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크네의 계보: 경계-스케이프

이원경展 / LEEWONKYOUNG / 李元京 / installation   2014_0212 ▶ 2014_0218

이원경_Flying_알루미늄, 와이어_가변크기, 200×250×10cm×18_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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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21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여성의 공간과 여성의 욕망 사이-생성1. 아라크네의 계보 자기보다 바느질을 잘하는 여자는 세상에 없다는 자만에 도취되어 여신 아테네의 화를 자초한 아라크네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수치심'에 자살한다. 여신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소생시키지만 단 평생 거꾸로 매달려 실을 뽑는 거미의 '노동'이 아라크네의 여생이다. 거미-아라크네의 계보는 식물이나 짐승의 털에서 실을 잣고 바느질을 하고 자수를 놓는 여성들의 삶이자 문화이자 운명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령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네로페는 남편이 집을 떠나 세계를 유랑하는 동안 구혼자들의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으로 뜨개질을 시작한다. 집의 주인인 남편을 기다리는 것 외엔 집에 머문 아내가 '할' 일은 없다. 그녀는 아내의 자리에서 뜨개질을 하며 정부(征夫)에 대한 정절을 지키고 오디세우스는 오랜 정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동화 『백조왕자』의 엘리제 공주는 계모의 저주로 백조로 변한 11명의 오빠들을 위해 침묵 속에 11벌의 쐐기풀 옷을 짠다. 공주가 피를 흘리며 짠 옷을 입고 오빠들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고 저주는 풀린다. 파스칼 레네의 소설 『레이스 뜨는 여자』의 여주인공 뽐므, 자신의 욕망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여자이고 늘 버림받는 여자인 뽐므는 정신병원에서 들어가서도 레이스를 뜬다. ● 여자들은 떠나지 않는다. 여자들은 집과 가족과 국가의 소유권을 증명하기 위해 뜨개질을 하며 머무른다. 그것이 전쟁, 살육, 경쟁에서 이기고 영토를 소유하게 된 남성들의 재산의 일부, 반(半)-사물인 여성의 일이다. 유랑과 모험, 고행은 남성의 몫이고 여성은 떠나거나 추방당한 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한 자리에서 시간의 무늬를 짓는다. 현모양처, 정절, 희생, 기다림과 같은 '전통' 사회의 여성적 미덕을 떠안으면서 여성들은 그늘 속 정물처럼 정지한 채 바늘과 실을 쥔다. 그들은 집처럼, 사물처럼, 물건처럼 움직이지 않는 '제' 자리에 쳐박힌다. 여자들은 욕망이 결여된, 텅 빈 자리이다. 어머니, 아내, 누이와 같은 가정 내 여성의 역할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의 '자기'를 위한 장소가 집에는 없다. 가정의 여성-역할과 여성-욕망의 어긋남. 무성적(無性的) 존재인 어머니-아내가 따듯했다면, 여성으로서의 그녀의 감정이나 욕망 혹은 자의식의 동요는 이미 항상 누수되었던 것이리라. 베티 프리던(Betty Friedan)은 일찍이 『여성의 신비, 1963』에서 집안의 천사들이 떠안은 문제를 "이름 없는 문제(problem that has no name)"라고 불렀다. 즉 여성에게 전혀 만족스러운 삶이 아닌데도 여성들이 어머니나 아내(와 같은 역할)를 동경하는 데 깔린 문제는 60년대 이전에는 문제로 불리지 못했고 그저 남성-주인의 관점에서 미화되고 정당화되었을 뿐이다. 이름을 갖지 못한 문제, 가시화되지 못한 문제, 문제 아닌 문제. 노라처럼 집 밖으로 나가는 여자들, 자기 욕망에 이름을 부여하려한 여성들과 함께 서서히 들리고 보이기 시작한 문제. 2. 부엌- 여성 공간 ● 푸성귀를 다듬고 데치고 다지고 버무리고 식탁에 올리고 밖에서 돌아온 가족들의 식사를 마련하고 설거지를 하는 일상. 어머니-아내, 주부는 주로 부엌에서 산다. 그녀들은 한 끼이건 세끼이건 식사를 마련하는 일과 함께 부엌에 갇힌다. 부엌은 주부의 기쁨과 고통의 현장이다. 충분히 좋은 엄마나 주부가 아니라는 자기검열, 부적합이나 불충분에 대한 불안은 집안의 천사들의 고통이다. "이름 없는 문제"는 모성애 이데올로기가 더 강화되어버린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렇다. 부엌은 가정의 사랑과 평화의 출발지이고 양육과 보살핌의 영역이고 동시에 불안과 학대의 장소이다. 여성은 다른 이들의 삶을 위해 자신을 부정하는 중에 좋은 어머니, 아내로 추앙받는다. 베티 프리던의 분석처럼 가정 밖으로 나왔던 (중산층) 여성들은 자아실현의 딜레마에 부딪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공적인 영역으로의 진출은 남성적 욕망의 문제일 뿐, 여성의 욕망은 공적인 장소에서 역시 억압될 뿐이라는 자각과 맞물린 사실이다. 여성이 다시 모성애, 집안의 천사와 화해해야 했던 것이 백인 중산층 여성들의 경험이었고, 여성과 가정의 '재'접합은 그 만큼 여성 욕망이 이름붙이기 어려운 '타자성'의 영역임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어디로 가도 집이 나오는 악몽 혹은 기적 혹은 진리. ● 그러므로 다시 집 안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여성성, 모성애, 헌신, 희생, 수동성과 등치되는 여성 공간 안에서 어떤 균열, 차이, 긴장이 일어나는지를 보는 임무를 떠안아야 한다. ● 이원경 작가가 직접 제작한 갈고리로 알루미늄 와이어를 뜨개질해서 만든 형상들에는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모호성, 긴장, 힘이 깃들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집 부엌에서 늘 마주치는 푸성귀, 야채 혹은 나물로 분류될 식물을 소재로 작업한다. 콩나물, 양파, 감자처럼 냉장고 안이나 검은 봉지 안 혹은 부엌 한 켠 야채박스에 담겨있는 식물들. 작가는 특히 야채를 다듬을 때 버려지는 부분들에 주목한다. 웃자란 콩나물 뿌리, 제때 사용되지 않아서 실뿌리나 줄기에 잠식당한 채 반은 썩어있는 양파, 싹이 난 감자는 무용(無用)하다. 주지하다시피 예술은 무용한 것들에, 무용한 가치들에 깃들기 마련이다. 예술은 오래도록 무용의 유용을 증언하는 오랜 임무를 맡고 있다. 솜씨 좋은 부엌의 전문가들은 눈길한번 주지 않고 잘라낼 '부분'들에서 작가는 '자기'를 본다. 기실 사용과 용도, 역할과 고정된 기표로 환원되지 않는 나머지, 잔여에는 항상 어떤 가능성, 힘이 있기 마련이고 사회적으로 무용한 예술의 유용성은 바로 그 나머지를 의미화하고 확장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주부로서의 역할과 예술가로서의 자의식 사이에 존재하면서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기 직전의 야채(의 일부)와 자기를 동일시한다. 수챗구멍에서 자라는 콩, 제 몸통을 먹고 뿌리와 줄기를 늘리는 구근식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계속 자라고 성장하는 무의미한 부분들에 집중하면서, 작가는 자신의 욕망, 집안을 떠도는 자신의 자의식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무용성, 과잉, 변칙, 생성은 적합, 안온, 평온을 찢고 솟아나는 욕망과 충동을 위한 언어이고 은유이다. 제 자리, 제 역할, 제 가치를 어긋낸 존재들만이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삶을, 생을, 존재를 긍정하고 보존한다. 그러므로 작가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선택한 대상들의 사소함과 그 대상들의 '상태'의 기괴함은 예술적이고 동시에 윤리적이다. ● 끝끝내 억압되지도 소멸되지도 죽지도 않은 채 기어이 제 존재와 삶을 알리는 '부분'들, 삶들, 욕망들. 작가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자신과 동일시하고, 자신의 예술의 피사체로 포착한 것들. 작가는 거기에서 자신의 좋은 어머니-아내 역할에도 불구하고 삐져나온, 계속 자라는 기이한 존재들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식물이기에 유약하고 온화하고 무력하지만, 동시에 끈질기게 살아남아 자신의 타자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어떤 의미작용에도 환원되지 않으면서 거기에 있다. ● 물론 충분히 좋은 인간들이 겪는, 자기-욕망으로부터의 소외는 비단 어머니-아내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역할이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라는 점에서 모든 인간의 운명이고 고통이다. 그러나 무엇을 걸고, 또 무엇에 기대어서, 자신의 소외와 억압된 욕망을 외면할 것인지, 혹은 기어이 실재화하려고 할 것인지는 개인의 무능이거나 개인의 결단일 것이다. 작가는 그곳에서 외롭게 불안하게 집중하면서 자신의 내적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그것은 그녀가 그곳에 함몰되는 대신 '타자'로서 생존하려고 자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역할과 존재의 사이에서. 3. 사이존재 - 생성의 삶 ● 작가의 실은 와이어이고 코바늘은 갈고리이다. 작가의 뜨개질은 항구에서 그물을 깁는 어부들처럼 힘센 팔뚝의 힘이 요구되는 고되고 힘찬 노동이다. 작가는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은 식물의 부분들, 특히 뿌리가 다리로 바뀐 생명체들, 유기체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쌍떡잎의 콩과식물은 뒤집혀진 채 공중에 걸려 새, 곤충, 가오리처럼 보이도록 설치된다. 뿌리와 줄기가 웃자란 양파는 해저를 헤엄치는 원생동물이나 외계에서 온 생물 같고, 다리가 달렸고 곤충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꼭 어떤 곤충이나 연체동물을 닮은 것도 아니다. 기실 어긋난 것들이나 어긋내려는 것들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떠다니는 것들의 삶의 방식이고 그것들은 그 자체로 욕망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움직임, 탈출, 탈주의 이미지를 부여받는다. 작가의 식물의 뿌리는 절지동물의 다리로 변형되고 그것들은 구석으로, 구멍으로, 틈으로 사라지려는 '무형(informel)'의, 전-형태(pre-form)의 모습으로 출현한다. 경계, 사이존재들, 웃자라면서 삐져나온 것들은 욕망의 집요함이 가시화되는 방식이고 형상들이다. ● 알루미늄 와이어의 성질로 인해 작가의 설치작품들은 가볍고 부유하는 듯 한 느낌을 발산한다. 그것들은 부드럽고 연약한 느낌으로 공중에 매달려 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만지면 부서질 듯 아슬아슬하다. 따라서 그로테스크한 형상과 유약한 존재감이 결합됨으로 인해 오브제들은 위반적이고 위협적이기 보다는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구석이나 그늘진 곳 혹은 귀퉁이에서 잊혀진 채 웃자라 있던 식물들은 날개나 다리를 얻고 사라지거나 어딘가로 숨어들어갈 것 같다. 동시에 내부를 갖고 견고한 '자기성'을 유지할 수 있는 유기체보다는 막 변태를 끝낸 동물의 껍질처럼 가볍고 덧없어 보이는 물성으로 인해 작가의 탈주에의 욕망은 그리 강렬한 느낌을 동반하지 않는다. 식물과 동물, 뿌리와 다리의 접합을 통해 등장한 이 사이존재들은 자신의 모순과 분열과 소외의 상태를 의식하면서도 어떤 결단을 내리길 유보한 작가의 상태를 드러내는 알리바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많은 여성들은 여성의 일을 긍정하면서 더 가정 내 여성성으로 돌진했고, 많은 여성들은 여성의 일의 소외를 지적하면서 여성성을 지우려고 했다. 작가는 바로 그 사이에서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일상을 씨실과 날실 삼아 유기체들을 만들고 있다. 그녀는 집이 곧 작업실인 조건과 한계, 좋은 주부여야 한다는 강박과 자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작가적 욕망 사이에서 작업을 진행 중이다. ● 일상의 사소함과 무의미를 헤집고 그 안에서 변칙적인 것, 어긋난 것, 생성의 힘을 발견하는 태도나 에토스는 여성 작가의 강점이자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고백적이면서 동시에 여성들의 공통의 문화에 대한 증언일 이러한 작가의 작업은 예술이 일상과 분리된 채 자신의 관념적 무용성을 실재화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일상으로 통합되어 현실에 '뿌리내릴' 기회를 예시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2009년 이후의 뜨개질 작업은 그녀의 뜨개질 기술이 좀 더 민첩해지고 노련해질수록, 그녀의 욕망이 좀 더 대담해질수록, 그녀의 생명체들이 그녀의 의도를 더 위반하게 될수록 더 강렬해지거나 섬세해지거나 위태로워질 것이다. 4. 아라크네를 위하여 ● 아라크네는 교만했고, 사후에나 여신으로부터 벌이자 관용인 삶을 다시 얻는다. 스스로를 낮추고 남을 돋보여야할 여성의 자세를 잊었기에 그녀는 거미로 추락했다. 교만은 공동체 사회를 위협하는 악이다. 어둡고 축축한 곳을 찾아 그물을 거는 거미에게서 그러나 우리는 욕망의 무한성, 기괴함을 발견하곤 한다. 거미는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대한 '마망'처럼 광장을 장악하거나, 몸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액'을 이미지화한 키키 스미스의 비체(abject)들에서 여성의 욕망을 구현하는 근원 상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교만한 아라크네, 수치심으로 자살한 아라크네, 여신과의 배틀에서 승리한 아라크네는 비로소 여성 작가들의 손을 거치며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원경 작가의 뜨개질은 어딘가로 가고 있거나 가려고 하는 욕망의 움직임, 부엌을 뒤흔드는 이질적인 힘을 드러내는 중에 여성적 공간에 여성의 욕망을 불러들이고 있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가는 것은 생성의 본질에 속한다." 작가는 사이에서, 생성을 위해 갈고리를 쉬임없이 움직인다. ■ 양효실

Vol.20140212h | 이원경展 / LEEWONKYOUNG / 李元京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