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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展 / KIMDEUKJIN / 金德辰 / painting   2013_1209 ▶︎ 2013_1215

김덕진_어디로 가지_캔버스에 유채_80×117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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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210_화요일_1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신라대학교 로터스 갤러리 SILLA UNIVERSITY LOTUS GALLERY 부산시 사상구 신라대학길 100 www.silla.ac.kr

깊고 푸른 기억, 김덕진 회화의 결 ● 남루한 (수상)가옥과 세간, 쪽배들 위로 고요와 평화가 깃들여 화면은 애잔하다. 필시 영화 세트장인 듯 깊고 푸른 고요 속에 떠 있는 그것의 시간은 멈춰있고 공간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이때라면 우리들은 의례히 "애상 어린 푸른 색조의 단순한 서정시로군!" 할지도 모른다. 현세의 말들이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에서 다른 말을 찾으려 몰입하는 시계(詩界)로 건너 간 회화라는 촌평과 함께 말이다. ● 그러나 이 풍경들을 단순한 서정시로만 보고 넘기기에는 간단치 않은 요소들이 있다. 우선 푸른 배경이라는 호위 속의 그 사물들은 그 남루함과 위태로움을 너무도 날것으로 숨길 수 없이 드러낸다. 더구나 홀로 혹은 무리 지어 떠있는 선상(船上)의 그 거처들이 인구의 1/4이 사망한, 전체 토지의 80%가 불모지가 된, "설 땅이 없던" 죽음의 땅 캄보디아로부터 유배된 유민들의 '물 위의 땅'의 그것이라는 인식에 이르면 이 평화로운 역설은 울음을 팽팽하게 머금은 어린아이의 곁에 서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조심스러움은 비단 그림이 머금은 비극적 서사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그것을 일러 '그림으로 들어가기의 문턱'이라고 말해 보겠다. 이는 이국의 풍경을 가져왔다는 데서 그러해 보일 수도 있지만, 김덕진의 그림은 관람자로 하여금 그 풍경들로 직접 건너가기엔 뭔가 '멈칫'하게 하는 하나의 강, '기억의 강'이 놓여 있는 듯하다는 점에서다. 마당에서 집안으로 들어올 땐 신발을 댓돌 위에 벗어놓고 문턱을 넘어서듯 하는 건너가기 말이다.

김덕진_섬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3

이를 과도하게 말해 보자면, 관람자는 현세와의 연락을 끊어야만 그 속에 들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 보겠다. 건너간 그곳에서 사유는 오직 그림 안에서만 독자적인 논리적 타당성을 인정받는 독자적인 생을 영위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독자적인 생?, 그림 안으로의 고립? 그렇다. 그것은 어떤 경지에 오른 매력적인 대개의 그림들의 생이기도 하다. "여기 신비한 삶이 있어요…"라는 듯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런데 우리 삶이 이렇잖아요" 라는 목소리가 저 깊은 심부로부터 울려나오느냐? 라는 것이 그것이다. 오직 그림 안의 문법만으로 이 (그림 밖의)세계를 반조(返照)하게 하는 어떤 의미 지평을 이끌어 내느냐는 것일 테다. ● 김덕진의 그 서사 전략을 추적해 볼만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사회적 삶을 '헐벗은 자연적 삶'에 반조(返照)하게 하는 감춤과 드러냄이라는 연산(演算)이다. 가장 헐벗은 물 위의 유민들의 삶을 통해 오늘의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실존의 심연을 단호하게 환기하는 것이다.

김덕진_아쉽지만 가야할 길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3

● 작가가 우연한 캄보디아 여행 중 방문하게 되었다는 그림 속의 똔레삽(Tonle Sap) 호수는 물의 왕국 앙코르(Angkor) 문명의 주인공 인도차이나에게는 위대한 '아버지'로 통칭된다고 한다. 운하를 거미줄처럼 뚫어 관개시설과 교통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동남아시아 최대의 제국을 만들었던 크메르제국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셈이다. ● 그러나 똔레삽 호수는 근세의 아픈 역사인 20세기에 이르러 전화(戰禍)에 지친 캄보디아나 베트남 난민들의 궁핍과 불법체류의 막다른 피난처로서나,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최종의 흙탕물의 '섬'으로서나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김덕진 회화의 고요한 블루처럼 '평화'라기보다는 위로 받지 못하는 걍팍하고 고된 삶 바로 그것인 것이다. 육지, 땅 위에서는 살아 갈 수 없는 삶, 의·식·주 일체를 사회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소위 '사회적 삶'을 홀연히 포기한 곳이 그곳이다.

김덕진_뗏목위의 꽃_캔버스에 유채_65×91cm_2013

따라서 수평선마저도 흐릿한, 지도에서 그 어떤 식으로도 방위를 확정할 수 없는 푸른 안개 속에 휩싸여 있는 막연히 어떤 곳(somewhere)으로서의 푸른 색의 표현은 데페이즈망 기법처럼 엉뚱하고 역설적이다. 가장 비루한 현실이 가장 평화로운 배경 막 안에 들어 가 있는 역설 말이다. 이는 필시 이 세계의 현실성이 확보될 수 없는 언어도단의 지점에서 이 세계의 한 부분만을 싹뚝 오려내어 다른 배경에 접합함으로써 그 자신의 새로운 현실성의 삶을 출발시키게 하려는 회화적 고안, 혹은 (회화의 주인공들에게라면) 캄보디아의 소란스러움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적막, 귀머거리의 세계 같은 것으로서의 그들의 삶에 바친 오마쥬다. ● 소소한 잔물결이 호수 위의 사물들을 반영하면서 느릿한 일렁임을 남기고 있지만 그것은 흡사 절대 적막의 세계인 것이다. 그것은 높은 산악을 지날 때 이명(耳鳴)이 찾아들던 경험의 그것이다. 김덕진의 블루, 그 푸른 새로운 현실/비현실은 이명이라는 강을 횡단하지 않고선 건너갈 수 없는 세계였던 셈이다. ● 그곳에서 초라하고 고된 삶은 푸른 베일 속에 감춰진다. 구할 수 있는 가장 값싼 재료로 덧대어져 있을 뿐인 가옥의 남루함은 물론이고, 쪽배에나 심지어 작은 대야를 타고 망망한 호수 가운데로 물길을 저어가는 아이들의 모습, 선상 가옥 한 모퉁이에서 주인과 호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개나 오리, 가축들마저도 그것은 이내 동화책 속의 한 페이지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김덕진_섬_캔버스에 유채_145×112cm_2013

이를 두고 나름 '정직한 눈'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원칙적인 어떤 사람은 말하길, 직설적 리얼리티를 낭만화시켰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이명의 세계라는 점을 그는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현실은 '우리(지금)'으로부터 출발한 시선이 아니라, 바로 '그곳'으로부터 출발시킨 시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필자가 앞서 "다르게 말해 보기"로서의 시(詩)의 영역이라고 불렀던 바다. 단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다르게 말해 본 그 시의 세계 안에서도, 은유로서든 직유로서든 결국 이(편) 세계의 모순에 찬 비참과 어설픈 치유를 뛰어넘는 가감 없는 두려움들에 과연 우리를 정면으로 대면케 하는가이다. 이로써만 김덕진의 명상적인 색조가 그 흔한 '섣부른 위안'에 떨어지는 서정시류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푸른 베일 속의 동화 같은 삶, 그것이 섣부른 위안이 아닌 것은 그의 그림에선 다가갈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저 가까운/먼 곳에 있는 어떤 '아픔'을 우리는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속의 어떤 것을 흔들어 아리게 하는 데, 우리는 손이 닿을 듯 못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혹은 인류의 궤적이) 이렇지 않았더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어떤 행복(의 꿈), 어떤 살아있는 생생한 삶"을 아프게 환기하는 어떤 '고통'인 것이다. ● 지상의 땅 어느 모퉁이에서 두런두런 머리를 맞대고 이웃과 정담을 나누듯이 두 사람이 타기에 적절한 목선들은 이물과 고물들을 맞댄 채「정오의 휴식」(2011)을 취하거나, 빈 배는 저 홀로 호수 가운데 헐거운 낚시 줄 하나만을 무심히 늘어뜨린 채「명상」(2011)에 잠기거나, TV안테나를 세워놓은 선박 가옥 창가에 기대서서 놀이에 여념 없는 아이들이 옮겨 탄 조각배에 한 발을 내려뜨려 안전을 확인하는 아낙네의 삶(「부유하는 삶-그들이 사는 집」2010)은 지상에서의 여느 모자(母子)의 애틋한 삶을 떠올려 보게 하며 미소 짓게 한다. "아 여기도 지상과 똑같은 삶이 있었군!"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곧 뒤이어 우린 이런 해석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본 그곳은 땅 위가 아니라, 물 위인 것이다. 낯섦은 물 위에서의 행위가 땅에서의 행위와 동일한 동작으로 행해지고 있음을 보는 어떤 불일치함으로부터 연유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통'의 발원지가 이 불일치의 낯선 불편함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알게 된다. 말하자면 "여기도 지상과 똑같은, 아니 똑같지 않은, 삶"이라는 언어도단의 기술을 거듭해야 하는 궁지인 것이다. 어떻게든 이 삶을 설명해보아야 할텐데, 설명이, 문장이 되지 않은 것이다.

김덕진_섬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3
김덕진_섬_캔버스에 유채_112×194cm_2013

더 이상 포성과 총성이 들릴 수 없는, 지상엔 없는 유토피아같은 '이 땅'에서 새로운 사회적 삶을, 새로운 현실성의 삶을 출발시키려 하고 있는 그들의 삶이 소위 이 지상으로부터의 값싼 연민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세계의 손댈 수 없는 모순을 가차없이 보여주고 있는 증표라는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 김덕진의 '질문'이 여기에 있다. 동시에 이것은 그가 '어떤 기억'을 되살리려는 이유다. "우회적으로 돌아가 어떤 기억과 만날 것"이라고 한 말은 근거 없는 직관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낮아지는, 보다 느려지는, 보다 무미해지는 비워지는 삶, 그로써 이 현재를 보다 소외시켜 서늘하게 해 보려는 것이다. 소외된 자연성을 통해 저만치 너무 앞서 가 버린 우리 시대의 사회적 삶과의 간격을 측정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고나 할까. 사라짐(disappearance)으로써 드러내 보려 한다고나 할까, 마치 그것은 물이 작동시키는 무(無)의 사이클링(cycling)인 것과도 같다. 광막한 호수는 남루한 호수 위의 거처들을 부끄러운 문명의 탐욕·광기와 반조시키는 당당한 '자연적 삶'으로 떠오르게 하지만, 이내 부서지기 쉬운 불가피한 미래, 무(無)의 예약이라는 순환적 운명을 이미 머금고 있는 것이다. ● 사라짐을 이만큼 직시할 수 있는 그는 보기보다 담대한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어디로부터 유래하는지 추론할 수도 없는 푸른 안개 속에서 불현듯 우리의 삶이 현전(Presentness)한다면 이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 박응주

Vol.20131209a | 김덕진展 / KIMDEUKJIN / 金德辰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