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共和)의 터에서 움트는 유위(有爲)의 공동체

강용면展 / KANGYONGMYEON / 姜用冕 / sculpture.installation   2014_0704 ▶︎ 2014_0727 / 월요일 휴관

강용면_현기증_레진, 강화 스티로폼, 먹_290×1225×180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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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704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자하미술관 ZAHA MUSEUM 서울 종로구 부암동 362-21번지 Tel. +82.2.395.3222 www.zahamuseum.com blog.naver.com/artzaha

민중(民衆)의 예술, 뿌리의식에 기반하는 공화(共和)의 미학 ● 민중의 예술, 전통과 뿌리의식에 기반하는 공화(共和)의 미학, 강용면의 세계를 떠받쳐 온 언어요 개념들이다. 그의 사유가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일상과 초월계를 오가는 동안에도, 그의 조각은 삶이 터를 잡은 곳의 지경학(地境學)적 울림을 외면하지 않았다. 1990년대의 「역사원년」 연작에서 2000년대의 「온고지신」연작으로 이어지면서도 내내 그랬다. 오방색으로 채색된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 민화(民畵)의 소재들, 동물들, 보자기 문양, 상여꽃, 놋 밥그릇 같은, 시간의 질곡을 넘어 오래 함께 해온 형상들의 곁을 지켰다. 거창하지 않고 정감어린 소재들에 표현은 소박하고 따듯했다. 이렇듯, 이 세계가 모더니즘 미학의 만연한 엘리트주의를, 그것에 내재하는 사유와 표현의 데카당스를 온 몸으로 거부해 왔다는 것, 그로 인해 동시대 작가들이 만든 다른 것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 이러한 조형 행보에 비하자면, 이번 전시에 출품된 「현기증」, 「중독」, 「불안」 연작들을 관류하는 사유의 톤과 분위기는 이전과 거의 전적으로 달라 보인다. 우선 강용면의 세계를 대변하다시피 해온 대중친화적인 어법들, 화려한 오방색과 민화적 친근함, 공예적기법에 담긴 해학미학, 느슨한 펼쳐놓기식의 구성과 설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정도마저 탐미주의의 유산이자 데카당한 세련미학의 연장이라는 듯 남김없이 배제된 인상이다. 검정의 모노크롬이 오방색을 대체하면서 세계 전체에 서사적 긴장감이 흐르게 되었다. 이전의 해학적 경쾌함은 관념의 직설법으로 대체되었다. 소박미가 사라진 자리는 비장미로 채워졌다.

강용면_현기증_레진, 강화 스티로폼, 먹_300×1300×180cm_2014_부분

그렇더라도 맥락은 단절되지 않았다. 2014년 강용면의 민중(民衆)은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평등하며 민주적으로 연대해있다. 그들 모두는 각각의 역사와 시대, 사회와 문화가 부여하는 관습과 규범과 제약의 경계를 넘어서 있다. 그들의 정체는 더 이상 혈통, 국적, 정치적 신분, 사회적 계층, 개인적 성취 등과 같은 지표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들 각각의 인생(人生)을 지배했을 상이한 윤리적 신념이나 행동원칙들도 의미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 신세계에서는 영웅도 없고 하찮은 범인(凡人)도 없다. 더 귀한 인물, 더 큰 가치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것들을 구분하는 당위, 군중의 박수갈채와 익명을 분할하는 근거, 배우와 관객을 분할하는 무대는 작동하지 않는다. 모두는 동등한 위상, 동등한 권위, 동등한 발언권을 갖는다. ● 강용면의 민중은 그렇게 모여 하나의 거대한 질서, 반듯한 공화(共和)의 위용을 갖춘 구조체를 이룬다. 그 안에서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공동체는 개인들에 하나의 통합된 맥락을 부여하는, 그것은 한 마디로 공화(共和)의 소마(soma,體), 곧 현현된 공화국의 이상이다. 세네카에 의하면, 분절된 개인들을 공화의 통합된 신체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는 정신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황제의 통치력이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강용면의 사람들을 그토록 견조하게 축성된 하나의 공화체로 승화하는, 각각의 개별성을 가로지르며 내적통합을 성취해내는 힘의 실체는 무엇인가? 강용면의 조형세계가 스스로를 세워나가는 방식에서 우리는 뜻밖에도 이 문명사적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성큼 다가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감회에 사로잡힌다.

강용면_불안Ⅰ_레진, 패널, 먹_182×273×9cm_2014
강용면_불안Ⅰ_레진, 패널, 먹_180×360cm_2014_부분

적어도 2000년대 초반부터 강용면은 작은 조각들(fragments)을 축적과 결집, 또는 결합을 통해 큰 매스(mass)로 나아가는 방식을 채택해 왔다. 이 시기 이후 그의 조각(sculpture)은 자주 많은 조각들(fragments)로 구성되는 집적체의 형태를 띠곤 했다. 하나의 전체는 자주 공들여 형태가 조각되거나 소조되고 정성스레 채색된 수십, 수백 개의 나무조각들이 다양한 유형으로 직접, 또는 어셈블리지(assemblage)되면서 조형되곤 했다. 때로 각각의 조각들은 벽이나 바닥에 띄엄띄엄 느슨하고 규칙적인 형태로 나열되거나 배치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작가는 탈모던적인 '열린 조각'이나 '반(反) 조각'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던 것이다. ● 하지만, 열린 조각이니 포스트모던 조각이니 하는 자체가 형식주의적 관점의 투사를 허용할 뿐이다. 강용면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단위 오브제들이 다양한 결합방식을 통해, 공화체의 소마(soma)를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작은 것들이 결합해 전체를 이루고, 전체는 각 오브제들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여기선 부분이 곧 전체고, 개별성이 공동체성이며, 그리고 마침내 민중이 곧 공화국이 된다. 전체는 부분을 폄훼하지 않고, 공화국은 민중을 하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공존하고 소통하면서 분열 없는 더 큰 세계를 지향해 나간다. ● 모두가 하나의 신경망으로 이어진 것처럼, 각각의 지체들이 공동체성을 확보하는 과정은 곧 공존공영하는 인류 공동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의 숭고한 재현이다. 계몽주의적 이성으론 꿈꿀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이상(理想), 적어도 대혁명 이후의 인류가 끊임없이 꿈꿔왔던 진정한 공화국의 비전(vision)에, 그러므로 지금 강용면이 하나의 강력한 표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가 어떤 미학적 선언문을 작성하고 동지들을 모으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는 누구보다 더 민중의 가까이에 서 있으며,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듣는 조각가임에 틀림없다. 그의 모노크롬의 세계는 그래서 더 내적 다채로움으로 해석되고, 그의 검정은 살아있는 세계를 암시하는 색이 되고, 그 침묵은 더 큰 외침으로 다가온다.

강용면_불안Ⅱ_레진, 패널, 먹_100×100×7.5cm_2014

유위의 공동체, 또는 메타- 만인보 ● '공동체는 위험하다', 그것이 근대 서구의 지성이 지속적으로 확인해온 바다. '오로지' 사람들을 하나의 신화나 이데올로기에 굴복시키기 위해, 온갖 정치세력들이 앞장서 공동체라는 허구적인 동일성 개념으로 사람들을 결박해 왔던 것을 숱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장 뤽 낭시(Jean Luc Nancy)는 말한다 : "또한 공동체가 긴밀하고 조화로우며 파괴할 수 없는 관계로 조직되었고, 기관들, 의식들, 상징들을 통해 특히 자신에게 자신의 표상을 부여하고, 나아가 고유의 단일성과 내밀성과 내재적 자율성이라는 살아있는 봉헌을 스스로에게 바쳤던 상실의 시대가 항상 문제로 대두된다." (장 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박준상 역, (인간사랑, 2010), p.37.) ● 그만큼 자주 공동체가 '실존들을 하나의 몸으로 서둘러 범주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오용되었고, 거의 예외없이 전체주의라는 정치적 스트레스를 견인했기에 서구 지성사에서 공동체는 거의 금기시되어 온 주제였다. ● 실제로도 근대 이후 서구에서 유기적이고 살아있는 공동체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공동체가 상실되었거나 그 맥이 끊겼다는 사실이 오늘날의 모든 과정에서 목격된다. 그 시기 내내 서구는 개인주의라는 끔찍한 덫에 걸려 제대로 걷지 조차 못하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그러한 필연적 실패 요인으로 장 뤽 낭시(Jean Luc Nancy)는 구성원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내재적인 실체성의 상실을 들었다. 그렇게 만든 주범은 물론 근대의 소아(小兒)적 개인주의다. 낭시에 의하면 개인주의는 개인의 문제가 곧 세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망각한 자가당착의 개인 개념으로부터 도래한 괴변에 지나지 않는다. ● 낭시에 의하면, 말로서 공동의 형상을 다수의 실존에 부여하는 그것, 곧 신화에 의해 마르크시즘과 파시즘과 나치즘이 '단수(singulrite)의 존재들'을 박탈해 온 것에 대한 극적인 우려 속에서, 철부지적인 주체성의 덫에 빠진 또 다른 신화가 구성되었는데, 개인주의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개인주의의 오작동 안에서 일반적 등가화와 무한정한 확장으로 나아온 것이 바로 서구 자본주의다. 오늘날 스마트폰을 둘러싼 소비주의적 열풍을 통해 주체가 얼마나 비참한 희생자로 전락하는가를 보라. 단말기화된 사적 개인으로 해체된 민중의 영혼은 독점된 미디어와 상업광고에 거의 전적으로 중독되어 있다.

강용면_중독_레진, 먹, 글루건_각 13×3×2cm_2014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 자본주의의 해체를 위한 대안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그다지 모호하지 않다. 그것은 공동체성의 회복, 하지만 그 내부에 기만적인 전체주의로의 재귀를 막을 담보를 지닌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 곧 낭시적인 '무위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무-위(無-爲,비-행동)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고유의 주체를 변형시키는 어떤 행동'을 의미한다. 일테면 사회 내로 환원되지 않는 관계, 또는 사회 내에서 고착되지 않는 관계를 담보하기 위해 주체를 적절한 수동성의 상태, 즉 철부지적인 주체성의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 공동 내에서 지속적으로 변하고 끊임없이 도래할 뿐인 불완전한 주체를 유지하도록 허용하는 상상적인 행동이 바로 무위인 것이다. 그럴 때에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가치화에 저항하는 편위, 또는 비등가성의 비사회적 공동체가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 낭시가 제안하는 '무위의 공동체 상상하기'가 전체주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거나 자본주의의 진리품인 철부지 소비주체에 대한 의미있는 각성을 제공하는 건 사실이더라도, 그것이 인류를, 또는 적어도 서구를 현재보다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무위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무위(無爲)성 내에 그 비전마저 무위로 돌려보내는 모순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비참한 프리바토피아(privatopia), 곧 낭시 자신도 간파하고 있는 개인주의의 타락한 유토피아로부터 탈주하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무위의 주체 보다는 윤리적 분별력과 실천을 겸비한 행동하는 주체가 더 요구되며,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라 겸허한 열정과 적극적인 실천을 독려하는 '유위(有爲)의 공동체'가 비전으로서 자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강용면_온고지신Ⅰ_스테인리스, 우레탄도료_80×70×7ㄴ0cm_2010
강용면_온고지신Ⅱ_스테인리스, 나무, 먹_55×50×50cm_2010

우리는 낭시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강용면의 세계에서 목격하는 바가 이 주제와 관련된 벅찬 가능성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강용면이 제시한 이 서사적인 공화체라면, 낭시의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될 것 같다. 사람들은 충분히 개별적이고 평등하며, 명료한 단수(單數)로서 서로 소통하고 연대한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전체의 희생자가 아니며, 손쉽게 최면에 걸리는 철부지 소비자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상이한 시대를, 상이한 역할과 더불어 살았거나 살고 있을 테지만, 이 세계 안에서,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즐거이 한 가족이다. 이제 그들은 모두에게 동일한 하나의 숭고한 역사, 하나의 위대한 공동체의 일원이다. ● 언젠가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서로는 서로에게 일종의 구원(그리스도)'이라 했다. 이는 강용면의 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일종의 진리로서 서로를 구속하는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랍비고 사제며 예언자고 교사들로서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어느덧 그가 표상한 공화체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감이 자리한다. 그것은 아마도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오작동하지 않을 것 같다는 기대감 말이다. ■ 심상용

Vol.20140704d | 강용면展 / KANGYONGMYEON / 姜用冕 / sculpture.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