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너 Thou to Be Seen Tomorrow

박영하展 / PARKYOUNGHA / 朴永夏 / painting   2014_0611 ▶︎ 2014_0616

박영하_내일의 너14001_캔버스에 혼합재료_116.8×91cm_2014

초대일시 / 2014_061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박영하의 회화 세계, 물끄러미 바라봄의 극적인 순수 ● 물끄러미, 그야말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물끄러미 바라봄에 더 이상의 나아감이 성립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니까 최선을 다한 탓에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그럴 때, 보는 자도 보이는 것도 가장 근원적인 경지에로 들어선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지금 여기는 더없이 특이하다. 그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분명 개별인 보편이고, 일시의 불멸이고, 따라서 유독(惟獨)한 절대이다. ● 물끄러미 바라봄의 극적인 순수, 이를 향유할 기회를 얻기도 어렵거니와 이를 획득해서 표현한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물끄러미 바라봄의 극적인 순수는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희소하다. 하지만 박영하 선생의 회화 작업은 그 불가능의 가능을 향해 40년에 가까운 세월을 끌어 모아 질주하다시피 한다. 이는 "추상회화의 본질을 구현하고 싶었다."라는 그의 말로 압축된다. ● 추상회화의 본질은 '회화로서의 회화', 즉 회화 자체로서의 회화다. 말하자면 회화의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추상회화의 본질이다. 회화의 존재를 회화를 통해 구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역설적인 심지어 자기 파괴적인 작업일 가능성이 높다. 그 작업은 회화라 일컬어지는 개별 작품으로써 회화의 존재라고 하는 본질적인 보편의 대상을 추구하는 것이고, 따라서 처음부터 초과(超過)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더욱 심각한 문제는 회화의 존재라는 것 자체가 미리 정립되어 있지 않은데다 언제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박영하_내일의 너14002_캔버스에 혼합재료_53×45cm_2014
박영하_내일의 너14003_캔버스에 혼합재료_72.7×60.6cm_2014

평자가 보기에 박영하 선생의 회화 작업은 일종의 선(禪) 수행과 같다. 그에게서 '회화의 존재'는 화두(話頭)와 같고, 이 '회화의 존재'를 추구하는 그의 회화 작업은 절대의 무, 달리 말하면 막막한 시공간을 눈앞에 두고서 깊고 긴 호흡을 해 나가는 것과 같다. 다만, 그의 선 수행은 회화적인 선 수행이기에 무아지경에서 무슨 선적 경지를 재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작업이 추상회화의 본질인 회화의 존재 자체를 향한 집중이라면, 맨 먼저 일체의 재현을 벗어나 있을 것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다. ● 회화의 존재 자체를 회화적으로 추구할 때 이같이 재현할 바 없는 선적 경지를 재현하는 것마저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회화 작업을 하는 그의 일체의 몸짓이 아예 회화의 존재 자체에 의거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동안 평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회화의 존재 자체를 철학적으로 규정한 인물은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밖에 없다. 그는 『눈과 정신』이라는 책에서 "깊이, 색, 형태, 선, 운동, 윤곽, 표정은 근본존재의 갈래들이기 때문에, 게다가 이들 각각은 이들 모두를 한꺼번에 가져오기 때문에, 회화에서는 분리된 문제들도 없고 진정 대립된 길들도 없고, 부분적인 해결책도 없고 축적에 의한 진전도 없고, 되돌아옴이 없는 선별도 없다."라고 말한다. 메를로-퐁티의 이 언명은 회화의 존재는 곧 근본존재의 회화이고, 근본존재는 곧 회화적이라는 것을 적시하고 있다. 박영하 선생의 회화 작업은 바로 이러한 회화=존재 또는 존재=회화라고 하는 근원적인 영역을 향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람자로서 그의 작품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이 같은 회화의 존재 즉 존재의 회화를 목도하는 것이고, 또한 그래서 그야말로 더없이 물끄러미 바라볼 뿐 그 외 특정한 그 어떤 시선도 불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박영하 선생의 작품은 회화의 존재 내지는 존재의 회화를 구축함으로써 관람에서의 '물끄러미 바라봄의 극적인 순수'를 가능케 한다.

박영하_내일의 너14004_캔버스에 혼합재료_72.7×60.6cm_2014
박영하_내일의 너14005_캔버스에 혼합재료_90.9×72.7cm_2014

다시 '회화로서의 회화'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lt)의 말에 따르면, '회화로서의 회화'를 맨 처음 구축하고자 한 인물은 마네였다. 하지만 마네는 그렇게 구축하고자 하는 실마리를 붙들었을 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추상회화의 선구로 꼽히는 칸딘스키는 색과 형태의 음악적인 울림을 지향한 나머지 관람자들로 하여금 '회화로서의 회화'로 진입토록 하는 데 실패한다. 또 다른 추상회화의 작업이라 평가할 수 있는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에 의거한 몇몇 작품들은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지독한 분석에 의한 사물의 종합적 재구성이라는 기법이 부각되는 탓에 '회화로서의 회화'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면? 일군의 추상적 표현주의의 화가들은 어떠했는가? 잭슨 폴록은 흩뿌리기라는 기법에 걸려 넘어졌고, 최고의 화가인 마크 로드코는 칸딘스키의 울림을 전혀 새로운 심층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가 구현함으로써 뭇 인간들의 색채적인 감성을 한껏 고조시킨 나머지 '회화로서의 회화'를 다소 비켜나고 말았다. 요컨대 굵직굵직한 서양의 회화사는 '물끄러미 바라봄의 극적인 순수'와 거기에서 비로소 현존하는 '회화로서의 회화'를 구축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서양 근대의 감성의 기축인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에 대한 열망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회화가 나름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위력은 '회화로서의 회화'의 위력, 즉 진정한 추상회화로서의 위력은 아니다. ● '물끄러미 바라봄의 극적인 순수'를 통해 접근하게 되는 그 지경은 바로 '느닷없음'에 전적으로 사로잡힘이다. 느닷없음은 일체의 존재를 안팎으로 관통하고 에워싸는 그야말로 근원적인 존재론적인 사태다. 말하자면, 도대체 현존하는 것치고 근본적으로 느닷없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느닷없음은 흔히 운위하는 우발성에 비해 더욱 정적(靜的)이다. 우발성이 내뿜는 역동성의 문을 제대로 통과하고 나서야 느닷없음의 정적인 경지, 일컫자면 적요(寂寥)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그곳, 그 유독한 지금 여기로 한껏 들어서고 싶어 하는 욕망이 다름 아닌 존재론적인 근본 욕망이다.

박영하_내일의 너14006_캔버스에 혼합재료_40×40cm_2014
박영하_내일의 너13028_캔버스에 혼합재료_72.7×60.6cm_2013

한편 느닷없음은 두 상반된 계기를 거느린다. '나아옴'과 '물러섬'이 그 두 계기다. 하지만 느닷없음에서 이 두 계기는 분리 불가능함은 물론이고 심지어 식별조차 불가능할 수 있다. 나아오는가 하면 물러서고, 물러서는가 싶으면 나아오는 것이 느닷없음이다. 나아옴과 물러섬의 식별이 불가능한 탓에 정확하게 걸려들라치면 그 지금 여기에서 어떤 방식으로건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느닷없음이다. 물러설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 박영하 선생의 작품들을 볼라치면 이 같은 나아옴과 물러섬의 두 계기를 통한 느닷없음을 여지없이 목도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거대한 크기는 물론이거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소품이라 할지라도 그 앞에 서서 그야말로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이 요구하는 대로 그야말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물러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다. 그때 보는 자는 터무니없이 빛나는 존재 자체의 느닷없음에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당장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 서서히 어느덧 빨려 들어간다. 흔히 말하듯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래서 시적으로 말하면 그의 작품은 '부드러운 칼'이다. 두께 영에 가까울 정도로 너무나도 날카롭기 때문에 당한 자가 버힌 줄도 모른 채 이미 온몸을 가로지르고 마는 그런 부드러운 칼이다. ● 박영하 선생은 회화의 존재 자체에 아예 몸을 싣고서 존재를 회화적으로 구현해냄으로써 이른바 회화적인 선(禪)적 경지를 열어젖힌 나머지, 그의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느닷없음을 물끄러미 바라봄의 극적인 순수의 체험을 가능케 한다. 그 사이 작가와 관람자 그리고 작품이 한꺼번에 존재의 갈래들이 조성해 내는 극단적인 날카로움에 의해 관통되고 마는 것이다. ■ 조광제

Vol.20140611f | 박영하展 / PARKYOUNGHA / 朴永夏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