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Situations

Blurring, Covering, Conjuring展   2013_1231 ▶︎ 2014_0131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기슬기_김아영_김웅용_김춘재_박승진_이석_장종완 훙크엉 Hung Keung_타로 이즈미 Taro Izumi_호키 노부야 Hoki Nobuya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마도 예술 공간 서울 용산구 한남동 683-31번지 Tel. +82.2.790.1178 amadoart.org

상황(Situations): Blurring, Covering, Conjuring ● '상황'이라는 단어 속에는 변화라는 뜻이 함축된 말이다. 그것은 고정되지 않고 늘 변하기 때문에 예측을 불허한다. 현재 우리가 지향하려는 한중일 전시의 외부적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더 의미가 명확해질 것이다. 정치∙경제적 문맥에서 볼 때 동북아시아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유동적으로 변하면서 전개된다. 예술적 문맥에서 동아시아의 미학적 틀은 변화와 생성의 미학이다. 아름다움과 예술의 개념을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야말로 사물의 특성을 파악하는 동북아시아 고유의 방법이다. ● '상황'이라는 주제는 한중일 현실세계의 복잡다단한 인과관계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예술세계의 두드러진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블러링(blurring)'은 당연히 경계이탈과 영역의 구분과 차별의 철폐를 말하는 일반적 내용이기도 하지만, 사실 근래 들어 두드러지는 예술계의 분위기를 지적하고 있는 말이다. 현재 글로벌 미술의 특징은 더 이상 특정 유파나 이데올로기, 무브먼트로 엮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동시에 작가들은 스스로를 특정 개념과 카테고리로부터 이탈시키려고 한다. 장르 초월적 미술을 실천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신조에 만족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관심의 표적이며 자신의 작업이 어째서 그러한 길을 걷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려 들지 않는다.

기슬기_Unfamiliar Corner 06_사진_90×90cm_2013

작업의 내용과 형식이 지향하는 완결도의 수준으로부터 작가의 우위가 정해지지 않는다. 작가가 활동하는 반경의 폭과 너비가 도대체 얼마나 되느냐가 작품의 질과 내용보다 중요해지는 풍조가 생겼다. 그것을 유럽에서는 농담으로 이케아 예술이라고 한다. 쉽게 포장하고 이동해서 전시한 다음 다른 공간으로 또 다시 이주해야만 하는 작가의 운명을 가리켜 노마드라고 한다면 이 개념은 조속히 폐기되어야만 한다. 전시를 위한 전시, 이주를 위한 이주는 사실상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예술의 매력은 작가가 발산하는 진정한 생명력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버링'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네트워크라는 연결그물 잣기에 예술가로서의 의미 있는 시간을 아깝게 할애하는 점은 이 시대의 또 다른 비극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극적 조건들을 스스로 이겨내는 작가들이 있기 마련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진정으로 볼 줄 아는 몇 사람의 눈과 판단을 믿고 묵묵히 작업하는 예술가들의 작업 태도를 가리켜 '커버링'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 서구의 철학은 어떠한 대상에 대해 답이 명백하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즉, 명사와 술부의 관계가 일치하는 철학적 문답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존재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21세기의 철학은 상황에 따른 관계의 의미를 해석하고 음미하는 철학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는 생성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변화와 생성의 철학은 현재 서구에서 점차 불고 있는 하나의 분위기이지만(H. 롬바흐), 사실 이러한 전통은 동북 아시아 사상의 전통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정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론(플라톤의 사고)의 사고적 전통 아래에서 순수한 형식주의적 미학이 각광을 받는다. '상황'은 세계와 시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생성, 변화의 미학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개인 심리적, 형식 자체의 문맥적 제반 상황을 고려하면서 예술의 의미를 묻는 태도야말로 동북아시아 현대 예술이 펼치고자 하는 의지(wollen)인 것이다.

김아영_돌아와요 부산항에_다채널 영상_2012

'컨져링(conjuring)'은 21세기 예술의 특성을 대변하는 수식어다. 동북아시아 현대예술은 과학과 주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다. 그것은 연금술을 닮았다. 그것은 법칙과 테제를 분명히 지향하는 합리적 정신운동인 동시에 유토피아의 희망을 내면적으로 결코 포기하지 않는 예술가 개인의 바램이기도 하다. 그 결과 나타나는 현상은 '현자의 돌'을 연상시킨다. 예술가들은 21세기 사회가 지향해야만 하는 가치에 대해서 고민한다. 동시에 합리적 현실세계와 유토피아의 미래세계의 틈새에서 영원히 진보적 세계의 가능성을 묻는다. 세계가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멋진 태도를 유지한다. 그들은 세계를 바꾸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조금씩 세계에 감화를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마술'이다. 여기 모인 한중일 동북아 세 국가의 작가들은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면서도 예술의 본원적 소통 가능성을 믿는 작가들이다. 그 작가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김아영은 각 시대와 지역에서 벌어졌거나 현재 진행중인 사건들에 대한 리서치를 감행하면서 영화적 기법과 다큐멘터리의 기법을 혼재 시키는 다채널 영상으로 유명하다. 작가는 우리의 과거사부터 중동과 유럽에서 일어났으나, 크게 주목 받지 못하는 사건들을 극화시킴으로써 우리에게 각인되어있는 역사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역사는 사관을 갖는다. 역사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의 목적에 부합된 정교한 네러티브이지 진실 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 작가가 이렇듯 관객에게 역사와 자신이 만들어낸 사적 네러티브를 교차시킴으로써 얻는 효과와 묻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해석하는 동물이다. 해석에는 자기의 이익과 처지가 어떻게든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사는 다층적 해석이 서로 충돌하며 절충해가는 다이나믹한 과정일 뿐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작가는 현란한 기법과 매력적 이야기로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끔 이끌어준다.

김웅용_두개의 초록색 정물_HD_00:22:00_2012

김웅용은 흘러간 영화사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교차시킴으로써 예술과 시대의 의미를 묻는다. 60년대의 영화 발성법을 현재 들어보면 매우 이상할 것이다. 2013년 현재의 일상에서 그 발성법이 적용된다면 매우 우스울 것이다. 그러나 정작 60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그 발성법은 대세이자 진실성 그 자체였을 것이다. 먼 훗날 우리의 삶의 형식을 후세대는 어떻게 재미있게 바라볼 것인가? 시대와 예술의 형식은 영원히 변화하면서 의미를 재정립시킨다. 김웅용의 세계는 이런 것이다. ● 장종완은 회화와 영상을 종횡으로 넘나들면서 새로운 언어를 장조하고 있다. 작가의 언어는 다른 작가들마냥 부조리한 현실과 이상적 가치를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현실과 우스꽝스러운 상상을 조합시키는 데 큰 매력이 발생한다. 그래서 작가에게 현실이란 살아 볼 만한 것이며, 현실을 괴롭히는 것은 오히려 현실을 초극하거나 도피, 부정하는 태도라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장종완의 회화는 굉장히 명랑하다. 삶을 영원히 긍정하려는 태도는 그러나 괴로운 경험과 그 경험으로부터 체현된 깨달음의 바탕 없이는 불가능하다.

김춘재_garden_캔버스에 유채_97×145cm_2013

박승진은 자기의 삶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 만들어낸 재미있는 게임이나 몸짓으로 표현한다. 예술가가, 혹은 예술이 물질화되고 세속화된 현대 자본주의 체계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영혼의 의미를 싣는 마지막 매체? 제국의 소프트 파워? 그것의 정확한 이름은 제도다. 제도의 규율과 위계가 펼쳐내는 화려한 수식과 공모, 그 화려한 무대의 마지막 쓸쓸함 같은 것이다. 말없이 흐르는 한강에 몸짓으로 말하며 뿌리 깊은 나무와 힘겨루기를 한다. 예술은 그런 것 아닐까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이다. ● 김춘재는 세계의 두 가지 요소를 대비시키면서 인간사를 고찰한다. 세계는 다툼(datum)과 팍툼(factum)으로 이루어져있다. 다툼은 신으로부터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주어진 것이다. 팍툼은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다툼을 인간 삶에 맞도록 개선시키고 변형시킨 제반(諸般)의 문화와 문명 현상을 가리킨다. 작가는 다툼으로서의 자연에 순응하라는 동양적 가르침과 현란하게 변화되어 가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의 가르침 사이에서 고뇌한다. 작가는 최종적 진리는 물질과 정신성이 음양 한 짝으로 화합한 상태라고 믿고 있다.

박승진_지울 수 없다 not to rub out a mistake_HD_00:03:26_2013
이석_UNTITLED 1_벽화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 테이프_70×90cm_2012

기슬기는 '낯선 구석(Unfamiliar Corner)'이라는 불가사의한 사진 시리즈를 선보이면서 현상 자체에 대한 의미를 묻는다. 건축은 인간이 만든 가장 큰 물질 덩어리 중 하나일 것이다. 건축만큼 구조적이며 입체적이며 부피감 느껴지는 대상도 없다. 그러나 기슬기의 사진 속에서 이 건물과 건물 내부 공간들은 2차원처럼 평면화된다. 인간의 신체 역시 일부분만 촬영되어 3차원의 사실감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저기 있다'는 암시만 있을 뿐이다. 역시 인간의 사실성마저 암호화된다. 기슬기는 사실상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는 현상이 단지 환영일수도 있고 진정한 현실태는 단순한 정보나 평면일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훙크엉(Hung Keung)은 중국 윈난성 출신의 각광 받는 현대미술 작가이다. 작가는 아시아의 전통인 산수화의 의미를 현대화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작가는 본래 영국에서 수학하고 활동하던 전력이 있다. 여기서 모든 서구 현대미술의 정신과 방법론의 학습을 거쳤다. 그러나 차마고도(茶馬古道)에서 태어난 작가는 유년기에 느꼈던 산수의 본연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현대화시키고자 노력한다. 입체적으로 만든 산과 들과 강의 형상 조각들을 향해서 자유롭게 유영〮비행하는 카메라는 과거 아시아의 선조들이 산수로부터 느꼈을 환희의 순간을 체현시켜 준다.

장종완_great harvest_종이에 색연필_78×113cm_2010
타로 이즈미_Napoleon_단채널 영상_00:02:07_2009
훙크엉_Where to go Where to Come From_다채널 영상_00:02:00_2012

타로 이즈미(Taro Izumi)는 서구화된 일본에서 자랐지만 불교적 가르침을 예술에 적용시킨다. 모든 현상은 이미지이거나 정보이지만 이것은 단지 꿈이며 허무일 뿐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불교적 가르침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아니 이 진실마저 꿈으로 받아들인다. 외국 여행의 새롭고 들뜨는 감각은 실은 실체가 없는 허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실제로 가서 보았던 유럽 국가의 고색찬연한 청동조각과 건물, 교각의 실체가 이제는 기억 저편에서 물거품처럼 아련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작가는 모든 인간의 관계는 진정 이렇다고 말한다. ● 이석은 회화의 모더니즘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에 반기를 든다. 작가에 의하면 회화는 3차원을 2차원에 재현하는 것이 목표도 아니고, 회화의 본질을 묻는 그린버그의 여정도 아니다. 작가에 의하면 인간은 육안을 가졌다. 육안이란 카메라처럼 고정된 시점이 아니라 움직이면서 욕동하는 욕망의 감각 덩어리다. 회화는 육안이 느끼고 해석한 세계에 대한 이채로운 정보를(일단 세계가 육안과 후두엽과 전두엽을 거치면서 필터링되었기에) 숨결과 손이 흔들리면서 물질적 매체로 나타낸 '이중적 해석학(double hermeneutics)' 혹은 다층적 해석학(multiple layer hermeneutics)의 결과이다. 작가에 의하면 따라서 회화란 한 인간이 바라본 세계 해석을 또 엄청나게 많은 다른 해석들이 서로 교차하는 감각과 지성의 네트워크 장(場)이다. 이 네트워크 장에서 형성되는 공감과 감동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때 인간성과 인간의 가치가 회복된다는 것이 작가의 철학의 골격이다. ■ 이진명

Vol.20140112a | 상황 Situations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