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들 The eyes

안경진展 / ANGYEONGJIN / 安京眞 / sculpture   2013_1228 ▶︎ 2014_0109 / 월요일 휴관

안경진_시선들 The eyes_테라코타, 혼합재료_공간설치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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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진 홈페이지_http://www.angyeongjin.com

초대일시 / 2013_1228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01:00p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두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2가 14-59번지 2층(문래우체국 옆) Tel. +82.10.4940.3035 cafe.naver.com/gallerydoodle facebook.com/GalleryDudl dudl.kr

보다, 듣다, 말하다 그 분열 속에서... - 안경진, 『시선들 The eyes』 전시에 부쳐 ● 이번 안경진 작가의 전시는 '전시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 한다. 원래 전시(展示)라는 뜻은 '펴 보임'이며, 영어식 표현인 exhibition 또한 라틴어 exhibere=ex(out)+habere(hold)에서 왔다. 보여준다는 뜻이다. 프랑스어표현인 exposition 역시 '밖에 놓아서 보이게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전시회에 무엇인가를 '보러'가지, 누군가에게 '보여지기'위해 가는 것은 아니다. ● 근데 웬걸, 이번 전시에선 '볼 것'이 없을 수도 있다. 오히려 당신이 '보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흥분은 금물. 거긴 다른 관람객들이 지켜볼 무대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어째보면 보여지는 것은 행복하고 흥분되는 일이다. 무대가 그렇고,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에 있을 때 그렇다. 멋진 패션을 하고 도심을 거닐 때 패션모델이 갖는 느낌이랄까, 혹은 중세시대 궁정의 귀족들이 갖는 느낌이랄까. 그때 보여지는 것은 존 버거의 통찰처럼 일종의 과시, 명예, 권력일 것이다. 사실 전시회라는 것도 작가의 작품들을 보여주어 명예나 다른 무엇을 얻고자 하는 일종의 과시일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에 보여지기는 일종의 관음성과 유혹의 상호희롱이기도 하다. 혹은 스타-모델 시스템 내에서의 '들러리식 보여지기'이기도 하다. ● 하지만 이번 전시공간이 주는 분위기는 다른 방식의 '보여짐'과 거기서 발생하는 기분을 암시한다. - '누군가가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것. 이때의 보여짐은 불편하고 낯설며 심지어 불쾌하고 화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 어두컴컴한 분위기 속에서 수백 개의 시선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음악은 몽환적으로 반복되며 당신은 어둠속에 빛나는 눈들에 마비되거나 취할 수 있다. 독특한 '봄과 보여짐의 공간'이 연출된다. 그 공간속으로 파악하기 힘든 선율이 반복적으로 흘러간다. ● 그래도 전시이므로 우리는 뭔가 볼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바뀐다. 감상할 그 무엇이 존재하는가? 아마 감상할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조각의 형태, 질감, 형태가 주는 역동성이나 구도에서 오는 상승이나 하강의 리듬 따위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무엇인가?' '나는 여기 왜 있는가?' '저 눈빛들은 무엇인가?' '저 거울에 비춰진 수천의 표정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일 것이다.

안경진_시선들 The eyes_테라코타, 혼합재료_공간설치_2013
안경진_시선들 The eyes_테라코타, 혼합재료_공간설치_2013
안경진_시선들 The eyes_테라코타, 혼합재료_공간설치_2013
안경진_시선들 The eyes_테라코타, 혼합재료_공간설치_2013

얼마 전 타계한 아서 단토는 미술관 밖의 브릴로 상자와 미술관 안의 그것의 질적 차이가 사라질 때 예술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즉 "양자 사이에 흥미로운 지각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예술작품과 예술작품이 아닌 어떤 것 사이의 차이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것은 맥락의 차이 속에서 가능했다. 미술관에 있는 변기와 화장실에 있는 변기의 차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 본다는 지각 자체의 예술성이 과연 어디서 성립하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번 전시는 적어도 이러한 의미를 캐묻는 행위를 하고 있다. 물론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국정원이나 정보기관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 일상생활에서도 타인들이 사악한 눈들로 우리를 바라보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우리 내면에 자기감시효과가 생긴다는 것, 파놉티콘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감시와 처벌'의 메커니즘이 여기저기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또한 '감시와 처벌'은 새로운 통제사회 속에서 뱀처럼 통제의 유연성을 높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안경진_시선들 The eyes_테라코타, 혼합재료_공간설치_2013
안경진_시선들 The eyes_테라코타, 혼합재료_공간설치_2013

발터 벤야민은 한 유명한 논문에서 20세기 초엽에 서구예술과 문화의 무게중심이 '숭배가치'에서 '전시가치'로 이동 중이라고 진단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전시가치는 소비사회와 함께 폭증해, 각종 미디어를 통해 내파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전시가치는 이러한 내파과정을 통해 단지 상품을 잘 진열해 판매하는 수준을 넘어서 새로운 단계로 이행중이다. 우리의 광고 언어만큼이나 시각이미지들은 빅데이타로 쌓이는 어리석음에 빠져있고, 진정 어떤 말을 '듣는다'는 것, 어떤 것을 진정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감각마비와 통제, 자동기계화…. 이제 본다는 것은 미술관만의 특별한 맥락을 상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리, 극장, 인터넷, 학교, 스마트 폰 미디어 등 모든 것이 미술관화 되며, 모든 것이 연극화되며, 모든 것이 영화화 되고, 그것도 나쁜 영화, 나쁜 미술, 나쁜 연극이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안경진의 『확산과 공포의 시선들』은 이러한 역설에 대한, 이중구속에 대한 역전과 해방의 시도 혹은 최소한의 문제제기의 시도라 볼 수 있다. ● 이제 지구인류는 다시 '보다', '듣다'의 기본부터 시작해야하는 아이의 운명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번 전시가 '말하는' 행위 중의 강력한 한 마디가 아닐까 싶다. ■ 백용성

Vol.20131228a | 안경진展 / ANGYEONGJIN / 安京眞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