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간 間

이윤진展 / LEEYOONJEAN / 李侖珍 / photography   2014_0417 ▶︎ 2014_0518 / 월요일 휴관

이윤진_Urbanscape Nr.41_Chromogenic color print_185×152cm_201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현대 본관 GALLERY HYUNDAI 서울 종로구 삼청로 8(사간동 122번지) Tel. +82.2.2287.3591 www.galleryhyundai.com

이윤진의 사진을 보다가 궁금해졌다. 우리의 도시를 누가 저렇게 디자인했을까. 또 궁금해졌다. 우리의 자연을 누가 저렇게 디자인했을까. 우리의 시골집은 누가 저렇게 디자인했을까. 저것들을 저렇게 보는 우리의 눈은 누가 저렇게 디자인했을까. 이윤진의 사진시선은 분명히 디자인의 문제에 꽂혀 있다. 예전에 독일의 실내를 찍은 사진은 분명히 독일의 디자인은 어쩌면 저렇게 한국과 다를까하는 질문이 나오게 했다. 독일식 의자와 테이블과 물병과 선반은 분명히 독일 것이란 참 유별나게 특이하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것은 사물과 표상을 다르게 배치하는 관습의 감각이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날짜를 16. 05. 2014 하는 식으로 표기한다. 한국 뿐 아니라 미국식 날짜 표기에 익숙한 사람에게 이 표기는 참 뜬금없어 보인다. 이 세상에 16월도 있나? 이를 한국식으로 풀어서 쓰면 2014년 5월 16일이다. 미국식은 5. 16. 2014이다. 이런 식의 독일식 유별남이 예전의 가구사진을 삼투하고 있었다. 그런 점을 강조하는 것이 사진의 핵심은 아니었지만, 눈에 띄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윤진의 실내사진은 독일에서 찍히고 독일에서 만들어진 만큼의 특성이 있었다. ● 이번에 찍은 다양한 실외풍경 사진이 다 우리 눈에 익숙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낯선 것일 수도 있다. 독일 사람이 이 사진을 보면 한국에서는 왜 건물을 저렇게 짓고 나무는 저런 식으로 가꾸며 도로는 저런 식으로 뽑아내느냐고 물을 것이다. 전에 어떤 프랑스 사람들이 왜 한국 사람들은 000 하냐고 물었듯이 말이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우리의 풍경을 구성하는 문화적 기후에 둔감해졌다는 뜻이다. 낮 최고기온이 영하 30도인 곳에서 오래 살면 영하 0도가 아주 따뜻하게 느껴지듯이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쉽게 동일시하는 풍경 속에 살면서 우리와 풍경을 동일한 것으로 인식해 왔다. 그래서 우리의 풍경이 편한 거다. 그러나 마냥 편하면 버릇이 나빠진다. 우리는 풍경을 함부로 대해 왔다. 심하게 동일시하다 보니 격의가 없어진 탓이다. 가장 친한 사람일수록 잘 해줘야 한다. 가장 좋은 음식을 먹여줘야 하고 가장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 친하다고 막 대하면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편한 풍경에 대해 잘 대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는 환경을 보호하자는 식의 얘기가 아니다. 풍경을 보는 우리의 눈의 버르장머리에 대한 얘기다. ● 저 익숙함이 우리를 화석으로 만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 우리는 언젠가 저 익숙함에 빠져 죽을 것이다. 이윤진의 풍경사진은 지겨운 익숙함에 대한 차분한 반발이다. 어차피 크게 소리 지른다고 저 익숙함이 사라지거나 갑자기 다르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시선과 거리를 둬야 다르게 보이는데 그런 득도, 혹은 눈이 떠지는 순간이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이윤진의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발터 벤야민은 '건강한 소격효과'라는 말을 쓴 적이 있다. 그것은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죽는 장면을 보고 질질 짜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옷에 묻은 피의 색깔이 좀 옅고 총 맞아 넘어질 때 팔의 자세가 어색하다고 냉정하게 보는 태도이다. 그런 태도를 건강하다고 본 이유는 풍경과 거리를 두는 차가운 태도 속에서 마음의 피부가 단련되어 감기가 잘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냉수마찰을 하면 감기가 안 걸리듯이 말이다. 이윤진의 사진을 통해 우리의 시선에 냉수마찰을 해주면 우리도 감기가 걸리지 않고 풍경과 건강한 거리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이윤진_Urbanscape Nr.32_Chromogenic color print_188×152cm_2010

다시 디자인 얘기로 돌아가서 또 물어보자. 저 익숙한 풍경을 누가 디자인했을까? 당연히 우리 눈이다. 설사 어떤 디자이너가 잘 디자인 해놨어도 우리 눈이 익숙하게 만들어내는 그 과정이 없으면 익숙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은 대체 어떤 작용을 하길래 풍경을 디자인하고 그러나? 눈은 받아들이기만 하는 감각기관은 아니다. 눈은 생각도 하고 표현도 한다. 눈에는 뇌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해석하여 처리한다. 보는 것과 해석하여 데이터로 만들어 처리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다고 뇌가 일방적으로 눈에게 '지금 본 것은 00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 라고 시키지는 않는다. 눈에게도 줏대는 있다. 그래서 자기가 받아들인 시각 자료를 뇌에다 공급하고는 데이터를 바꿀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틀렸다. 뇌가 아는 지식의 양 만큼 눈에 보일 정도로 뇌가 일방적으로 눈에 시키는 것이 아니라, 눈은 레이더가 되어 뇌에 데이터를 공급한다. 그러면 뇌는 지금 본 알 수 없는 저게 뭐냐고 계속 궁금해한다. 그러면 눈은 또 데이터를 주며 저게 뭔지 모르냐고, 잘 생각해 보라고, 저번에 본 것과 비슷하지만 이러이러하게 다르지 않으냐고 계속 재촉한다. 그러면 뇌는 그런가 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눈과 뇌는 서로 각축하며 데이터를 쌓아가고 어떤 것은 지운다. ● 디자인은 이런 과정 속에서 익숙해진다. 즉 익숙한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설사 어떤 뛰어난 디자이너가 가로경관을 멋지게 디자인했더라도 눈이 익숙하게 봐주지 않으면 소용없다. 하지만 이런 익숙함이란 몸과 마음이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눈 위에 '익숙함'이란 흐릿한 꺼풀이 씌워지는 것일 수도 있다. 이윤진은 카메라로 그 꺼풀을 벗기려 한다. 그러면서 다시 묻는다. 이게 누가 디자인한 거냐고. 한홍택인가, 김수근인가, 민철홍인가 하고 이름을 뒤지고 있으면 바보다. 카메라가 묻는 것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익숙한 이 풍경을 뒤로 물러서서 다시 보라는 요구였다. ● 이윤진 사진에서 도시의 풍경은 자연의 풍경과 비슷해 보인다. 왜냐면 같은 사람이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항상 같은 뻔한 눈으로 훑고 다니니까 같아 보이는 것이다. 사실은 우리 속에 디자이너가 여러 명 있다. 어머니는 된장찌개 디자이너였고 이불 홑청 디자이너였으며 장독대 디자이너였다. 그분의 자손인 우리도 여러 디자이너다. 우리는 지하철 노선을 디자인하고 하루의 일정을 디자인하고 자기 컴퓨터의 바탕화면을 디자인한다. 물론 썼다 지웠다 한다. 그 각각의 디자인은 마치 여러 명이 한 것처럼 나뉘어 있다. 즉 분열되어 있어서 다른 영역에 다른 디자인 원리가 적용된다. 스케줄은 깔끔하게, 그러나 컴퓨터는 지저분하게. 그 여러 명의 디자이너가 마치 잠자리의 겹눈 같은 눈을 하고 도시와 자연풍경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시선을 디자인한다. 이윤진은 카메라를 부려서 그 시선들을 기록한다. 그러니 겉보기에 그녀의 사진에 나오는 풍경들은 다 똑같아 보인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여러 명의 디자이너가 한 화면을 헤집고 다닌 흔적이 보인다. 그게 이윤진 사진의 매력이다. 독일의 실내를 찍은 사진에서는 독일 것을 보는 한국의 눈이 주제였다면 이번 사진에서는 농촌을 보는 도시의 눈, 혹은 도시를 보는 농촌의 눈, 빌딩을 보는 기와집의 눈, 숲을 보는 콘크리트의 눈 등으로 눈들이 세분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사진을 보려면 그 세분화를 따라갈 만큼 눈이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 도시건 자연이건 한국의 풍경에는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살짝 어긋나는 것이 있다. 마치 디자인 자아가 완벽했다가도 순간적으로 번개를 맞아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뇌에 침투한 것처럼, 꼭 풍경에 금을 내는 어떤 것이 있다. 그런데 이 금은 두부를 만들 때 넣어주는 간수처럼 풍경을 이미지로 만들어 준다. 이윤진 사진을 스탁 사진과 비교해보면 이 말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스탁 사진이란 돈 받고 빌려주는 사진이다. 이 사진들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기 때문에 두루뭉술하며, 특정한 내용에 치우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산'이라고 검색하면 이 세상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산의 이미지가 나와야지, 에베레스트 남서벽이나 설악산 공룡능선 같이 특정한 산의 이미지가 나오면 안 된다. 그리고 스탁 사진의 구도와 색깔은 항상 보편적이어야 한다.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상현상과 광선조건에서 찍은 사진은 스탁 사진으로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스탁 사진은 아무런 흠도 없는 완벽한 사진이다. 거기서 찾은 산의 사진을 달력에 쓸 수도 있고 광고에 쓸 수도 있기 때문에 어디에 넣어도 요리가 되도록 맛이 특정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 되는 것이다.

이윤진_Urbanscape Nr.11_Chromogenic color print_171×140cm_2013

이윤진 사진은 그 반대다. 매우 치우쳐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을 앵글에서 풍경을 본다. 예전의 실내 사진도 그렇다. 테이블을 찍은 시선의 높이가 딱 허리 바로 아래 높이라서, 그 높이로 보려면 쭈그려 앉아야 하는데 높이가 하도 애매해서 좀 오래 그렇게 하고 있으면 허리부터 정강이, 발목이 다 아파지는 높이다. 그래서 그런 특이한 공간감을 가진 사진이 나왔다. 이번의 바깥 풍경도 그런 어정쩡한 곳에서 묘한 앵글로 찍으니 도시의 빈 곳들이 보인다. 즉 디자인하다 만 곳들이다. 그게 바로 이 사진을 볼 만 하게 만들어주는 살짝 어긋남이다. 작은 얼룩 때문에 그림 전체가 망치게 되지만 결국 그 얼룩이 그림의 의미가 되는 그런 얼룩들이 사진 여기저기에 있다. 그것은 때로는 아름다운 호숫가 풍경을 흉하게 가르고 지나가는 전깃줄이기도 하고, 때로는 비슷해 보이는 두 쌍둥이 빌딩이 색깔이 살짝 다른 것이며, 때로는 아름다운 마을을 휘돌아 감싸고 흐르는 강 위에 난데없이 쳐들어온 전등이다. 어떤 때는 카메라의 앵글 자체가 얼룩인 경우도 있다. 카메라를 집에다 바싹 들이대면 이런 얼룩들은 더 많이 눈에 띈다. 아예 집 전체가 얼룩인 경우도 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디자인이다. 모두가 합심해서 디자인했는데 누구의 것도 아닌 디자인이다. 왜냐면 잘 해보려고 시작했는데 중간에 잘 안 돼서 다들 빈정상해서 떠나버리고 누구도 자기가 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디자인은 디자인이다. 카메라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것이라도 없었다면 우리는 그게 당연한 풍경이라고 받아들이고 살았을 것이다. 따라서 적절한 타이밍에 디자인의 얼룩들에 카메라를 들이댄 이윤진의 공로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우리의 도시를 누가 디자인했을까? 우리의 자연을 누가 저렇게 디자인했을까? 우리의 시골집은 누가 디자인했을까? 이 물음들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우리는 결국 누가 디자인 했을까?"이다. 답은 간단하다. 카메라가 디자인 했다. 왜냐면 카메라를 통해 비로소 그런 경관들을 보게 되니까 말이다. 못 보게 가려놓은 것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면 그 카메라는 누구의 것인가? 이 답도 간단하다.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다 같이 그 카메라가 만든 사진을 보고 있으므로. 즉 카메라가 만들어낸 시선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그런데 요즘의 카메라들은 결국 풍경을 소비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요즘 쌀에 온갖 브랜드가 있듯이 풍경에도 브랜드들이 있다. 어디에는 지중해 마을이 있고 전국 각지에 '무슨 무슨 길'들이 있어서 패턴화된 상품들이 풍경 행세를 하고 있다. 아마 많은 지자체들이 자기들의 풍경에 브랜드를 붙이는 작업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이윤진의 사진은 소비품으로 만들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리가 풍경을 대할 때 지나치게 익숙해지고 쉽게 동일시하는 끈을 끊어놓고 거리를 두어, 어떤 소비의 프레임에도 가둘 수 없는 것이 그의 사진이다. 만일 디자인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팔리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라면 이윤진의 사진은 디자인된 어떤 것이 아니다. 설사 우리의 집들과 경관들이 디자인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디자인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보게 만드는 것이 그의 사진의 조용한 힘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것을 볼 때 항상 디자인된 프레임 안에 넣어놓고 보기 때문에 이윤진의 사진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저 풍경 안에 들어가 살 수 있을까? 저기에 집을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보면 답이 안 나오는 사진들이다. '모두가 합심해서 디자인했는데 누구의 것도 아닌 디자인'에 들어 있는 시선의 분열이 그녀의 사진 속에 빛나고 있다. ■ 이영준

Vol.20140421a | 이윤진展 / LEEYOONJEAN / 李侖珍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