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매체, 나, 필터

이정호展 / LEEJUNGHO / 李正豪 / photography.painting   2014_0612 ▶︎ 2014_0710 / 일요일 휴관

이정호_USA_잉크젯 프린트_125×154cm_2012

초대일시 / 2014_0612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마크 GALLERY MARK 서울 강남구 청담동 100-23번지 Tel. +82.2.541.1311 www.gallerymark.kr

비움과 채움 사이 ● 그의 작업은 서로의 대척점으로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텅 비어 있든지, 꽉 차 있다. 가라앉은 정적, 내성적 어둠, 정지된 시간이 있는 반면, 왁자지껄한 소요, 도발적 발색, 과잉된 몸짓이 있다. 그런데 이 극단적인 두 경향은 어떤 중용의 지점을 향해 달려간다. 마치 서로의 결핍을 충족시키려는 듯, 자신의 태생적 공간을 지우려는 듯, 그것들은 무언가를 뜨겁게 욕망하면서 타자의 시선을 차갑게 의식한다. 때문에 이정호의 오브제는 완전함을 지향하지 않고 오히려 완전함을 벗어나려 한다. 일본의 패션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의 말대로 가장 완전한 것이 가장 추한 것이다. 그가 포착하려는 작품의 귀결점은 역설적이게도 질서를 찾아가는 엔트로피의 무질서이다. 알다시피 서구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수적인 질서와 균제, 균형과 통일에서 오는 조화(코스모스)였다. 이정호는 이런 틀에 짜인 혹은 정해진 미적 해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작업한다. 이론적으로 계획적으로 물질에 접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육체적으로 몰입한다.

이정호_Untitled_잉크젯 프린트_100×125cm_2012
이정호_Flag_잉크젯 프린트_100×125cm_2012

프랜시스 베이컨의 육탄전 같은 작업과정을 상기시키는 그의 작업 스타일은 그래서 얄팍하고 감각적인 평면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색채 자체가 몸(body)임을 드러내는 강렬한 부조의 컴포지션은 프랭크 스텔라의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를 연상시키면서도, 분출하며 캔버스를 벗어나려는 색채의 기운에는 잭슨 폴록의 현장감도 들어 있다. 무작위의 재료들과 무의미한 정크(junk)들은 카오스(chaos) 자체이면서도 그래피티나 거리미술이 지닌 직접성으로 일차원적인 소통을 이끌어낸다. 결국 이지적인 형식과 감정적인 표현은 무질서 속의 질서, 무목적 속의 목적을 만들어낸다. 그는 말한다. "나는 그림이 아름다운지 그렇지 않은 지는 관심이 없다. 나는 관객의 느낌(감정)을 만드는 그것의 능력에 관심이 있다." 육적인 이정호의 회화에 비하면 그의 사진은 지극히 관념적으로 보인다. 사진의 정체성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관념 자체에 있다. 자신의 생각을 가시적인 물체를 빌어 드러내는 것, 그것이 사진의 존재이유다. 사진가들은 보이는 것 너머에 진실이 있고, 그 진실을 포착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지만, 사실 진실은 보이는 것 속에도, 그 너머에도 없다. 사진가의 머리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호_Fallen_잉크젯 프린트_100×125cm_2012
이정호_Labyrinth_잉크젯 프린트_125×100cm_2012

이정호의 사진 풍경은 경기 침체로 인해 4년 동안 중단된 공사현장을 담고 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미국 경제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상징이지만, 보이는 현실에 투사된 그의 관념의 얼룩일 뿐이다. 타인의 관심거리에서 벗어난 무기력하고 무가치적인 공간 속에 그는 감정을 이입한다. 공허한 공간을 자신의 내면의 풍경과 일치하려는 그의 시선이 의외로 뜨겁게 느껴진다. 노자(老子)의 '빔'의 개념이 주는 창조적이고 생성적인 공기가 화면 속에서 가득히 빛난다. 이것은 무위성(無爲性)이나 여백에 대한 작가의 긍정적인 시선이 동양적이고 상대주의적인 패러다임에 기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정호는 원래 수학과 가상물리학을 전공했다. 그의 몸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선험적이고 논리적인 처세술이 예술이라는 장르 속에서 불확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풀려나가는 것을 그는 즐기고 있는 듯하다. 마치 처음 보고 처음 접하는 듯한 생생함과 신선함이 그의 작품의 강력한 기술임은 분명하다. 앞으로 그가 사진의 관념론과 회화의 경험론이 지닌 폭넓은 간극의 정서를 어떤 보편적인 언어로 일관되게 엮어나갈지 자못 궁금해진다.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거울 사이에서 길을 잃지 말기를..., 그래서 더 멀리 더 오래 가기를... ■ 이건수

이정호_Ladder_잉크젯 프린트_100×125cm_2012
이정호_Dart_잉크젯 프린트_80×64cm_2012

이정호: 재료적 신비의 초월 ● 이정호 작가는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새로운 차원의 표현을 만들어내기 위해 성실히 3차원의 공간에서 작업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세속적 아상블라주 작업을 하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1955년에서 1960년 사이,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될 수 있음을 처음 선보인 초기 라우젠버그(Rauschenberg)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라우젠버그는 다시 쓸 수 없어 버려진 것들, 하물며 쓰레기에서 조차도 형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뉴욕 보워리(Bowery)주변 쓰레기더미에서 주워 모은 물건을 가지고 병치하고, 늘리고, 못을 박고, 자르고, 프레임 안에서 자유롭게 변화시킨 후, 완성된 프레임을 버렸다. ● 내가 이해하기로 이정호작가는 이렇게 버려진 물건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각적 인식의 향상을 소망하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의 물건들을 의미 없이 바라보는 행위 속의 어떠한 단절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 작가는 이러한 물건들의 표면을 예리하게 탈 중심화 시키고 있다. 그는 표면을 완전히 비운 뒤, 그것에 새로운 운율을 주고 거칠게 의미를 담아 표현한다. 이 과정 속에서 그는 그만의 독창적 언어를 만들어내는데 열중하는 것이다.

이정호_Honest Expression_캔버스에 스프레이 페인트, 오일 페인트, 라텍스 페인트, 플라스틱, 삼실, 와이어, 카드보드 상자_152×198cm_2012

지난 16년간 한국을 자주 여행 오면서 나는 다양한 사고방식과 다양한 방법으로 작업하는 많은 작가들을 만났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최근에 성장하기 시작한 작가들이고 또 어떤 이들은 이미 명백히 인정받는 작가들이다. 가끔 뉴욕에서 한국작가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정호 작가는 후자의 경우인 작가였다. 그는 색, 모양, 표면 그리고 에너지를 뜻하는 기(氣)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기(氣)는 서양인들에게 생소한 개념이지만 전통적으로 중국 그리고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 꾸준히 등장하는 소재이다. 최근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어떤 특별한 형태의 에너지가 전달되는, 작품과 관객의 접점으로서의 '기'라는 소재에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정호 작가는 새로운 형태의 회화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격렬한 분열로 이루어져 있으며, 뒤틀린 물감 덩어리, 구겨진 표면, 겹겹이 쌓인 파편이 서로 결합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처음 그의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그가 색소와 그 색소에 의한 재료적 단절이 지어질 거친 표면에 적용했을 그의 미묘한 기법을 보기 위해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만 했다. ● 여기서 나는 "구성되다"라는 표현이 아니라 "지어지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두 표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정호 작가의 작품은 후자의 경우로서, 이 경우 물감은 색깔인 동시에 재료로서의 색소이다. 이 작가는 소멸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면의 인식을 높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소멸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의 작업은 캔버스와 캔버스의 공간을 뛰어넘어 확장된다. 이러한 그의 거친 페러독스는 기이한 형태의 아상블라주 라는 결과물로 나타난다. 이 작가의 최근 아상블라주 작품을 볼 때면 눈과 손은 하나의 감각기관으로서 작동한다. 그의 작품을 보다가 나는 문득 한국 고유의 현악기 가야금을 연주하는 음악인 황병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서양인의 귀로 들었을 때 황병기의 음악에는 어떠한 혼돈이 느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현을 뜯는 소리가 점점 차곡차곡 쌓여 그 음악 자체의 내적 구조가 생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이정호의 작품의 망가진 표면에 가득한 불규칙성, 응고물, 뒤틀린 금속, 전선, 종이 뭉치, 부서진 플라스틱 조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에너지가 모여 있는 어떠한 안정상태, 정지점에 이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정호_내안의 나_캔버스에 스프레이 페인트, 오일 페인트, 라텍스 페인트, 플라스틱, 금속 튜브, 트래픽 콘, 카드보드 상자_152×121cm_2013

이정호 작가와의 대화에서 나는 그가 1930~40년대의 서양추상화, 특히 유럽의 추상화에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그에게서 크게 느낀 점은 그는 디지털로 만들어진 형태 옆에 대비해서 은근히 들어나는 색을 표현하는 그림처럼, 임시적(provisional)회화와 급진주의적 회화를 구분하는 문제보다는 서양에서 시발한 추상화의 여러 근원들을 알아내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추상화는 서양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또 나라마다 추상화에 대한 개념과 표현이 매우 다르다. 따라서, 이정호 작가에게는 어떻게 표면을 실현할지, 즉, 어떻게 부분부분의 혼돈을 전체에 관계시켜 하나의 표면을 통해 나타내는지가 더 큰 문제이다. 이 문제의 고찰은 실제적인 접근방법으로서 유럽보다는 미국식에 더 가깝다. 이 작가는 표면의 재료적 차이의 개념으로서 이해하고, 100여년 전 그로테스크 미술이 그러했던 것처럼, 색깔은 표현의 수단인 동시에 표면이라는 공간이라는 의미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 회화의 모든 경계, 모서리를 안팎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 또 하나 이정호 작가에 대해 내가 말하고 싶은 중요한 점은, 그가 전 세계의 예술사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바탕으로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그가 작가로서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매우 신중한 작가이다. 하지만 자신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체 서양문화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떤 모호한 미적 기준을 가지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이정호 작가가 그 만의 관점을 다양한 문화의 세계에 가져오는 과정에서 작가로서 한층 더 성숙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미 존재하는 색들로 멋진 질감의 표면을 구현해내는 그의 구성적 기법은 매우 멋진 발상이며, 갖가지 폐기물을 사용해 예술을 창조하는 작업방식에 그는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있다. 그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 작품 속에서 그의 문화와 서양세계의 문화 모두가 새롭게 융화되고 있다. 이정호 작가는 오래된 물건들이 합쳐져 새로운 의미가 창조된다는 그 중요한 구성 만은 분명 예술로서 받아들여지는 여러 매개의 환경 속에서 작가로서 더욱 진화할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로버트 C. 모건

이정호_놨다, 정신줄_들것에 스프레이 페인트, 오일 페인트, 캔버스, 톱밥, 카키색 바지, 신발, 스프레이 폼, 페인트붓, 소주병, 로모 피쉬아이 카메라_76×50×91cm_2014

Lee Jung Ho: Material Mystique Transgressed ● With an optimistic sense of qualitative expectancy, Lee Jung Ho pursues his art in three-dimensional space, possessed with an assiduous demeanor in his reach toward new heights of expression. Lee is an artist who works with the secular assemblage. One may look at his works in reference to the early Rauschenberg whom, between 1955 to 1960, set the example of how the old could be transformed to become the new. He saw the potential of form in discarded objects, even in junk, even is what is no longer fit for use. Rauschenberg worked with found objects, purloined objects taken from the detritus left on the streets around The Bowery in New York City, and juxtaposed them one with another, stretching them, nailing them, cropping them, adjusting them around and within the frame, and then finally discarding the frame altogether. ● As I understand his intention, Mr. Lee aspires to find a heightened awareness of perception through these discarded materials, to represent a kind of rupture in how we perceive objects in the everyday world without particular meaning. Lee's work goes for an acute decentering of the surface of these objects, empties them out, then filling them up with new cadences and rough-hewn allocations of meaning. In the process, his work is moving toward a unique structural language. ● Having traveled frequently to the Republic of Korea over the past sixteen years, I have had numerous occasions to meet artists of various persuasions, working in numerous mediums, some of which are emerging and others clearly established. Occasionally, I will meet Korean artists in New York. Jung Ho is one of the latter. Lee is concerned with issues of color, shape, surface, and energy (qi). The latter is something unfamiliar to most Westerners, but is persistent in the work of traditional Chinese and Korean artists. A recent generation of artists in Korea has become interested in reviving this tendency, which is the point of contact between the work (painting) and the viewer, where a special form of energy is transmitted. ● Jung Ho is committed to the concept of an advanced form of painting. His work is filled with volcanic interstices as the gnarled globules of paint, crumpled surfaces, and overlays of detritus, are discreetly formed and conjoined to one another. Upon seeing his work for the first time, I had to look more closely to see the subtle maneuvers he had deployed in relation to the pigments and decimated surfaces on which these pigments traces of material rupture were built. ● I say "built" not constructed. There is a difference in connotation between the two. In the former instance, which is how I understand Jung Ho's work, the paint is both color and material pigment. His objective is to find a way of heightening his awareness of the surface through a kind of obliteration. This obliteration leads to an expansion into the shaped canvas and beyond. More often than not, this strident paradox will culminate as a bizarre coalescence. In Jung Ho's more recent assemblage paintings, the eye and hand rarely function separately from one another. While looking at these works I am suddenly reminded of the Korean musician Hwang Byung-ki, who performs on the Gayageum, the indigenous stringed instrument familiar to artists of his homeland. For the Western ear, there is a particular chaos in the music of Hwang; but over time the plucking of the instrument gradually builds and retrieves its own internal structure. Similarly with Jung Ho, over time the irregularities and coagulations, the twisted metal, electric wiring, wads of paper, and broken plastic, that comprise his encrusted, wrecked surfaces reveal a stasis, a neutral resting point, where the energy is held in check, suspended in time. ● In a conversation with Jung Ho, I discovered his familiarity with Western abstraction in the period of the 1930s and 1940s, primarily in Europe, held a strong interest. What I found enlightening was Jung Ho's point of contention – that he is less concerned with the current breach between provisional and radical painting, as when thinly veiled color is seen in opposition to digitally generated forms, than in coming to terms with the sources of abstraction as they has developed in the West. Traditionally, the notion of abstract painting in East Asia does not have the same evolution. Also, the variations from one country to another are significant. Therefore, what is problematic for Jung Ho is how to realize the surface, which means how to evoke the chaos of parts in relation to a whole, by bringing the totality of the surface into being. There is a certain literalness in this approach, more American than European. Even so, he feels that to understand the surface in disparate material terms, he must go as far as possible to the perimeters of painting, toward the edges and back inside, in order to discern the way color becomes an expressive vehicle, as in the grotesque painting from a century ago, but nevertheless contained within the definition of a surface space. ● One further comment regarding Jung Ho that I believe to be important: He has an air of sociality with regards to working in relation to an expanded view of art history that reaches between hemispheres. I regard this as important in terms of how the artist persists in evolving his own point of view. This should not be misunderstood. Jung Ho is a serious artist for which I have no doubt. The question becomes one of how to function in the Western world without losing contact with deeply felt aspirations linked to his past. While this point cannot be rendered through obtuse aesthetic criteria, I would suggest that Jung Ho's demeanor will mature in bringing his point of view into the realm of transcultural reality. His syntactical manner of building a deftly charged tactile surface through readymade color is a brilliant idea in the making. He is giving a new pulse to the use of collective detritus in art. His fully committed approach succeeds in making new cross-references between his culture and the Western world. Jung Ho has shown his willingness to evolve as an artist in a heavily mediated environment where art resists all but the essential structure of what old objects mean when they are assembled with new meaning. ■ Robert C. Morgan

Vol.20140612d | 이정호展 / LEEJUNGHO / 李正豪 / photography.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