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산수 Neo-Sansu

2014_0211 ▶ 2014_0601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1부 2014_0211 ▶ 2014_0518 참여작가 / 권기수_김윤재_신경철_써니킴_안두진 이기봉_이세현_이주형_이혁준_임택_장종완_최수정_홍범 장소 / 2전시실_3전시실_선큰가든

2부 2014_0228 ▶ 2014_0601 참여작가 / 강소영릴릴_강운_공성훈_국형걸_권혁 김영헌_김준_백정기_손정은_송수영_이상원_이세경 이이남_임옥상_하루_홍성도_홍순명_황인기 장소 / 어미홀_1전시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대구미술관 DAEGUARTMUSEUM 대구시 수성구 미술관로 40(삼덕동 374번지) Tel. +82.53.790.3000 www.daeguartmuseum.org

네오산수, 우리 시대의 새로운 풍경화 ● 네오산수전은 과학기술의 시대(Post Internet시대)를 맞이하여 전통 산수화와 그 미학적 개념이 오늘날 우리의 현대미술과 함께 어떻게 현대적 어법으로 차용되고 변용되었는지, 그리고 만약 그 전통적 속성 까지도 잃어버렸다면 어떤 변화를 거듭하고 어떤 결과물을 제시하는지를 물으며, 우리 시대 새로운 미술의 의미를 모색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현재 다양한 미술 장르에서 활동하며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청년, 중견, 원로 작가 등 총 31명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 오늘날 '산수화' 또는 '풍경화'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너무나 순진한 나머지 진부한 주제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을 풍경, 인물, 정물화 등으로 분류한 장르의 서열 매기기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개념의 범주조차 의미 없어진지 오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시대의 새로운 풍경화, 즉 '네오산수'란 주제로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의도는 다시 한 번 더 우리 환경과 미술 개념의 급격한 변화를 확인하고, 예술의 유연성은 시간의 부식 작용에 저항 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행이 지난 진부한 주제라 하더라도 그 시대의 시각에 의해 재 포착 되었을 때에는 전혀 새로운 해석의 장이 된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는 우리 시대의 산수화가 의미하는 바와 회화, 사진, 입체, 설치, 필름 등 온갖 종류의 표현 장르들을 총 망라한 우리시대 예술의 장을 제시하고자 함이다.

권기수_Transience Landscape-bronz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73×130cm_2012 이기봉_지속되기 위하여_망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235×160cm_2012 ©Kibong Rhee, Courtesy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Seoul 홍범_Unseen_Used frames, glass, 4 projectors, prints on transperant film_가변크기_2014
신경철_re-form_패널에 아크릴채색, 연필_145.5×454.6cm_2014 써니킴_Line_리넨에 아크릴채색_111×134cm_2013
김윤재_그리운 금강산 연작 12_강화플라스틱에 혼합재료_38×47×14cm_2013 안두진_먹구름이 몰려오는 어느날_캔버스에 유채_97×131cm_2011

전통적 산수화, 풍경화 ● 서양에서 회화의 장르로서 풍경 또는 산수는 상대적으로 뒤늦은 시기에야 중요성을 획득한다. 즉 18세기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모토가 나오면서 원시적 풍경과 자연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서구의 고대 미술이나 고전주의 미술에 있어서 자연은 인간에게 종속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자연은 인간 생활의 배경으로 작용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을 그 자체로 재현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으며, 예술의 가치란 인간과 인간의 활동, 인간의 역사적 업적을 위대하게 장식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풍경, 특히 산수화가 예술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에서는 고대라고 할 수 있는 4세기경부터 산수화에 대한 미학적 이론이 탄생하였고, 자연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제안한다. 이어서 8세기에 이르러 산수화는 그 황금기를 맞이하고, 11세기에는 모든 회화 장르들 중 으뜸을 차지하였다. 이렇게 '산수'가 동양화의 주요한 주제로 자리 잡은 연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산수화가 동양인들의 세계관을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산수화는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예술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였다는 의미에서 그 중요성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오늘날의 예술과 비교해 보았을 때 동양의 산수화는 진정으로 예술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었으며, 오늘날처럼 예술의 종말이 미술사에서 논쟁의 중심이 되어 있을 때 예술 본연의 임무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전통 산수화의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 유불선으로 요약될 수 있는 동양적 세계관, 그 중에서도 산수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도교적 세계관 속에서는 세상이란 통일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은 서로 서로를 자극하고 호응한다. 이러한 통일된 세상의 개념 속에서 세상의 창조는 매우 활동적인 하나의 축을 따라 이뤄지는데, 이 축이란 모든 생명의 원리이며 규칙이기도 하고, 허상이나 피상들로 이뤄진 우주 속에서 유일한 실재이기도 하다. 이 절대적인 근원이면서 유일한 실체는 바로 '도(道)'이며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도(道)' 안에서 서로 맺어지지만 그 자체로는 무상하고,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 있다. 즉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할 때 공(空)이 바로 도(道)를 이르는 것이리라.

이세현_Between Red-162_리넨에 유채_200×300cm_2012 이주형_V.P.Series, Reflections #90_ Pigment print, Face Mounted on Plexiglass_110×182cm_2010
이혁준_Forest_Eden 19-2_콜라주에 바니싱_320×490cm_2011 임택_옮겨진 산수-몽유산수_폼보드, 한지, 플라스틱 피규어, 코튼_가변크기_2014
장종완_250Km_드로잉 애니메이션_00:11:44_2013 최수정_夢中夢_디지털 사진 콜라주, UV 프린트_137×264cm_2011

노자와 장자에 의해 피력된 이러한 도교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우주를 구성하는 일부이며 동시에 우주의 작은 복제품이다. 즉 인간과 우주는 서로 정확히 호응하는 두 기관이다. 인간과 우주를 동일하게 봄으로써, 세상은 단순한 대상이나 인간 삶의 배경으로 간주되는 것을 넘어서서 세상 역시 인간처럼 호흡하고, 인간 삶의 리듬을 부여받게 된다. 인간이라는 소우주와 우주 사이의 상응은 다시 인간의 정신세계와 물리적 세계 사이의 상응으로 이동되고, 현실의 각각 다른 차원들 속에서 인간의 경험적 직관은 거대한 유사적 이미지들의 그물을 짜게 만든다. 따라서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거대한 상징의 그물망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가 있으며, 동시에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되고, 인간은 이 상징의 숲을 탐사하면서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진리인 도(道)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른 자', 혹은 '각성한 자', 또는 보들레르나 랭보와 같은 유럽의 상징주의 시인들이 말하는 '견자'는 본래부터 주어진 상징의 숲을 꿰뚫고 '도(道)'를 깨우친 자를 이른다. 즉 시인이나 예술가의 역할이란 피상적인 모든 이미지를 넘어서서, 전체 속에서 사물들의 상호 관계를 결정한 이 불변의 원칙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양의 산수화는 그림 그리는 기술을 가진 장인의 작업이 아니라 도(道)를 추구하고 도(道)의 길에 이르기 위한 수행의 길이었다. 그러므로 도를 깨친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며 추구했던 것은 단순히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도의 품 안에서 조화에 이른 상징적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산수화 속에는 당연히 태극(太極)과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이론이 짙게 배여들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상응하고 상호적인 세계,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감각적 세계 속에서 '도'에 해당하는 태극은 음과 양의 무수한 변화의 결합을 통해 나타난다. ● 도교적 사상을 인간 사회 속으로 이전하였던 공자는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 한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설파한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仁者樂山)'은 차후 동양의 산수화가 발전할 결정적 지침이 된다. 음양으로 이뤄진 상징적 세계 속에서 물과 산에는 현인을 끌어당기는 비물질적인 힘이 들어 있다. 즉 산과 물은 그 매력적인 형태들을 통해 도라고 하는 원리를 사랑하게 한다. 자연에 감탄하는 현인은 관조와 명상을 통해 도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도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회화적 창조는 특별한 존엄성을 갖게 된다. 성인이 삼라만상에 대한 관조와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듯이, 그것들을 재현하는 예술적 창조 역시 도의 현시인 것이다. 붓과 먹으로 산수의 풍경을 존재하게 하는 화가는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연을 관조하면서 자신 속에서 원초적인 리듬을 느낀다. 그의 내부에서 숨 쉬는 정신에게 우주의 정신이 화답한다. 정신 또는 기라고 하는 것은 인간만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도처에 존재하고, 형태들 속에 거주하며,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인간과 접촉하면 전율한다. 예술가는 그 기를 느끼면서 사물의 원리와 규범인 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물의 내적 원리가 이미지들 속에 도입될 때라야 비로소 그것은 작품 속에서 작품을 구조화하는 원리로서 현재하게 된다. 동시에 인간의 정신은 형태들 속에 거주하는 정신과 호응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작품은 살아 있는 생명감으로 가득 넘친다. 결국 산수화가 재현하고자 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진경'으로서 눈앞의 산수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 낸 내적 원리인 '도'인 것이다. ● 인간의 영혼과 우주의 영혼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듯이, 물은 움직임을, 산은 정지를 환기한다. 흐르는 물과 정지된 산은 어느 한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인간을 대변한다. 이러한 내적 인간과 깊은 생명의 리듬을 따르는 세상 사이의 관계는 사회적 차원으로도 이동된다. 그리고 사회 속에서 이 음양의 조화는 정당한 위계질서의 존중과 연결된다. 고상한 하늘과 저열한 땅처럼, 군주와 신하는 각각의 자리에 고정되고, 높은 곳과 낮은 곳, 명예로운 자와 멸시받는 자는 각자에 맞는 지정된 서열을 지킨다. 화가가 풍경을 그릴 때에도 동일한 위계적 원칙에 따라 배치한다. 따라서 고전적인 재현의 질서 에 놓인 이미지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피라미드식의 엄정한 위계질서에 따라 배치된다. 이러한 위계질서야 말로 자유주의적 근대 예술가들이 타파하고자 하였던 회화의 제일 규범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전통 산수화 속에서 산과 물은 동등한 차원에서 전개되지 않는다. 풍경을 지배하는 높은 산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산은 위대한 군주처럼 그렇고 그런 구릉들과 경사면들, 숲과 계곡들을 지배한다. 세상을 통일된 하나의 전체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위계적 사유의 적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강소영릴릴_멈춰진 시간_벽에 오일 파스텔, 목탄, 콘테, 단채널 영상, 스테레오 사운드_ 480×1860cm, 약 00:05:00_2014 국형걸_Tectonic Landscape_플라스틱 파렛트_가변크기_2014
강운_공기와 꿈_캔버스에 한지_227×182cm_2013 공성훈_파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3×181.8cm_2012
권혁_Energyscap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실 스티치_65×91cm_2010 김영헌_Cloud Map-p1304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3

자연과 예술의 신비가 인위와 기술의 신비로 대체되다. ●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동양의 산수화는 자연으로의 회귀, 혹은 합일의 정신을 극히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공유한 회화의 규범이기조차 하였다. 수려한 산수의 풍경은 관람객의 이상향, 감정, 그리고 인간의 기상을 대변하였고, 인간 그 자체였으며,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예술적 안목이 높고 훌륭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호에서 세월을 낚는 강태공은 그 자체가 산하의 일부이며, 하염없이 흐르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웃는 농부는 대자연의 품속으로 금방이라도 녹아들어 갈 듯하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나 밀레의 풍경화 역시 다르지 않다. '풍경화'는 바로 이상적 자연과 인간의 상호 가치를 상승시켜주는 은유적 역할을 하였다. 자연 속에서 인간성을 발견하게 하는 그러므로 위대한 자연풍광을 배경으로 나폴레옹의 초상을 그리듯이 멋있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풍경은 배경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고, 종교적으로도 성스러운 신의 대리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환경과 인간은 일치되어 있었기에 진정 불가에서 말하는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조화로운 공존을 하였다. 또한 이상적 자연을 재현해 낸 예술가의 인품도 그 산수만큼 고상하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양의 모든 회화는 풍경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인물은 언제나 수려한 산수와 일체가 되어 있고, 그로부터 당장이라도 튀어 나올 듯이 그려진다. 그리고 인물만을 그리더라도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그려야 제대로 된 인물화라고 할 수 있었다. 산수화에 대비되는 풍속화조차도 자연과 합일된 인간의 삶을 그리고자 하였다. 수많은 예술 사조들이 서로 다름을 추구하였으나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이상적 합일에는 변함이 없었고, 다만 그 표현 방식이 약간씩 차이를 보일 뿐이었다. ● 그런데 이와 같은 '노장 사상'과 '루소적인 이상적 자연'이 갑자기 무너지게 된다. 말하자면 수 천 년을 이어온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과학기술과 지식이 발전하고,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아닌 스스로 주체이며 객체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자연을 더 이상 평화로운 공존의 관계 속에 놓아두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하나의 객관적 대상으로 차별화하기 시작하였고, 그와 함께 투자와 소비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제 자연은 인간과 동일한 대상,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품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객관적 대상, 투자의 대상이 된 것이다. 과학기술의 눈으로 본 인간과 자연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며, 최대의 이익을 끌어내야 할 소중한 자원이다. 효율성의 눈으로 본 자연은 더 이상 느낌을 전달하는 감성적 주체가 아니라, 차가운 이성적 관찰의 대상이다. 예술적 주체, 우리의 신비로운 경외의 대상으로서 예술적 상징의 이미지였던 '산수'는 차가운 기술 사회의 희생물로서, 잃어버린 천국, 이상향에 대한 증거물, 상처 받은 짐승의 신음 소리를 증언하는 역할로 추락하였다. 현대인은 더 이상 자연과 함께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새의 지저귐 대신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듣는다. 철새들의 느릿한 완행보다는 비행기와 고속전차의 빠른 흔적을 본다. 굳건히 서있는 변함없는 만년설과 빙하 대신 지구 온난화에 의한 절망적 사라짐을 본다. 자연은 이제 인간이 만든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은 유례없는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수려한 산수는 더 이상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태초의 자연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이 만든 인위적 자연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따라서 회화는 이상적 자연의 재현보다는 그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회화가 여전히 자연과 수려한 강산을 재현한다면 그것은 과거의 의미를 지닌 자연으로서가 아니라, 절망적 사라짐과 파괴를 표현하기 위한 무의미한 재현에 불과할 따름이다. 인간이 그렇게 제작하고, 인간이 그렇게 되도록 원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제 자연의 재현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네오산수는 그 절대적인 변형으로 우리 시대의 완벽하게 변질된, 절대적으로 새로운 네오회화를 증명한다.

김준_Instant Landscape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3 백정기_Is of : 설악산 #2_단풍잎, 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12
손정은_복락원_혼합재료_900×900×350cm_2014 송수영_캘리포니아 삼나무 숲에서 살았던 나무 - 연필로 그린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 _종이에 연필_21×29.7cm_2013
이상원_Climbers_캔버스에 유채_194×130cm_2007 이세경_Recollection_Dream Journey_타일, 기부된 머리카락, 나무 액자_50×37cm_2013

이번 전시는 네오산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세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해 보았다. 첫째, 현대 산수화는 더 이상 재현의 대상이 아닌 단순한 기술적 조작의 대상이 된다. 둘째, 현대 산수화에는 공통의 미학적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을 통해 작가와 관람객 사이에 존재했던 일체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예술이 기술 환경의 반영이라는 사실로부터, 오늘날의 산수화는 과거 산수화와 자연에 대한 일종의 유머, 조작, 조롱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의 산수화는 무의미한 기호와 이미지들로서 일종의 기호 조작자, 즉 기술자의 시스템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예 뭐 낭만주의의 숭고미나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죠. 자연을 그렇게 볼만큼 우리가 순진하지 않잖아요... 기본적으로 가짜 자연들이고 애초부터 제겐 조화로운 자연이란 개념은 없으니까요. 옛날 의미의 자연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후약)(공성훈)" 자연과 예술의 신비는 인위와 기술의 신비로 대체된 것이다. ● 이번 전시 초대작가들은 모두 31명이다. 과거의 수묵화가 검은 먹색으로 그려졌다면 이세현의 산수는 야간투시경이라는 최첨단 기술의 결과로 붉게 그린다. 음양의 이론에 따라 그려졌던 상징성을 띤 전통적 의미의 산수화에서 우리의 근현대사가 녹아있는 이데올로기적 산수화로 이전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김윤재는 인체와 풍광을 결합시켜 기괴한 초현실주의적 몽타주를 탄생시킨다. 그에게 산수화는 무의미한 유희에 불과한 듯 엉뚱하고 기이하다. 현대 미술에 대한 반성이 엿보인다. 이혁준은 우선 세계 곳곳의 숲, 정원, 화초 등의 이미지들을 포토샵을 이용해 재조합하고 이어서 프린트된 작품을 다시 한 번 더 인위적으로 조각내어 찢어 붙인 후 바니시를 칠해 최종적으로 작품을 완성시킨다. 이것은 일종의 구조주의적 발상으로서 각각의 이미지는 전체 속의 하나의 기호로서만 작용하여 그 자체로서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는 사라지고 전체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는다. 안두진의 융단을 짜듯 빈틈없이 꽉 짜여 진 회화는 작가가 발명한 이미지의 최소 단위 '이마쿼크'를 개념으로 구성된다. 회화를 과학적 탐사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며 1호 붓으로 기성제품의 물감을 혼합하지 않고 사용하며, 10회 이상 층위를 주어 축적과 조립의 방식으로 작품은 완성된다. 물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예술은 과학기술이야말로 현대인의 낭만적 세계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최수정의 포토샵을 이용해 기상천외하게 제작된 디지털 콜라주 사진은 김윤재와 이혁준의 작업과 유사한 방식을 취하며 수집되고 다시 지우거나 이어 붙여져 허구적 세계를 창조해 낸다. 근대 부르주아적 예술 개념에서는 예술은 무의미한 장식이고 유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최수정의 작품에서도 역시 깊은 의미를 지닌 자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산수는 순수한 상상적 유희를 가능케 한다. 무위자연, 즉 자연에 순응하며 그 섭리에 따르는 삶을 재해석하려 시도하는 임택의 '모형산수'는 산수가 현대 사회에 종속된 느낌을 주는 인위적 구성물로서 가장 전통적인 산수 이미지를 오늘날의 일상의 평범하고 가벼운 오브제들로 재현함으로써 과거 산수와 현대 기술 사이의 융합을 시도한다. 홍범의 다양한 크기로 구성된 수 십 개의 프레임은 벽에 걸리는 대신 천장에 매달려 사각의 공간에서 프로젝션이 회전하며 뿜어내는 다채로운 빛과 그 그림자놀이로 완성되며 개인의 기억과 상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이기봉의 풍경화는 실제의 자연과 가장 근사한 자연을 재현하는 듯하다. 그는 사진처럼 정교한 자연 풍경을 제시하면서, 때로는 플랙시글라스나 일상의 오브제들을 이용해 자신만의 독특하고 난해한 표현기술을 선보인다. 즉 기술이라는 생산과정을 통해 작품이 완성됨으로써 형태가 없는 기술에 미적 형태를 부여하여 예술의 사라짐으로부터 예술을 보호하고 지키고자 시도한다. 작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화 속 이미지들이나 이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백두산 천지와 인왕산 계곡 등을 재조합하는 써니 킴의 풍경화는 우리가 문화적으로 교육받은 이미지가 결국 어떤 사물의 이미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과거 그렇게도 항구적인 의미를 부여 받았던 산수 역시 현대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우리의 문화적 상대성 속에서만 형태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신경철은 자유분방한 전통 산수화의 강렬한 붓자국의 힘을 현대적 생산 기술의 유희로 재현한다. 즉 그만의 독특한 후반 세필작업으로 이뤄진 구성과 다시 지우기는 붓의 힘에 더해져 새로운 기술의 예술적 징표로 드러난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잔잔한 호수를 역광으로 찍은 이주형의 이미지들은 언뜻 모네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모네가 시간의 변화를 빠른 붓터치로 찍어내듯 그리며 인상주의적 풍경화를 완성시켰다면 이주형은 보다 더 기술적으로 색채와 음영을 변형, 조작, 강조하며 일련의 시리즈 작품을 제작한다. 작품은 독특한 촬영 기술에 의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기술이 예술인 샘이다. 권기수는 김홍도와 정선의 전통 산수화에서 출발하여 회화적, 일러스트적, 디자인적 요소와 애니마믹적 요소들 까지 우리시대의 모든 이미지적 요소들을 총 망라하며 예술의 유희적 개념에 충실함으로써 무거운 전통적 산수의 의미는 사라진다. 장종완의 풍경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작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다큐멘터리로서 우리들의 일상을 코믹하게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내가 만드는 천국은 각종 미디어에 떠돌아다니는 보편적 미의 기준에서 전 세계 으뜸가는 풍경과 사물의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을 배열, 배합, 뒤섞기 등을 통해 탄생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현대 정보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조지 오웰의 '빅 부라더'에 의해 항상 감시받고 있다는 섬뜩한 경구를 생각나게 한다.

이이남_박연폭포_LED TV 모니터_가변크기, 00:07:55_2011 하루_맛있는 산수_한지에 잉크, 채색_160×140cm_2013
임옥상_대한민국 헌법_혼합재료_450×1700cm_2014 홍성도_Tourist_플렉시글라스, 알루미늄, 사진_60×80cm_2005(2014)
홍순명_Sidescape_캔버스에 유채_480×2000cm(각 14×18cm, Approx. 1600pieces)_2004~13 황인기_오대리-금강_플라스틱 블럭_307×576cm_2014

공성훈의 거대한 캔버스에 마치 무대 배경을 위해 드라마틱하게 베껴놓은 듯한 푸른색 풍경화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낭만주의적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풍경화가 위대한 자연 앞에 선 가냘픈 인간의 명상적 풍경화라면, 공성훈은 낭만주의적 풍경화를 가장한 채 일상의 소소함이 스며든, 오히려 그 위대함을 조롱하듯 최대한 인위적으로 거칠게 그린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 상태의 거대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고 시뮬라크르로 제작된 자연이다. 김준의 하이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사운드 인스톨레이션 작품은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의 과거와 현재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소외된 자연과 그에 저항하고자 하는 자연의 깊은 순환의 원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전시장 안에서 밟아보는 흙의 감촉은 여전히 훈훈한 온기가 흐르는 자연의 감성을 촉발함으로써 지금은 잃어버린 자연과 인간이 하나였던 일체감을 상기시킨다. 이세경의 「리콜렉션」 시리즈는 무명의 참가자들이 각각 자신의 머리카락과 거기에 담긴 사적 이야기들로 구성된 프로젝트로서 모피로 찻잔과 접시를 만들었던 초현실주의 작가 메렛 오펜하임의 유명한 오브제를 연상시킨다. 동물의 털 대신 인간의 머리카락을 고수하는 이세경은 그 제공자들의 사연을 이번 작업들로 재현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속 풍경은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기보다는 각 개인의 사사로운 일상과 기억에 따른 유희적 자연이다. 권혁은 자연 속에 담긴 어떤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과거의 산수화 개념을 고수한다. 그렇지만 그가 재현한 자연은 현대 기술이 제공한 다양한 표현 수단을 통하여 자신의 상상 속의 자연이 재현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산수화는 모든 작가가 자신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함을 잘 보여준다. 서구문화의 영향에 대한 하루의 시각은 매우 비평적이다. 그는 동양화 전공자로서,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좀 더 역동적이며 따분하지 않은 우리시대 동양화를 연구한 결과 '음식 산수'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자연은 신성하고 깊은 의미를 내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환경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의 자연은 장식적이고 유희적이며 유머로 가득하다. 사진 속 사진, 이미지 속 이미지에 초점을 맞춘 홍성도의 '이미지 속 이미지', 또는 '작품 속 작품'은 이미 재현과 표현의 세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그는 동일한 대상의 사진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발췌해 다시 원 이미지 위에 겹쳐 몽타주 함으로써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단조로운 통일성과 정체성을 벗어나 역동적으로 거듭난다. 회화를 통해 자연과 일체가 되기를 원하고, 자연의 기를 포착하고자 하는 강운 역시 완벽하게 전통적인 자연관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극히 가볍고 상승하는 양(陽)의 기운을 담은 하늘을 재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의도는 상당부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관람객은 분명 하늘을 재현하는 그의 인스톨레이션 작품에서 시원하고 상쾌한 하늘의 품에 안긴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와 표현 방식을 통해 순수한 자연인 하늘도 시뮬라크르로 인위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강소영릴릴은 「멈춰진 시간」으로 북극해를 탐험한다. 그는 자연의 본성을 다시 찾아 나서기 위해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며 작업한다. 그러나 이번 북극해 역시 강대국들의 유전 사업 각축장이 되어버린 곳으로 인간에 의해 해체되고 변형된 대상일 따름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황폐한 모습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할지 모르는 영구불변의 거대 자연, 위대한 자연을 느끼고 찾아내려 시도한다. 김영헌은 현대인이 현실 속에서 보았거나 혹은 상상 속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여러 기법들을 사용하여 몽롱한 환상의 세계로 조합한다. 그에게서 전통 산수의 이미지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일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탄생한 새로운 산수는 현대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새로운 환경을 잘 보여준다. 손정은은 현대적 공산품들을 이용하여 전적으로 인위적인 자연 환경을 제작한다. 그가 재현한 자연환경은 겉모습만으로 본다면 자연보다 더욱 더 자연적인 환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교한 시뮬라크로 제작된 그의 산수를 통해 현재 우리의 환경이 전적으로 인위적인 기술 환경의 한 가운데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기술의 결과물이다. 백정기는 형태적 재현보다는 작품 제작 과정의 중요성과 이 과정 자체가 일종의 기술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Is of」 시리즈의 최종결과물은 사진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사진 속 실제 피사체로부터 추출한 색소를 잉크로 프린트한 것이다. 「Is of: Seoraksan」 (2012) 제작과정에서, 작가는 설악산의 단풍이미지를 실제 설악산의 노랗고 붉고 푸른 낙엽을 수집하고 각종 장치를 이용해 추출해낸 색소로 프린트했다. 이 사진이미지는 일반 기성잉크로 프린트된 것에 비해 색의 재현이 정확하지 못하고, 빛이나 산소에 노출되면 색이 바래진다. 이러한 점은 마치 단풍잎의 색이 바래지는 것과 같이 자연의 본질과 매우 닮아있다. 또한 이 이미지의 색은 작가가 의도한 색이 아니다. 즉, 단풍이 '스스로 그러한 색'을 스스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은 과거의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현재에도 존재하는 물질이라는 점이다. (중략) 다시 말해서 관객은 이 작품을 통해 단풍의 허구적 이미지가 아닌 실재 단풍의 일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송수영은 우리 일상에서 사용하는 산업화된 제품들을 보면서 그 일차적인 자연적 재료들을 상상하고 재현하고자 한다. 이렇게 진행된 작업 중 하나가 「캘리포니아 삼나무 숲에서 온 나무 - 연필」 작업이다. 이 작업은 연필의 원료인 나무의 원산지를 조사하고, 다시 거기서 자란 나무 연필로 그 지역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를 통해 책상 위에 놓인 연필에서 바다 건너 캘리포니아, 혹은 히말라야의 어느 숲에 살았던 거대한 나무를 상상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작가는 산업화된 자연을 풍자한다. 이상원은 여가 활동의 환경으로서 자연을 재현한다. 과거의 자연이 인간에게 호연지기를 기르고 자연과 하나가 되기 위한 수양의 장소였다면, 이상원이 본 현대의 자연은 여가와 오락의 장소인 것이다. 이렇게 자연은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길들여진 자연으로 바뀐다. 이이남은 동서양의 고전 명화를 차용해 영상으로 작업하며 과거와 정보화 시대의 예술의 차이점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여기서 예술은 고도의 정보 제작 기술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더 나아가서 예술은 생의 의미를 추구하고 상징하는 표현 수단이기 보다는 의미가 사라진 기술의 전시장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예술가는 이제 더 이상 생의 종교적, 철학적 의미를 전달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난해한 기술을 소유한 기술자라는 사실이다. 임옥상의 「대한민국 헌법」 작품은 일필휘지로 형태를 갖춘 수려한 산수 이미지와 대한민국 헌법 조문 및 유명 시인들의 시구들로 구성된다. 벽화 사이즈의 작품은 작가가 직접 그리고 쓴 작은 규모의 이미지를 확대하여 레이저 기술로 절단해 제작한 부조 형식의 작품이다. 산수는 전통적인 산수화의 모델을 따르지만 그 제작 과정은 최첨단 기술을 따른다. 일찍이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업장을 팩토리(공장)라고 명명하였다. 기술 시대의 예술이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거나 제작되는 물건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 예술작품은 일상적 소모품이거나, 장식품의 서열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 제작 과정 역시 레이저 커팅이라는 첨단 기술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해진다. 예술가는 단지 아이디어와 제품의 규격을 주문하고 제공할 따름이다. 황인기의 작업 역시 현대 과학기술 사회의 예술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보통 동서양의 고전적 명화의 이미지들을 차용해 디지털 픽셀로 전환한 후 레고 블록, 리벳, 실리콘, 인조 크리스탈 등 다양한 공산품을 이용하여 기술자들이 그렇게 하듯 작업 과정을 구성해 제작한다. 우리의 환경은 과학기술에 의해 지배받는 환경이다. 홍순명의 1400개 이상의 우편엽서 크기의 캔버스로 구성된, 일기 형식의 작품은 더 이상 자연의 풍경이라기보다는 인간에 의한 환경들이라 말할 수 있다. 즉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풍경들이 미디어로 재편집되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런 의미에서 정보 취급자들에 의해 조작되어 위험하게 제공된 환경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순간순간 단편적으로 제공되었다 다시 사라지는 이미지들로서 실재성과 연속성을 상실한 우리의 기억과도 같은 이미지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형걸은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참여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실험적 작업을 통해 건축의 새로운 가능성을 선보이는 건축가로 설치구조물에서부터 건축, 도시 관련 프로젝트까지 다양한 스케일에서 건축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특히, 그의 작업은 장소적 특성과 공간적 특성을 극대화하여 새로운 건축적 공간을 연출해내는 장소기반(Site-specific)의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공간의 연출을 위해 빛과 소리, 공간과 재료의 물성을 통해 새로운 건축적 요소를 발견하고 활용해내는 특징을 갖는다. 더 나아가, 디지털 알고리즘과 수학적 기하학에 기반 한 그의 건축 디자인 과정은 과학과 예술 사이의 융합이 낳은 진보적 결과물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 대구미술관

Vol.20140211i | 네오산수 Neo-Sansu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