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SAW PLAY

이상준_오원영_양정화_노해율展   2014_0307 ▶ 2014_0330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4_0307_금요일_06:00pm

기획 / 김재도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월요일 휴관

즈스위 갤러리 JE SUIS GALLERY 서울 강남구 신사동 588-1번지 Luminous B1 Tel. 070.4685.7029 www.jesuis-gallery.com

누구나 어린 시절 동네 놀이터에서 시소를 타며 놀았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형태와 같은 놀이터 기구로서의 시소(seesaw)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18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니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단순한 움직임의 원리로 즐거움을 주어 온 놀이인 것 이다. 놀이기구 '시소'는 서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명칭까지 그대로 들여와 영어 명칭은 우리말 시소의 음가와 동일한 seesaw이다. 이는 시소가 올라오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SEE) 다시 내려가면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고 또 그 다음 번엔 보였던(SAW) 것이 또 보인다는 어원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놀이기구 시소는 한글로 '시소'라고 쓰여 있을 때 보다 'seesaw'로 쓰여 있을 때 보다 유의미하게 놀이의 특성을 드러내고, 중의적으로 언어 유희적 성격을 드러낸다는 것이 흥미롭다. ● 시소놀이는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필요하고 널빤지 양 끝에 앉을 사람 또는 사람들의 몸무게의 균형이 '어느 정도' 맞아야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모호하기 짝이 없는 표현인 '어느 정도'라는 것인데, 양 끝의 무게가 큰 차이를 보이면 무거운 쪽으로 단번에 기울어 더 이상 널빤지 양끝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 즉 놀이가 불가능해지고, 둘의 무게가 완벽하게 일치한다면 시소의 널빤지는 공중에서 지면과 평행을 이루며 고정되어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이는 놀이를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완벽한 균형의 상태이다. 다시 말해 시소놀이(seesaw play)의 기본 조건은 절대적인 균형을 이룰 만큼 동일하지도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질 만큼의 차이가 나는 무게도 아닌 다소간의 격차를 보이는 양 끝의 무게 차이이다. 바로 이 무게의 차이가 시소의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지속하게 하며, 이렇게 움직임이 지속될 때 '즐거운' 놀이가 된다.

SEESAW PLAY展_즈스위 갤러리_2014
SEESAW PLAY展_즈스위 갤러리_2014
SEESAW PLAY展_즈스위 갤러리_2014

여기『SEESAW PLAY』展에 각자의 작품 세계 속에서 일종의 시소놀이를 하고 있는 네 명의 작가들이 있다. 이상준, 오원영, 양정화, 노해율 4명의 작가 각각의 작품들과 4명의 작가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SEESAW PLAY』展 전체는 시소놀이에 비유될 수 있다. 이들 모두 오르고 내려오며 보고 보았던 것을 또 다시 보기를 반복하며 자기 안의 불균형으로 인한 움직임과 흔들림의 상태를 놀이로 즐긴다. 그 놀이의 '즐거움'이라는 것이 놀이터의 시소놀이처럼 절대적 '즐거움' 만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들은 이러한 불균형의 놀이 중에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양쪽 무게의 일치와 결함 없는 조화로 인한 균형, 그 균형이 유지된 정지의 상태, 즉 안정과 평화와 완벽의 상태를 갈망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원한다 해도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잘 있으며, 실상 그런 완벽의 상태를 때로는 두려워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완벽의 상태는 놀이의 끝, 즉 작가 또는 작품으로서의 의미의 끝을 뜻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상준_너_종이, 캔버스에 색연필, 고무찰흙_가변설치_2014
이상준_So... Love You..._디지털 영상_00:11:04_2014

이상준의 최근 작업에서 눈의 띄는 형상은 새이다. 그는 조형의 최소 단위를 상정하고 그것들을 배열하고 배치하는 것을 반복수행하는 작업 방식을 취하고는 하는데 근작에서 새는 이러한 최소 단위의 역할을 한다. 새는 2013년『REGAIN』展에서 등장했는데,『REGAIN』展은 2009년『Paradise Lost』와 짝패를 이룬다.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는 여정이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과거에 소유한 적이 있거나 존재한 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므로 소유와 박탈, 되찾음 간의 왕래와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본인이 잃은 대상을 찾아 헤메인다기 보다는 과연 잃은 것은 무엇인지, 되찾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진정으로 되찾고 싶은지에 대해 사유하는 듯 보인다. 본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너」는 새, 소녀그림, 비디오 영상으로 구성된 설치작업이다. 전시장 벽면에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배치된 새들은 운명과 인연의 실타래를 연상시키는 빨간 실로 연결되어 있어, 날지 못하고 꼼짝없이 실에 묶인 채 벽에 붙어있다. 새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 날개도 없는 불완전한 새다. 실에서 풀려난 들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한다. 새들의 배치 중간 중간 아직 앳된 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녀들의 이미지가 놓이고 비디오 작업 속 여인은 "난 네가 너무 좋아"를 연발한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백치미를 풍기는 앳된 소녀들과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관능적인 여인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마치 성녀와 마녀, 어머니와 여자를 오가는 치명적인 여인(femme fatal)의 양측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날기를 원하는 동시에 날아오르기를 두려워하는 어리고 작은 새, 여리고 약해서 보호받기를 거절 못하는 어린 소녀와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성숙한 여인으로의 성장 사이에서 작가는 부유한다.

오원영_바람의 신화_알루미늄 호일_400×300×300cm_2011
오원영_Lost children_혼합재료_55×22×18cm_2011 오원영_Double Black_레진에 크롬_43×35×130cm_2011
오원영_Double Blue_레진에 크롬_130×43×35cm_2013 오원영_Salvation_브론즈_26×8×9cm_2013

맹수의 옷을 입은 어린 아이 형상과 가면, 동물 등이 어우러진 mise en scène이 특징인 오원영의 작품은 어린 아이로 대변되는 순수성, 미성숙함과 맹수의 폭력성을 동시에 드러내어 언뜻 지나치기 쉬운 둘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아이와 맹수 이 둘은 작가 자아의 분신이다. 그러나 이미 성인이 된 작가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은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타자임에 다름없다. 그리고 작가가 유년기에 접했던 이야기 속 맹수의 폭력성은 단지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이제 성인이 된 작가와 다른 성인들은 물론 순진무구해 보이는 아이들에게서 또한 발견할 수 있는 자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때의 폭력성은 타인을 상처주고 해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마치 천국이나 이상향에 대한 갈망처럼 아이의 순수성으로의 회귀를 호소하지 않으며, 폭력성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성인으로서는 불가피한 방편이라며 방치하지도 않고, 버려야할 인간성의 이면으로 치부하여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 최초의 발견의 순간 흠칫 놀랐을 수도 있는 인간 자아의 양가적인 면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양쪽을 오가는 자신과 타인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폭로하는 방식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이 둘의 구분 이전의 상태를 욕망한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욕망은 성취될 수 없는 욕망이기에 아이와 맹수는 시소 널빤지 양끝처럼 기울어졌다 다시 올라오기를 반복할 뿐이다.

양정화_Dress up_종이에 목탄_430×112cm_2014
양정화_Untitled_벽에 목탄_60×60cm_2014

인간의 육체와 동물의 형상이 경계를 구분할 수 없게 뒤엉켜있는 듯 한 이미지를 선보여온 양정화는 인간과 동물, 미(美)와 추(醜), 정상과 비정상, 안정과 불안정, 과거 기억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사이를 오가며 이 둘을 병치하거나 중첩시켜 각각의 의미를 혼재된 것으로 모호하게 만든다. 이때 작가에게 외상의 기억은 주요한 모티브가 되는데, 기억하고 있는지 조차 잊고 있던 외상의 흔적은 그것이 발생한 시점과는 상관없이 파편화 되어 현실로 튀어 올라 작품으로 분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발, 손 등 전체에서 잘려 나온 신체의 말단 부분을 석고로 뜬 오브제 작업과 전시장 천정에서 바닥까지 늘어지는 긴 롤지에 그린 드로잉을 선보인다. 이번 작업 역시 그의 작품에서 자주 마주했던 털이 부각되는데, 인간에 있어 털은 아주 미묘하고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 풍성하고 빛나는 머리털, 눈썹은 살아있는 인간에 붙어있을 때는 아름다움의 기준이자 상징이 되어 찬양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원래 있던 곳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을 뒹굴면 보기 지저분한 쓰레기가 되기도 하고 흉측하고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또한 머리카락과 눈썹, 수염을 제외한 인간의 체모는 드러내기 부끄러운 것인 만큼 은밀하며 때로는 제거되어야할 대상이 된다. 털은 인간보다는 동물의 특성에 가까워 털의 부각은 인간에 내재한 동물성의 부각이며 이 둘 사이의 공존과 오고감을 말한다.

노해율_Wheel-01_알루미늄, 스틸, 선풍기_60×60×15cm×3_2014

움직이는 조각 소위 키네틱 아트로 불리는 작업을 보여주는 노해율은 정지와 움직임 사이를 오간다. 움직임이라는 것은 정지의 상태를 전제하기 때문에 구별되며 움직임으로서의 의미를 얻는다. 정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움직임이 시작되고, 움직임은 에너지의 충전상태, 정지는 소진의 상태이다. 소진은 에너지 충전의 상태를 갈망하고 충만한 에너지는 소진될 때까지 동작을 그치지 않는다. 그는 움직임의 동력으로 전기를 사용하거나 관람객과 작품의 신체적 접촉을 통한 일시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데, 이번 전시작에서는 전기를 사용하여 관람객의 움직임과는 독립적이다. 굴렁쇠를 연상시키는 세 개의 둥근 고리는 그 형태로 인해 구르는 동작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하게 하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깨진다. 전시장 바닥 고정되어 전기동력을 받아 각각 좌우로 움직여 형태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기대를 거부하며 낯설음을 조장한다. 자연스러움과 인공성의 공존과 배반이다. 세 개의 고리의 움직임은 독립적이면서도 셋 사이의 조화를 꾀한다. 그는 이러한 기계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사물의 물리적 움직임은 물론 내적 감정의 움직임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가시적인 움직임을 통한 비가시적인 움직임의 드러냄은 작품 소재의 차가움과 짙은 물성과의 병치를 통해 단순한 기계적인 움직임의 향유를 넘은 감성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 시소의 균형이 완전히 깨지거나 완벽한 균형의 상태에 들면 놀이가 끝이 나는 것처럼 이들네 명의 작가는 앞으로도 계속 아래위로 움직이며 균형이 맞지 않는 것들을 찾아내 보고(see) 이미 보았고(saw) 잊혀졌던 것들을 다시 끌어내고, 균형을 맞추어 보았다가는 다시 차이를 드러내고, 폭로했다가는 숨기기도 하는 것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반복만이 놀이가 중단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지속적인 시소 플레이를 통해 네 명의 작가는 작업의 동력을 계속 얻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 김재도

Vol.20140310f | SEESAW PLAY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