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소리 하지마! 임마!

Don't give a damn, man!展   2014_0123_목요일_04:00pm~06:00pm

초대일시 / 2014_0123_목요일_04:00pm

참여작가 김건우_김수연_김현우_박지혜 박혜원_석정인_이지희_장해니 정소희_정화숙_홍사현_홍우중

기획 / 김월식_리경 후원 /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관람시간 / 04:00pm~06:00pm

대안예술공간 이포 ALTERNATIVE ART SPACE IPO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3가 58-77번지 붉은벽돌집 1층 Tel. +82.2.2631.7731

마이웨이 ● 상대방에게 화가 치밀어도 그 화를 참아보다가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나도 모르게 뱉는 말들이 있다. 육두문자를 사용하는 욕이 대부분의 경우이지만 욕이 아니더라도 그 내용의 면면은 절대로 상대방의 말이나 행위에 동조할 수 없음을 어필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상대가 나보다 손 윗사람인 경우에는 예의상 말을 돌려 가며 완곡한 표현으로 그 불만의 수위에 대하여 정중하게 이야기 한다. 그런데 실제로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이렇게 예의를 갖추고 반대나 사양 같은 자신의 의지를 표현해도 감정싸움 없이 그 대화를 마무리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이련 표현의 끝은 다시는 '당신과 상종하지 않겠다' 또는 '이판사판'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욱'한 기운을 동반한다. 그런데 사실 이 '욱'의 감정들은 절대로 한 번에 생성되는 즉자적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잠재되어 있던 불만들이 축적된 상태를 지나 포화 직전에 이르렀을 때 결국 참을 수 없는 '욱'이 폭발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욱'은 표현에 대한 자기 절제가 만들어 놓은 어쩔 수 없는 통로로 읽힌다. 그래서 한마디 하는 것이다. "헛소리 하지마! 임마!". 이제 말을 뱉었으니 그 온전한 책임은 내가 지고 가야 한다.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던 아니면 상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용서하든, 그것도 아니면 상대와 인연을 끊고 마이웨이를 가야한다. 어쩌면 이 마이웨이는 그토록 하기 어려웠던 본심을 선언처럼 낭독하고 홀연히 무림으로 떠나는 두려운 발걸음의 시작일 수 도 있다. 넓은 무림의 곳 곳에서 바람을 맞으며 혹독한 굶주림에 맞서며, 다른 고수를 만나 상처 받을 것이 뻔한 불안감에 대한 도전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시기가 왔으니 혹 자는 이것을 독립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 자는 이것을 용기라고도 부르고 또 어떤자는 이것을 객기라고도 부른다. 그 이유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마이웨이는 외롭고 고단한 행보임을 예측할 수 있다. 그래서 어른들은 무리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고 남들과 척지지 말고 웃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들으라는 충고를 해주는 것이다. 더불어 잘 살아야 행복하다는 따듯한 말에 고개가 끄덕여 지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인생이 어디 내 맘처럼 살아지겠는가? 결국 내 삶의 칼자루가 내 손에 쥐어졌을 때 누구나 선택의 기로에서 결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꼭 오는 법이다. 그래서 결국 '헛소리'를 명분 삼아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듣보잡 혹은 신화 ● "헛소리 하지마! 임마!"는 이렇게 칼을 휘두르는 선언이다. 이 선언이 전시인지 스크리닝인지 퍼포밍인지 그도 아니면 뭐라고 명명할 수 없는 작가적 태도를 매개하는 방식인지 그 누구도 규정할 수는 없다. 마이웨이기 때문이다. 흔하게 동시대의 다양한 프리젠테이션 방식 중 하나이거나 지금까지 보아오지 못했던 듣보잡의 방식일 수도 있다. 14명의 젊은 작가들이 저마다 하나의 칼을 차고 전방위적인 행보로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한 자리에 모여 출정식을 한다면 맞는 표현일까? 이 출정의 제의와 같은 상황이 무엇인지는 훗날 소문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신화처럼 부풀려 질 수도 있다. 그런 즐겁고 황당한 상상을 해 보면서 "헛소리 하지마! 임마"를 외쳐본다. 일본의 대표 철학자이자 인문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의는 그의 저서『예술인류학』에서 신화와 신화적 사고의 의미를 일반적 논리에는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비틀림'을 가진 특유의 논리로 이야기 한다. 이는 무시간적이며 모든 것을 명확히 분리하지 않는 '대칭성의 논리'와 , 모든 것을 이야기의 질서에 따라 배열하여 말할 수 있는 논리력의 결합체가 곧 신화라고 이야기 하는데 원초적 야생이 살아 있는 감성적 영역으로써의 '대칭성의 논리'와 합리적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비대칭성 논리'를 대등한 입장에서 바라보며 이 상반된 입장이 균형 감 있게 조화를 이루는 중요성으로 동시대의 역할을 주문한다. 때문에 신화가 갖고 있는 '비틀림'의 논리는 결국 동시대 예술계에서 감성의 회복, 감성의 번역, 새로운 프레임의 감성 공학적 실험으로 확장되며 그러한 의미에서 "헛소리 하지마! 임마!"는 전통적인 제의와 기복적 감성의 떨림에서부터 새로운 매체를 직관적으로 해석하며 그 기능을 해체하고, 불확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영토를 개척하는 탐험가의 심정으로 감성의 스펙트럼을 개간해야 한다. ● 그런데 이 감성의 스펙트럼은 이성의 바깥에서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영역을 투과해서 존재하기도 하며 스며들어 있기도 하고 입체적으로 병치되어 있기도 하여서 좀처럼 그 범주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이른바 감성의 장치들이 개입되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현되며 의도적으로 이성을 놓아 버리는 경우도 발행하고 추적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감성의 함정과 덫을 놓기도 하며, 작업의 수행과정에서 부조리함과 결합하여 감성의 길을 잃게도 만들고, 타임머신처럼 시 공간을 분절시켜 이성적 해석과 접근이 불가능한 초현실적 경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징후의 배후에는 예술 그 자체의 생태적으로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야생적 기질과 어떤 예술장르와도 사회적 사건과도 작가의 개별적 욕망과도 유연하게 교접할 수 있는 대범한 관계지향성향이 존재하고, 무엇보다도 학제적 의미와 개념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감성의 이끌림에 대한 인간 본연의 육감적 본능이 꿈틀대는 것 때문이 아닐까? 무림은 넓고 고수는 많다 ● 제도적 관성이라는 것이 있다. 특히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아카데미에서는 더욱 그렇다. 선생들은 익히 다듬고 정돈된 지식을 후학들에게 지도한다. 견고한 학문의 권위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 진리다. 당연히 그 진리를 의심해 볼 여지도 없다. 혹 깨어난 자, 천재성을 갖고 있는 누군가가 그 진리를 의심해보고 도전도 해보지만 소수의 목소리와 용기로는 늘 한계가 보이는 상처내기이다. 남겨진 자, 동 떨어져 있는 자들의 외로움과 불안함은 생각보다 크다. 그래서 소수적 삶을 사는 자들을 측은하게 동정하기도 하고 그 용기에 몰래 숨어서 박수를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소수의 발언들이 모여서 세상을 다양한 가치의 세계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잠재성에 동조하면서도 실제 그 소수적 삶을 살가갈 엄두를 못 내는 이유는 동정받고 싶지 않거나 용기가 부족해서 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술의 기나긴 역사는 결국 용기를 낸, 신념을 가진 소수의 목소리가 혁명을 이루어 내고, 그 아방한 기운이 사회를 바꾸었으며 새로운 목소리에 다시 자리를 내주었던 사실 말이다. 결국 횡으로 평평해진 동시대 예술계는 춘추전국시대의 무림처럼 아방한 개인들이 넓게 중원에서 자기 무술을 갈고 닦는 시대가 되었다. 제도적 관성을 허무는 것이 여전히 어렵게 보이지만 실제 무림에는 그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된 가치로 자기 작업을 갈고 닦는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것이 독립이든 객기이든 "헛소리 하지마! 임마!"를 뱉어버린 이 자리의 젊은 작가들에게 흔쾌히 박수를 보내며 믿고 격려할 수 있는 것이다. 자! 이제! 떠날 시간이다! 무림은 넓고 고수는 널려있다. ■ 김월식

Vol.20140123e | 헛소리 하지마! 임마! Don't give a damn, man!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