점점 높아지지만 느린 움직임은 동일한 속도를 유지한다. 분할 화면 속 이미지도 옆 화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무관한 듯 어떠한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부재하는 감각들이란 표제가 무엇을 지시하는 지를 묻게 된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폭력, 학대는 욕망이란 심리적 기제가 갖는 부조리함을 떠올리게 한다. 조르조 아감벤은 경험적 감각과 관념적 이성 사이의 불균형을 지적하면서 현실과 분리된 이성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는 "그것은 욕망, 다시 말해 불가능한 소유라는 환상과 경험의 소진에 의해 드리워진 그림자"라고 비유하면서 경험으로부터 멀어진 고전적 심리학에서 욕망과 환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즉 인간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이성과 감각, 관념과 경험으로 나누어서 사유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실제로 사랑이 환상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 욕망은 결코 대상의 물질성 속에서 대상을 만나지 못한다. 오히려 이 대상은 하나의 이미지, 말 그래도 욕망으로만 이루어진 '새로운 가면'으로서 이러한 이미지 혹은 가면 속에서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것 사이, 욕망과 그 대상 사이에 있던 경계선은 지워져 버린다." (조르조 아감벤, 『유아기와 역사-경험의 파괴와 역사의 근원』, 새물결, 2010, 51-52쪽) 박지혜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기제는 바로 욕망의 모호함을 건드린다.「Labyrinthos」(2013)는 두 개의 영상의 배치에 의해 둘 사이의 관계가 생성된다. 설치 공간의 전면에 수직으로 세워진 스크린 패널에는 피리 부는 남성이 등장한다. 패널과 적정한 거리를 두고 벽면 전체에 투사되는 영상에서는 세 명의 소녀가 등장한다. 중동 풍의 의상을 입은 남자는 유혹적인 몸짓으로 피리를 불고 그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관객은 그의 시선을 바라보면서 후면의 영상 속 소녀들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세 명의 소녀는 흰색 잠옷을 입고 의미를 알아 차릴 수 없는 움직임과 시선이 교차한다. 두 영상 사이의 물리적 거리, 공간을 채우는 것은 소리/음악으로 입체적 설치에 차원 하나가 더해진다. 피리 부는 남자의 유혹적 몸짓 뒤에 위치한 소녀들의 순진한 움직임, 순백의 의상, 천진한 눈빛은 기이한 불안을 일으킨다. 두 영상/평면 사이의 공간은 두 대상(어른-아이/욕망의 주체-대상) 사이의 힘의 관계를 제시하는 듯하다. 영상 간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역할은 세이렌의 휘파람이나 모짜르트의 마술피리를 연상시키는 음악/음향 덕분이다.

박지혜_The Pied Piper_단채널 영상, 사운드트랙_00:07:32_2013

±1. 앨리스의 시공간 ● 박지혜는 작업 초기부터 욕망이 만드는 다양한 심리상태의 모습과 그 한계를 영상으로 제작하였다.「The Chopped Arm」(2008)에서 박지혜는 자신을 연기한다. 그녀는 '공주풍'의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으며 현재까지 영상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은 모두 유사한 의상을 입고 있다. 본인을 연기하는 영상의 페르소나 '그녀'는 잘린 팔을 수집한다. 영상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수집한 팔은 연인의 것임에 분명하다. 박지혜에게 연인의 팔은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기보다 남성의 점잖은 팔이 자신에게 주는 심리적 안정감을 대신하는 신체, 즉 팔은 교감과 소통이 일어나는 인터페이스인 셈이다. 최근 들어 자신이 아닌 배우가 영상 속 '그녀'를 연기하고 있지만 '그녀'는 모두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처럼 보인다. 동시에 그녀의 반대편에는 '그'가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그녀'와 그의 관계는 여성, 남성과 같은 성별, 이 둘 사이의 관습적인 위계를 지시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더 큰 욕망을 가진 사람, 둘 사이의 관계를 교환이 아닌 소유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욕망의 폭력성을 보여주기 위한 표상으로 해석하는 게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The Sisters I, II」(2009)에서 '그녀'는 커다란 자루를 질질 끌면서 낭만주의적 풍경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 인적이 없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는 듯한 이 작업은 자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박지혜에게 작업이란 일종의 의례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의례가 행해지는 시간은 현실의 연대기적 시간으로부터 새로운 시간을 생성시킨다. 이른바 현재에서 미끄러진 시간은 우리를 막연한 과거, 시간의 심연으로 침잠하거나 초월적 시간의 세계로 인도한다. 즉 의례의 순간은 시간의 속도와 방향이 반란을 일으켜 무질서, 복합적인 시공간의 상태로 변환되는 사건이다. 의례 이후는 다시 질서의 시간으로 회귀한다. 질서를 위한 무질서의 상태가 곧 의례 혹은 축제의 시간성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영상 세계는 현실과 다른 시공간-그곳은 심리적 세계로 시간과 공간의 개념만이 재연된다-으로 현실의 문법, 질서, 규범의 차원에서 전복된 신화적 차원의 시공간이다.

박지혜_The Impure Vacuum_4채널 영상, 사운드트랙_00:27:24_2012
박지혜_The Impure Vacuum_4채널 영상, 사운드트랙_00:27:24_2012
박지혜_The Impure Vacuum_4채널 영상, 사운드트랙_00:27:24_2012

0+0.잠복하는 폭력 ● 영상작가 박지혜는 관계와 그 상호성에 대한 고민을 작업으로 펼친다. 작가가 묻는 관계에 대한 고민은 거대한 대상이 아닌 가장 가까운 대상, 연애, 사랑, 질투, 연민과 같은 일상과 밀접하다. 가장 친밀한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관습, 신화, 형식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곳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으로만 이루어진 장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개인을 지배하는 수많은 관념과 욕망 들이 충돌, 교환, 타협하는 복합적인 장이자 언제나 원초적 갈등이 잠복하는 장이다. 일상적이고 친밀한 관계 속에 잠재하는 폭력은 보이지 않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가까운 사이이기에 더욱 위험하다. 일상 속에 잠재하는 폭력성, 파시즘은 20세기 중반 유럽의 지성을 현실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문제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굴종하게 만들어 일상 생활의 미세한 국면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규율, 교묘하게 정신과 일상을 조작하는 고도화되고 숨겨진 권력 장치로서의 파시즘이다. 나는 그것을 '일상적 파시즘'이라 부르겠다. 일상적 파시즘은 전체주의 체제로서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는 존재 양식을 달리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체제의 배후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전통이라는 이름의 문화적 타성들, 설명하기 힘든 본능과 충동들 속에 천연덕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임지현,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 읽기」, 『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 외(공저), 도서출판 삼인, 2000, 20쪽) 일상이 의미가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사실주의나 인상주의 회화의 소재가 일상의 발견을 보여주었지만 당시의 일상은 변화하는 도시와 문화를 수용하고 스케치하는 데에 머물렀다. 비평주의적 관점으로 일상을 재고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 유럽의 젊은 지성이 일상 속에 숨어있는 독재적 태도의 위험을 고발하면서부터였다." 일상 생활은 혁명, 민족, 민주 등의 추상적 신화에 가려 주목 받지 못하고 소외된 삶의 영역이다. 그것은 하찮지만 견고하다.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이어지면서 일상을 구성하는 그것은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당연하고 무기한적인 삶이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는 추상적 신화의 틈을 헤집고 들어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그 견고한 생활 양식을 읽어 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임지현,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 읽기」, 『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 외(공저), 도서출판 삼인, 2000, 29쪽) ● 낱말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사유가 가능한가? 이는 현대 철학이 찬란한 문명과 과학의 시대에 살면서 여전히 소통의 단절과 정신적 고통을 겪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큰 질문이다.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는 "인간은 문화와 역사를 펼쳐 나가면서 계속해서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온 듯" (뤼스 이리가레, 『사랑의 길』, 동문선, 2009, 64쪽) 하다며 언어 체계를 통해 세계를 격렬하게 탐구했으나 과연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여성 철학자는 근대 이후 꾸준히 전개된 스스로 주체가 되기 위한 수많은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구속하는 언어, 민족, 신화, 성 과 같은 과거의 유령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지를 사유하자고 제안하는 듯하다. 과연 우리는 타인과 '더불어' 살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함께 소통하는 상호적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리가레는 결국 모든 관계가 언어에 의해 지배되지 않느냐 반문하면서 모든 관계에 남아 있는 지배와 구속의 현실을 환기시킨다. 오늘날에도 시작(詩作)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나 의식의 깨어있음을 들려주기 위함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언어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며 이러한 행위가 곧 정신적, 지적, 관습적 가치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스펙터클과 허영심으로 눈을 멀게 하는 예술과 오락이 현실을 지배하는 시대라 부르지만, 그렇다 해도 아직까지 예술이 언어, 권력과 권위, 이성과 이상이 지시하는 정신 우월주의로부터 실존에 대해 고민하는 자아를 탐구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예술에 대한 정의를 지나치게 과장해서 포장하고 도구화하는 경우도 많다. 예술가는 자신이 겪는 갈등을 정형화 된 방식이나 표현과 다른 접근을 드러낸다. 그들은 해답을 주기보다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사람인 셈이다. ■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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