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 사운드트랙 Original Soundtrack

장유정展 / CHANGYUJUNG / 張有廷 / photography   2014_0528 ▶ 2014_0706 / 월요일 휴관

장유정_오리지널 사운드트랙_피그먼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127×205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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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정 홈페이지_www.yujungchang.net

초대일시 / 2014_0528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스케이프 GALLERY skape 서울 종로구 삼청로 58-4 Tel. +82.2.747.4675 www.skape.co.kr

사진 프레임에서 범람한 무의식과 시간의 발효 ● # 1. "절망은 놀라움의 부정적인 반대 의미이기 때문이죠. 절망은 가끔 놀라움보다 더 확실해요. 우리는 부정적인 것을 더 좋아하죠." (백남준, 1975) # 2. "사진은 현실에 대한, 현실과 다른 추가물이지 현실의 반영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 벤야민이 '광학적 무의식(optical unconscious)이라는 말로 나타낸 사진 특유의 지각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 사진은 광학적 특성과 파편성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현실감을 구성한다. 그것은 현실을 쪼개 내서 또 다른 재료로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다." (이영준, 강의 「벤야민: 카카오톡 시대의 예술작품」 중에서) ● 언제인가 장유정 작가가 어머니의 유년기 기억 속에 '놀라운 한옥'으로 자리 잡은 시골 옛 집을 방문했을 때, 어머니의 그 기억을 배반하는 작은 규모와 남루함에 놀란다. 그리고 실망의 다른 표현인 놀라움을 안고 다락방에 올랐을 때, 거기에서 어머니의 어머니, 즉 할머니의 화장대 거울을 발견하고 그 옛집의 물리적인 현실과는 다른 새로운 현실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빛의 잔존이 한옥 특유의 공간에 감돌 때, 그 거울은 화장대라는 아름다움의 거치대이지만 마치 미래를 예시하는 샤먼의 직관적인 미디어처럼 숭고한 세계를 개시하는 셈이다. 그 거울에 매혹당한 장유정 작가가 몇 달 후에 그 '놀라운 한옥'을 재방문했을 때는 거울이 아예 없어져 버린 것을 발견한다. 거울을 수리하기 위해서 터치를 가했다가 거울이 깨지고, 결국 쓰레기통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절망. ● 그런데 여기에 사실관계의 반전이 있다. 장유정 작가는 문득 깨닫는다. "아, 진짜 할머니 거울은 서울 집에 있지 않아? 그럼 옛 집의 그 거울은?" 그 화장대 거울은 장유정 작가에게 놀라움과 실망과 절망 그리고 체념을 가르쳐준 '모래의 책'(보르헤스) 같은 것이다. 그 거울은 스마트폰으로 찍은 스냅 쇼트로만 남아 있는데, 점차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게이트의 구실을 하기 시작한다. 이 매혹적인 일화는, 사진은 현실을 증언한다고 믿고 있는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러면서 우리를 알게 모르게 불확실한 기억의 두루마리가 펼쳐내는 새로운 현실에 빠지게 한다. 그 논리는 우리를 농락하는 듯 싶기도 하지만, 그 경이로움은 사진의 리얼리티를 훌쩍 벗어나서 우리의 의식 아래, 마음 깊이 흔들리고 있는 정서 affect를 일깨운다. 완전한 망각에 빠진 것 같지만, 귀신같은 소슬한 부름을 받고 돌아와서 여전히 가벼운 두려움과 켕김에 휩싸이게 하는 이미지 너머의 비밀처럼.

장유정_단면_피그먼트 프린트, 사포로 갈아낸 유리, 나무액자_113×78×5cm_2014

장유정 작가는 2012년 경기창작센터에 있을 때, 전시한 몇 가지 사진 작품으로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는 대부도라는 서해의 억새 가득한 시화호 공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은 이미지의 신통력이 있었다. 왜냐하면 감청과 보라로 물든 이미지는 우리의 신체 내부에서 발현된다는 섬광의 타입으로서 이미 세계를 물들여버린 내부의 외부화라고 할까. 외부 세계로 투사되어 이미 신비에 휩싸여버린 내부 섬광의 새로운 현실이라고 할까. 좌우간 감각적인 정신이 포획해낸 세계의 상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로부터 생겨난 이미지의 팔레트가 세계 전체를 칠해버린 형국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이런 실재가 가능한지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가능해진 것도 같다. ● 작년 아시아예술극장 국제포럼에서 사진평론가 이영준은 이런 취지의 발표를 했다. "사진은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나는 25년 동안 이렇게 말해왔다. 사진은 기계가 그대로 옮겨서 찍는 것이라 벤야민이 말한 '광학적 무의식'의 측면이 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사진과 그림은 다르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늘 나는 문득 깨달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진이 그림이 되는 순간이 있더라. 어떤 경우에 사진은 "-되기"의 매체가 될 수 있다." 이영준은 진솔한 자기반성과 함께 사진평론 25년 동안 견지해온 입장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폭탄선언을 터뜨렸고, 사진이 "-되기" 즉 becoming의 매체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 것이다. 사실 그때 그 폭탄선언에 예고 없이 당하는 입장에서 멍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해서 소위 "-되기"라는 변성의식 상태 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가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다. ● 다시 '놀라운 한옥'의 어느 공간의 사진. 집 뒤 암벽을 파서 만든 동굴은 가장 바깥을 콘크리트로 발라버렸다(작품: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어떻게 보면, 여러 시간대의 이동과 회귀와 교차가 어지럽게 일어난 공간을 장유정 작가가 포착한 것이다. 그 내부에는 청색의 플라스틱 과일 상자가 놓여 있고, 쌀 포대 같은 것도 놓여 있다. 이곳은 그 '놀라운 한옥'에서 피난처에 해당하고, 삶과 죽음의 고빗길에서 간신히 목숨붙이가 가능했던 숨은 공간이다. 가령, 해방공간이나 한국전쟁 시절, 이곳에서 신병을 숨긴 사람들이 있었고, 보르헤스 타입의 파란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고 한다. 보통 때는 건냉소로서 물건을 보관하고. ● 이 역사의 컨텍스트가 사진 속에 등장한 우묵한 장소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식별되지 않는 공간,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이 교차하는 공간, 인간과 사물이 하나처럼 대접받는 공간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응시'의 형식이 아니다. 어떤 정신적인 앙금으로서 작은 오브제를 남기는 타입이라기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으로 대하게 한다. 이러한 시각은 이미 그 장소의 공간성이 사진의 프레임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 가장 바깥의 영역에 발라진 콘크리트가 마치 사진의 프레임을 지시하는 액자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액자 속의 우묵한 공간이 플라톤이 말하는 '코라 Khora'처럼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라 Khora'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공간이면서도 익명적인 공간이다. 이를 『노자 도덕경』에서는 '위대한 암컷 [玄牝]'이라든가 '골짜기 신 [谷神]' 같은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장유정_결실1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_88×70cm_2014

장유정 작가의 사진은 사진을 상회한다. 본래 사진이라는 것은 사진 寫眞 즉 "진짜를 베낀다"라는 것이 한자문명권의 인덱스 해석이지만, 사실은 지금의 매체 환경에서 사진은 사위 寫僞, 즉 "가짜를 베낀다"는 것에 근사하다. 여기서 사위란 컴퓨터그래픽처럼 원본 없는 이미지로서의 시뮬라크르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사위라는 코드를 비튼다면, 결국 '가짜'란 사진을 넘어서는 무의식의 징후, 낌새, 기척들에 대한 탐사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진 위에 그림의 터치를 가하고, 유리 표면을 뿌옇게 가는 작가의 행위들은 그 무의식으로의 입구가 독특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을 상회하는 사진이란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이동한다. 즉 '보기'를 통해서 "-되기"의 차원을 열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우묵한 공간에서 무엇이 "-되기"의 차원에 놓여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청색의 플라스틱 과일상자이다. 우리는 다른 사진들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호박과 병치된 정체모를 가방, 정원에 놓여져 있는 푸른 색 물통, 그리고 저울 위에 놓여진 플라스틱 바가지를 발견하게 된다(작품: 결실). 그 사물들은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타입으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진 프레임은 이 사물들을 포획하여 색감이 증발하면서 빛이 바래진, 말하자면 시간 속에서 '익은 감'처럼 익어가는 시간적 추이와 발효를 드러낸다. 이것은 기묘한 관점의 채택이다. 장유정 작가가 원하는 것은 '놀라운 한옥'의 다락방에서 발견한 거울이 할머니의 거울이 아닌 '가짜'였던 것처럼 한국의 압축근대화 과정에서 자기 나름의 시간성을 획득한 플라스틱제의 사물들이 제 스스로 증언할 수 없는, 가냘프며 거의 무의미한 타입의 이야기를 '목소리'로 들려주는 것이다. 아아, 빛이 바래진 플라스틱 사물들이 각자의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란 본디 말의 의미를 갖지 못한 자의 사운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숨 소리나 비명 소리에 가까운 것이다. 의미화 할 수 없는 위상의 무관심적 존재, 비-자기의 존재가 문득 시간 속에서 익어간, 그러므로 신성이 응결된 무한 속의 단면을 '목소리'라는 장치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것이 "-되기"라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장유정_결실3_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_88×70cm_2014

# 3. "너와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네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 싱싱한 저승내가 났다" (정진규, 시 '모과 썩다' 중에서) ● 이제 우묵한 동굴 속의 청색 플라스틱 과일상자도 익어갈 것이다. 발효되어 새로운 냄새를 풍기게 될 것이다. 이 발효라는 것은 현대의 감성학의 세계에서 제대로 탐사되지 못한 미지의 감각으로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구 전체의 평형성을 유지해온 박테리아급의 무기호흡 혹은 효소 작용에 의한 것이다. 장유정 작가에게 그 발효과학의 영역은 시간과 기억이라는 것의 예기치 않은 변화이다. 그리고 그 영역의 최초 발효는 어머니의 기억이 현실적인 차원에서 배반당한 체험이다. 유년 시절을 살아낸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놀라운 한옥'은 고래등처럼 부풀어 올라 무의식을 길어 올린 이미지의 상상적 장소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반에서 오는 실망과 놀라움 등은 장유정 작가가 사진이라는 프레임 바깥으로 범람하면서 '체념 諦'念, 즉 "생각을 살피는 데서 오는 깨달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 백남준 : 그리고 '체념'을 우리말로 뭐라고 해요? / 황필호 : 그냥 '체념'이라고 합니다. / 백남준 : 불교가 굉장히 역사가 길지요. 그리고 부녀자 신도들이 많았잖아요? 그러면 대중화된 순수한 조선말이 나왔어도 괜찮았을 텐데요. (1991년 철학자 황필호와의 대화 중에서) ● 서구적 시선에는 이처럼 시간 속에서 익어가는 발효적 변화를 춤추는 사물로서 포획한 예가 있을까. 마치 삭힌 술내처럼, 이승과는 유다른 이계의 냄새처럼 마음이란 동하는 것이다. 마음은 단지 의식이 아니라 세계까지 다 받아들여서 다시 범람하게 하는 전체를 말하는데, 이러한 마음을 포획하려고 하는 예가 더러 있었을까. 더러는 있었을 것이다. ● 좌우간 이미지의 천재성, 성상 파괴, 바로크적 공간, 하이퍼리얼, 가상현실 등등은 가능해도 이 시간 속에서 부정적 현실로부터 긍정적 숭고를 열어젖히는, 말하자면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의 '열림' 혹은 '개시'라는 국면이 장유정 작가의 이번 전시에 나타난 것 같아 놀랍게 생각된다. ● 본래 같은 노란 색으로 출발한 장롱과 나무바닥과 가구가 시간의 추이에 따라 각자 다르게 빛이 바래지는 개성이 마치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채 - 빛을 머금은 색채 -처럼 현현하는 것은 무심한 듯하면서도 유현하고, 유현한 듯하면서도 일상적이며, 일상적인 듯하면서도 숭고하다(작품: 성장). 장유정 작가의 사위 寫僞는 억지스럽지 않으며 단지 "빛의 예술을 하기 전까지는 색에 시간의 기능이 있는지 몰랐다"는 어느 작가의 술회처럼 빛과 시간 사이의 함수가 발효의 깊이, 그 순환적 확장 속에서 가능함을 보여줄 뿐이다. 이윽고 그 빛이 바래진 각자의 색-빛-시간은 이제 사진 프레임을 구성하는 실제의 액자까지 감염시킨다! 감염당한 액자틀 역시 이제 이 발효의 우묵한 세계로 접혀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장치 dispositif는 심플하면서도 파동 방정식처럼 아름답다. 물리학에서 아름답다는 것은 심플한 수식이 보여주는 우아함이다. 여기서 시간여행이 가능할까. 사진을 통해서? 혹은 사진들의 배치 구조를 통해서?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장유정_오리지널 사운드트랙展_갤러리 스케이프_2014
장유정_오리지널 사운드트랙展_갤러리 스케이프_2014

전시장 지하(설치작품: 도착)와 2층에 있는 사진들(작품: 오후)은 다른 공간감을 뽐낸다. 장유정 작가가 현재 살고 있는 집과 미래에 살기 위해 짓는 과정의 집이 그것이다. 사진 내부에 감도는 빛이나 사진 뒤편에 장치된 배광 효과에 의해 사진들은 환하다. 빛의 공간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듯이. 게다가 공간의 휘어지는 동선에 맞게 조율되어 있고, 꺾이는 눈높이와 각도를 따라 배치되어 있다. 작가는 어디서나 빛을 추종하고, 그 빛들은 색-빛-시간의 함수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1층의 '놀라운 한옥'의 공간에 대비하면, 이는 대칭성의 세계를 구현한다. 삼계무법 三界無法, 즉 과거의 집과 현재의 집과 미래의 집 사이를 가르는 구분이 사라진다. 마치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생 사이의 삶의 칸막이가 제거된 것처럼. 걸림이 없다. 빛들의 권능은 희한하다. 무심하고 일상적인 장소들에 주목하면, 각각 품고 있는 빛의 공간들은 공간들끼리 서로 연결된 것 같다. ● 그런데 이 모든 이미지의 신통이 그냥 사진 내부의 메카닉한 성실성이 빚어냈다고 믿지 마라. 장유정 작가의 체념적 - 즉 놀라움의 부정적인 반대 의미로서의 - 정서는 '놀라운 한옥'의 어머니 기억이 전이되고, 그 전이된 기억의 재발효가 어쩌면 신 神 혹은 신명 神明의 권능과 함께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상자 속에 놓인 양파들은 저절로 싹이 났는데(작품: 유지), 이 싹들은 "하늘의 새들을 주의 깊이 관찰해 보십시오.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지만,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시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6:26)와 마찬가지이다. 왜? 액자 속에 선명하게 나타난 글자는 '신 神'이라는 한자이다. 이 신 神은 갑골문과 금문의 문자학자 시라카와 시즈카에 의하면, "번개를 낚아챈 모양"이라고 한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살아있는 직관이 개입하는 순간의 미학이라고 할까. 양파들이 싹이 난다는 변화는 저 신의 신통력이 개입했다는 은연중의 상징적인 형식이 있다. 사진은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서 장유정 작가는 거기에다 붓질을 서슴지 않는다. 그 신은 무엇인가. 양파라는 싹난 식물성 생명이 다시 그 주어진 액자틀을 벗어나서 세계로 범람하려는 다이내미즘, 거기에 또 다시 신명이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신은 그런 식으로 사진 속의 생명을 재현하지 않고 생명적인 것을 "-되기"의 차원으로 밀어 올리는 것이 아닐까. 한국처럼 샤머니즘의 감수성이 뛰어난 곳에서 이 사진의 권능은 너무도 직관적이기 때문에 이런 감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 이러한 시간들의 매듭과 결들, 그 변화의 새로운 시간적 계기, 그리고 빛으로 표상되는 사물들의 -되기라는 차원은 어떤 인식론적 토대 위에서 가능한 것일까. 장유정 작가의 중첩된 거울, 즉 거울 속에 있는 거울을 보면(작품: 단면), 이것은 "진리는 하나의 꿈 안에서가 아니라 여러 개의 꿈 안에서 가능하다"(파솔리니)는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가의 인식은 거울 속에 보이는 거울의 상이 꿈속의 꿈과도 같으며, 그 꿈속의 꿈을 깬 장소 역시 꿈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한다. 그래서 그 액자 유리 자체를 갈아서 뿌옇게 보이도록 연출한다.

장유정_유지1_피그먼트 프린트에 과슈_95×77cm_2014

# 4. "그것들은 저쪽 한없이 먼 곳에서 물끄러미 보이고 있다. 이 바라봄의 초점을 흐리게 한 시선의 끝에서 사물은 본질적인 한계를 넘어선다." (이즈쓰 도시히코, 『의식과 본질』, 86쪽.) ● 이러한 중첩된 거울들의 세계는 모든 사물들이 흐리게 흔들리며, 빛 바래지며, 새로운 되기의 변질로 나아가며, 시간 속의 주인공이 문득 객체가 되는 이 변화상들 전부가 다름 아닌 기억의 발효를 통해 일어나는 무의식의 유희라는 것을 알려준다고 보여 진다. 마치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어느 화가의 그림 그리는 방식을 메타적 관점에서 보여주는 <시녀들>로부터 시작하듯이 장유정 작가는 자신의 이 시간 차원 자체를 다시 비평적 태도로 다루는 세계를 이 중첩된 거울들의 세계상으로 표상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꿈꾸는 자아조차도 하나의 사물로 화해버리는 '자각몽 lucid dreaming'의 세계가 아니다. 이것은 '체념'이라는 "생각을 살피는 형식의 깨달음"이라는 꿈꾸기가 아닐까. ● 우리는 장유정 작가의 이번 사진을 상회하는 사진들이 우리의 무의식을 어떻게 터치하는지를 다시 유심하게 살펴야 할지 모른다. 이것은 전이와 감염, 공명이 쉽게 일어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 김남수

Vol.20140529g | 장유정展 / CHANGYUJUNG / 張有廷 / photography

@ 60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