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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선 블로그_blog.naver.com/seungsun78
초대일시 / 2014_0418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주말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아트포럼 뉴게이트 ARTFORUM NEWGATE 서울 종로구 대명1길 16-7(명륜4가 66-3번지) Tel. +82.2.517.9013 www.forumnewgate.co.kr
최승선 근작에 대한 비평 - 기억으로 빚은 지각이미지와 기억이미지, 시공에 깃든 존재와 부재의 증명 ● 1. 경험된 기억은 존재와 부재의 개념을 온전히 봉합하지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시공 속에서 자유롭게 개폐되며 씨줄날줄처럼 얽히고설켜 틈을 조성한 채 인간 존재의 변화가 그 존재를 둘러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한 주체가 변화된 환경에 처했을 때 의식의 지속성은 유효한지에 대한 '증명'의 가늠자가 된다. 물론 경험된 기억은 삶의 다양성만큼이나 색깔을 달리하기 마련이고, 순응적 혹은 파행적 위치에서 새로운 지점을 생성한다. 그건 때로 (작가 최승선의 말처럼)"내재된 기억과 속도, 현실에 부적응한 계층들"을 잉태하거나 "현실과 기억 사이에 존재하는 좁은 틈으로 도피와 배열이 무한한, 시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양태의 길을 트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기억하는 기억'과 '기억하는 망각'으로 재생되거나 소실되려는 습성을 지닌다.
실제로 기억과 연관된 인간 존재와 부재를 미술에서 찾지 않는다면 이는 결례다.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가 발언했던 것처럼 하나의 정지된 상(狀)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존재론적 죽음을 내재하고 있다. 즉, 어떤 도상에는 필연적으로 주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그때 거기(과거)'에 있었으나 '지금 여기(현재)'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증언은 앙리 베르그손의 주장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창조적 진화』에서 "예술가는 기억으로부터 이미지 형태로 현실화되어 현재의 지각 이미지에 섞고, 삶에 주의하는 현실적 의식(이미지 기억)은 무의식적인 과거(순수 기억)와 현재의 표상(지각 이미지와 섞이는 기억 이미지)사이를 역동적으로 연계하면서 적절한 조형언어를 생산해 왔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정신의 일부를 차지하는 경험적 기억을 존/부재의 전치로 삼았고, 사회에서의 현상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로 예술을 선택하곤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집적된 고통에 대한 기억으로서의 예술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미화되든 진실이다 싶든.
2. 최승선의 작업은 공간성과 시간성을 넘나든다. '공간'이 지닌 유무형의 개념을 관통하고 기억 속에 안착된 공간 내부에 뿌리 내린 특정한 상황과 연계된 이야기, 그로부터 비롯된 메시지를 시간의 선 위에 담아내고 있다. 이를 한마디로 축약하면 귀환회로적이다. 이 부분은 2000년대 후반의 여러 작업들에서는 물론 배경과 아리따운 소녀의 상치를 통해 대단히 은유적이며 심리적으로 접근한 근작인「붉은 망토의 소녀」(2014)나「들불」(2014),「원더랜드」(2013), 각각의 어린 소녀가 등장하는 에서처럼 인식 가능한 형상과 배경, 행간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목도 가능하다. 다만 그의 연작들에서 주의할 것은 작화적 시점에서 전개되는 공간과 시간의 재구성에 관한 유념이다. 작가의 조율에 의한 시공의 재조립은 근본적으로 잠재적 무의식을 텃밭으로 실타래 같은 기억을 더듬는 것에서 시작되며, 이미지의 재배열과 재해석을 통해 이뤄진다. 이어 현재로의 호명 아래 과거의 시공이 출연하고 그 표면에 시간의 기표들을 얹히는 구조다. 그렇기에 인물과 폐광풍경, 무언가 헛헛하게 부재한 장면 등이 그리드 되는 그의 그림들은 단순한 재현이 아닌 집단적 기억에서 이탈한, 작가만의 시선에서 초현실주의적 언어를 차용해 조합된 일종의 복원의 재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기억의 이정표를 하나 둘 세워나가는 양상을 내보인다.
이러한 조형방식은 지난 2009년「온실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유년시절의 기억인 폐광지의 풍경에 "이질적인 환경으로부터 무감각한 본성, 혹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 때문에 기억과 의식 사이를 배회하는 초상"을 담았다. 민머리의 파란색 인물은 그 초상을 대리하는 장치이자 (작품「도피처」(2009)와「파놉티콘」(2008),「공모자들」(2009),「접경지대」(2008)에서 엿보이듯)정지된 기억, 순간의 지연에 순응하는 현대인의 자폐적, 비저항적 단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어떤 그림이든 그건 단지 기억을 재생 시킬 뿐 사건 그 자체는 되지 못한다. 변하지 않는 사실에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때문에 기억의 회로를 확장시켜 두려운 낯설음에 공감토록 하고 머물러 남겨지도록 하는 것이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일 수 있다. ● 이에 2011년 세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인 주제『그림자놀이-환영의 껍질들(Shells of Illusion)』은 차원이 다른 세계(층위의 공간)가 일체를 형성하는 형국을 내보이면서 타자들에게 익숙하지만 또 다른 층위의 감성을 제공하는 작품들로 채워진다. 여기서 2009년 이후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각적 구심점이자 동시에 심행의 구동체로 자리한다.
흥미롭게도 이 당시부터는 사회적, 현실적 개입의 조타이면서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탈현실이라는 두 차원을 연결 짓는 실질적 고리인 공간(자폐 공간)이 본격적으로 언어화 되고 있다. 시공의 배열에 의한 '차이'(안과 밖, 방임과 응시 등의 다의적 관점)의 증좌를 드러내며 시간이라는 줄기에 매달린 기억의 서사, 미시에서 거시로의 전이, 현세에서 돌아보는 의미와 무의미 등이 보다 명징하게 이입되어 있다. 일례로 사북이라는 지역에 대한 문제의식을 내포한「잃어버린 것」(2011),「비밀」(2010),「발견」(2010),「284-2번지」를 비롯해 작은 그림을 일종의 오브제 형식으로 집체화 해 개발의 이면을 정면으로 목도한「움직이는 도시」(2009) 등이 대표적이다. ● 이러한 경향은 2012년 서초동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아주 가까운 기억'이라는 제목의 전시와 한전아트센터 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에서도 드러난다. 2013년 1월 강원랜드 호텔 페스타에서 펼쳐진 '상실, 우연한 초대'전에서도 동일하다. 이 전시들은 작가노트에 기술한 것처럼 시간의 흐름과 정지, 해체와 조립의 과정에서 도출되는 다양한 함의를 새롭게 의미화 된 공간에 이식한 기억이 자리 잡고 있다. 나아가 무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시공의 내연을 구조와 속도, 간극 등을 포함한 '존재증명'과 '부재증명'을 시각화시키고 있다. 폐공장부지에 전경들이 서 있고 그 앞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의「아나키스트」(2012)에서 드러나듯 그건 작가에겐 하나의 예술적 동인이자 관찰의 결과이겠지만 본질은 변화된 환경, 낯섦, 정체성 등으로 이어지는 주체적 시선, 기억 회로를 따라 형성된 진솔한 기록의 고랑, 경험적 기억을 관통함으로써 기억을 불멸로 만드는 삶의 계승적 가치를 지정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여백은 별이 총총하게 뜬 밤하늘을 우수로 담은 2014년 작「별 헤는 밤」으로도 이어진다.
3. 현대사회는 가파른 파고를 넘나들며 거칠게 혹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모든 것이 과거완 다르고 그 속도도 지난날의 기준을 무색케 한다. 개발이라는 담보된 변경은 인간의 적응력과 사고 전환의 가능성을 빌미 삼아 그것의 생각대로 인간을 변형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인간화를 지향하는 건 아니었다. 어떤 공간에 발을 디디고 사는 사람들의 존재 양식과 연관된 거시적 차원의 밑그림도 소홀하기 일쑤였다. 그저 개발을 옹호하는 이들의 중요하고 위험한 망상 중 하나인 모든 것을 대리하는 '선', 그 도구로써의 위치만 강조될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들은 브르디외가 언급한 "기본원습에 충실한 채 분류적 틀과 궁극적 가치 면에서 계승수단을 견고히 가리킨다." 기억의 원류를 파헤칠수록 공간과 인간은 오히려 현대사회의 변화 속도에 무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깨달으며 향수, 과거를 기반으로 왜곡된 공간의 절대성에 대해 갈증 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최승선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거름망에 걸린 특정한 무의식적 선택의 결과물이지만 망각이라는 기억의 밤에 둘러싸인 채 진리를 찾아가는 우리들의 잃어버린 여정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생성된 공간이지만 현실로부터 유보된 도피 공간이고, 그 언저리에 분열적으로 존재하는 인물들은 작가를 넘어 현대인의 자화상의 다른 말이라 해도 그르지 않다.
그의 작업들은 기억을 원점으로 떠나간 것들, 어제의 시공과 오늘의 시공 간 간극에 따른 여운은 결과적으로 이는 '안'과 '겉'의 문제에서 '안'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겉'을 유도하고, '겉'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참다운 '안'을 읽게 한다. 특히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를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있음을 읽는 건 그의 그림이 지닌 특징이다. 그러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체념의 흔적들이 묻어나면서도 때로 자신의 의미를 재해석해줄 언어를 기다리듯 낯설고 불완전하다. 생성과 파괴, 성장과 퇴행 역시 공존한다. 이런 점에서 최승선의 작업은 공적 기록이든, 사적 회상이든 모두 '기억의 사회적 생산'의 형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예술은 기억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제도화된 형식이고, 최승선의 작품들은 선택과 해석의 과정을 거친 자전적 기억을 텃밭으로 한 시대적 맥락을 훑도록 한다는 의미다. ■ 홍경한
Vol.20140418c | 최승선展 / CHOISEUNGSUN / 崔乘善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