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두 개의 시선

서용인_고민지 2인展   2014_0312 ▶︎ 2014_0322 / 주말 휴관

서용인_초월하는 것들A(노출의 특이성)_캔버스에 유채_91×72.7cm×15_2013

초대일시 / 2014_031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 휴관

아트스페이스 휴 Art Space Hue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68 성지문화사 3층 302호 Tel. +82.31.955.1595 www.artspacehue.com

이 전시는 아트스페이스 휴 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간의 교류를 위해 기획되었다. 서로 다른 작업세계를 가진 작가들을 하나의 주제를 통해 바라보는 일은 차이의 마주침이란 점에서 신선한 시도가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유는 역설적 의미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의 문제는 보이는 것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전시에 참여한 고민지, 서용인 두 작가는 일상의 흔적과 존재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대답하고 있다. ● 고민지에게 일상은 자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는 거울이다. 시간 속에서 축적되고 자신의 기억 속에서 망각된 것들이 물리적 흔적으로 남는 곳이다.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잃어버린(망각된) 흔적들을 포착하는 순간들은 작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는 순간들이다. 그것들은 주변에 있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발견된 것들이다. 그러한 우연은 자신의 일상과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그것은 개인적 경험이며 각성이다. 우리의 일상은 우연보다는 필연적이기만 하다. 그러한 필연적 질서가 남긴 것들을 작가는 우연을 통해서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들 속에서 우연의 의미를 사유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무심코 지나쳤거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을 통해 작가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기를 이야기한다. 이번 전시에서 전시되는 작업들은 작가가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가면서 발생하게 된 사물들이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작업에 사용되어지는 물질들에 대한 작가의 성찰에서 비롯되고 있다. 계란요리를 하고 남은 계란 껍질을 수집하거나 성냥을 사용하여 타버리고 남은 성냥개비들 그리고 원두커피를 내리고 남은 커피 찌거기 등이 그것이다. 그렇게 수집된 사물들은 작가의 삶으로부터 축적되고 몸을 유지하기 위해 먹었던 증거이자 사실들이다. 그것들은 2차적 의미들로 포장되어지거나 예술품이 되기 위해 가공된 것들이 아니다. 이 사물들은 전시장에 전시되면서도 뒤샹의 변기작업처럼 어떠한 상징적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작가는 그것들이 어떤 특정한 의도로 제시되는 것을 거부한다. 사물 그 자체로 남아있기를 요구하고 있다. 작가는 그 사물들 속에서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것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쉽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 서용인은 하나의 사물을 동일한 거리에서 반복적으로 감각 한다. 이러한 반복되는 감각의 차이들을 통해서 작가는 지속하는 것들의 보이지 않는 운동성을 포착하려 한다. 그렇게 포착된 형태들은 규칙적인 방향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형태는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필연적이고도 동시에 우연으로 규결되어지는 동시성 속에 머문다. 그렇게 포착된 흔적들은 현상의 증거가 되어 존재에 대한 사유를 불러온다. 사유가 머무는 지점은 작업의 형식이 이루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즉 작가에게 사유는 형식이며 형식은 사유가 된다. 작가는 이러한 형식으로부터 존재가 이루는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사유하면서 그것을 오늘날 우리들의 삶 속에서 이해하려한다.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의 일상을 지루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반복됨은 필연을 그리고 그러한 반복됨으로부터 발생하는 차이는 우연이다. 또한 이것은 구조로써 질서이자 사건으로써 차이를 의미하고 있다. 작가는 자본주의사회가 조작된 환영적 차이를 통해 평등을 이루려고 하는 사회이자 환영 속에 머무는 무기력한 구조라 생각하며 그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지루한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본주의사회를 극복하기위해 필연적 우연성인 참된 차이를 발견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참된 차이란 차이를 이루고 반복되지만 결코 새로움이라는 환영적 가치로 조작되지 않는 것들이라고 강조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지루한 것은 자본의 필연적 구조 속에 있으면서 새로움이라는 환영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환영이라는 새로움을 극복하는 것 그리하여 필연적 우연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작품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작가의 의지이다.

서용인_초월하는 것들B(노출의 특이성)_캔버스에 유채_91×72cm_2013

자본주의는 차이를 통해 평등을 이루려는 사회이다. 사회를 이루는 개체들의 차이의 경쟁적 실천은 궁극적으로 자본의 평등성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한다. 즉 경쟁을 통해 평등을 이루게 되는 논리구조인 것이다. 이렇게 이룩된 평등의 가치는 결과적으로 지루함을 가져왔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의 차이는 거짓 차이들을 형성한다. 그것은 다만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환영들이며 실존적 차이를 발생시키지 않는 차이들이다. 그러므로 경쟁을 통해서 이룩된 평등의 가치는 공허함 속에 빠지게 된다. 내가 가진 500원짜리 동전의 가치는 자본가들의 500원짜리 동전의 가치와 일치한다. 자본의 화폐가치의 평등성은 모든 지루함의 근원적 논리이다. 이러한 지루함의 일상 속에서 우리가 아무리 자신의 특별함을 주장하여도 동일한 가치로부터의 획일적 가치를 부여받게 된다. 우리의 존재의 실체적 의미는 차이 없이 돈의 가치로 전락된다. 우리의 일상이 자본이 만든 구조 속에 녹아버린 것이다. 그 구조 속에서 진정한 차이는 없다. 돈의 차이가 가능한 모든 차이를 소멸시킨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차이 없는 가치평등사회에서 오히려 차이의 환영을 강조하면서 이 가치평등사회를 존속시킨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차이 없음이 환영의 차이, 실재하지 않는 욕망의 차이가치를 만들어 실체적 차이를 멸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지루함이고 거짓됨이다. 자연의 구조와 자본주의의 구조는 표면상으로는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살펴보면 이 두 구조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연의 구조가 실재라면 자본주의의 구조는 환영이다. 이 두 구조는 표면상으로는 같은 패턴의 필연성 속에 있는 평행구조이지만 그 구조가 만드는 차이는 서로 다른 차원 속에 머문다. 내가 바라보고자 하는 차이는 실존적 의미구조 속의 차이들이다. 이것은 차이의 방향에서 평등의 구조를 바라보려는 나의 의지이다. 참된 차이의 가치를 실천하는 것 더 나아가 그러한 차이를 통해 환영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그 시작은 예술행위를 통해 감각의 차이를 실천하고 그러한 실천이 나의 의지를 이루어나가게 함으로서 그러한 의지가 환영 속에 머무는 나의 육신을 되찾고 투명하게 하여 나의 실체가 포장되지 않은 나의 일상과 마주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참된 차이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예술의 가치가 자본의 가치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의 가치를 획득한 작품은 가치가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인간적 가치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모든 우리의 일상이 자본의 기준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어 버리는 사회, 그 속에서 우리의 개체적 차이는 무기력하고 지루함 속에 함몰되어 버린다. 이 끔찍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가치기준이 아닌 참된 차이를 갈망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를 넘어 생존의 문제일 것이다. 나에게 예술은 단 하루라도 나로써 존재하며 그러한 자본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다. 나는 생각한다. 자본 종주국 미국, 영국 등의 주요 상위 1%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그것을 운영하는 자본가들 그리고 그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미술시장을 조직하고 조작하는 1%로의 딜러들의 손에 종속되어버린 미술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끌려 다닐 것인가! 언제까지 이 지루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반복할 것인가! 예술의 가치가 돈으로 평가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 자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회복하는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 서용인

고민지_201310-201401_계란 껍질, 아크릴 파이프_5×100×5cm_2014
고민지_201310-201401_계란 껍질, 아크릴 파이프_5×100×5cm_2014_부분

지금 우리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예술이란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시대를 지속하며 변화하고 있는 예술이란 단어의 의미, 작품 활동에 대하여, 그리고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의미들에 대한 의문들, 부여된 의미의 유무와 함께 동반하는 실용의 유무. 이것은 작품을 감상하거나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질문이 아닐 것이다. 시대가 변화하여 우리들의 예술은 지금에 당도하였다. 많은 근본적인 의미들이 퇴색하였고 시대의 흐름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의미들로 대체 되었다. 이것은 부정의 견해도, 비판도 아니다. 나는 현 시점에서 나 자신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과 불확신에 대하여 마주하고자 한다. 이 때에 작업이란 어떠한 측면에서이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의 답을 구하려는 움직임이다. 모든 것이 상품 가치로 환산 되어버리는 소비사회에서 사물이라는 말은 곧 상품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작품과 그를 만드는 행위 자체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작품이라는 사물에 대한 한계와 유효성에 대하여 접근하는 길이기도 하다. 많은 초점들이 상품성에 근접하여 있고 이에 따른 가치를 기준으로 생산적인 활동과 비생산적인 활동으로 구분되어지는 현 사회에서 예술 활동이란 비생산적인 활동에 가까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는 '내가 지금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에 끊임없이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작품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신을 반복하여 이루어내는 산물들이며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생활, 즉 먹고 사는 것에 더욱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우리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제한된 작업환경에 마주하게 되었다. 삶을 초월한 다른 곳에 관심을 두기 힘든 환경이 조성 되었고, 이렇듯 비옥하지 못한 상황에서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 예술을 찾는 것, 작업 자체를 삶을 지속해나가는 방법이나 수단으로 삼는 예술들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좁아진 작업 반경을 모토로 내부, 즉 나 자신으로의 관찰로 이야기의 방향을 옮기려 한다. 작품에서 무엇을 피하지도, 숨기지도 않고 일상의 사건, 사물들을 늘여놓거나 다시 조합하는 일들은 아직 많은 예술품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의미보다도 진실 되며 퇴색될 염려가 없는 본질 그대로의 것을 표방하고자 한다. 일상을 예술로 끌어오고 예술을 삶 자체로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방식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과 예술 사이를 오가거나 혹은 그 둘을 꿰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자본주의 사회에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논리에 종속되어 결정되어 지지 않는 작가의 존재, 작가의 정체성에 갖는 불안에 대한 대답 중 가장 실용적이고 솔직한 답이 될 것이다. ■ 고민지

Vol.20140312e |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두 개의 시선-서용인_고민지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