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유희

2014_0710 ▶︎ 2014_0814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4_0710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수영_김용관_김주리_노상준_정승운_이수진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 휴관

LIG 아트스페이스 LIG ARTSPACE 서울 마포구 합정동 471번지 LIG빌딩 1층 Tel. +82.2.331.0008 www.ligartspace.com

공간을 다루는 작가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공간 유희 ● 공간이란 사람이나 사물이 점하고 있는 장소 또는 인간의 활동이 행해지는 장이나 물체의 운동이 그 속에서 전개되는 넓이를 말한다. 20세기 이후 내가 직접 존재하는 곳으로의 공간의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사회와 소통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시각과 감각에 대해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공간은 현상학에서 인간의 존재방식과 상관적으로 다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적 공간만이 의미공간인 것이 아니라 물리학적 공간이나 수학적 공간도 인간의 의식에 의해 구성된 의미공간이다. 전시는 공간을 다루는 작가들을 통해 다양한 공간의 유희를 보여준다. 우리가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는 공간 속에서 어떤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가? ■ LIG 아트스페이스

김수영_both sides_리넨에 유채_180×250cm_2012
김용관_변의 수가 12의 약수인 도형들로 이루어진 시계_애니메이션_00:28:48_2012

『공간의 역사』라는 책에서 마거릿 버트하임은 단테로부터 사이버스페이스까지 이르는 심원한 공간의 문화사를 미학과 물리학을 오가는 통섭의 논리로 관통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공간에 대한 이해는 중세로부터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면서 물질과 영혼의 이원론에서 물질의 일원론으로 바뀌어왔다. 그러다가 0과 1로 이루어진 사이버스페이스가 도래하면서 일원론에 갇혀서 세계를 순전히 물질 공간으로만 바라보던 현대인들에게 정신과 영혼 공간을 부활시켰다. 공간이 갖는 문화적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저자 특유의 관점은 '미술사'를 적재적소에 인용하면서 견고함을 더한다.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을 태피스트리에 촘촘히 새긴「앙제의 계시」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성스러운 도시 새 예루살렘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라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예배당 바닥에서 천장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전 생애를 천재적 필치로 그려낸 조토(Giotto di Bondone)의 '아레나 예배당'은 별도의 가상공간을 구성하고, 모든 이야기가 서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하이퍼텍스트의 밑그림이었다. 조토에게서 촉발되어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에서 확고해진 원근법은 재현의 이상이었던 영적 상상력을 물적 상상력이 대신하게 된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관찰자의 눈의 '위치'를 그림 안에 설정한 원근법 회화는 그것을 보는 감상자가 어디에 서서 보아야 할지를 지시해준다. 관찰하는 몸의 위치를 그림의 내부에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의 가상공간과 관찰자의 물질 공간을 형식적인 방법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재현뿐만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방법까지 변화시킨 것이다. 원근법 이후 서구 예술의 기본적인 뼈대는 정신의 공간에서 육체의 공간이라는 새 살이 입혀졌다. 중세 예술에서 르네상스 회화로의 이동이기도 했다. 공간을 바라보는 시점의 생성과 이동이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의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이처럼 '공간'이라는 모티프는 가장 먼 시간의 거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미술 특유의 표현방식을 잘 보여준다. ● 2014년 지금, 미술에서도 여전히 공간은 주요한 이야깃거리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공간을 좌표 삼아 작업의 지평을 넓히려는 작가들의 몸짓에서 배어나는 땀 냄새가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세속에서는 안정과 정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공간일 테지만, 유독 미술의 영토에서만큼은 생존의 불안을 증언하는 목소리로 사용되는 듯하다. 어떤 이에겐 안락한 터전이 다른 어떤 이에겐 유배지(exile)일 수 있음을 직감한 까닭이리라. 비록 그 본능적 직감이 현실의 공간에서 어떤 구체적인 힘을 생성시키지 못할지라도, 그리하여 누추한 몸짓으로 시대를 껴안는 초라한 사랑에 머물지라도, 심지어 삶의 기율에서 벗어나지 못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읽힐지라도 예술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천이라는 점을 체득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애도'로 불려야 할, 동시대를 형성하는 갖가지 공간에서 생을 이어가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삶의 태도(attitude)일 것이다. 그래서이다. 공간을 논하는 6명의 작가들이 난장을 펼치게 될『공간유희』展은 공간을 소유하는 데 생의 전부를 헌정하는 세속의 가치가 아닌, 미술이라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공간, 나아가 우리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재발명'의 시공간이 될 것이라 기대해본다.

김주리_landscape-scene01_점토, 물_48×245×245cm_2014
노상준_holiday-ocean_캔버스에 혼합재료_150×150×16cm_2012

6명의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당연히 공간에 대한 상상력이다. 김수영은 건축의 표면을 그리고 또 그림으로써 미술이 도시와 건축과 맺는 관계를 회화적으로 재현한다. 간결한 기하학적 요소들과 균질한 평면성이 상호적으로 만들어내는 건축적 이미지는 공간에 응당 따라붙는 깊이를 메꾸며 추상의 정신성마저 자아낸다. 앞과 뒤의 관계성과 평면과 입체의 경계가 무화된 김용관의 공간적 착시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선형적 인식이 만들어낸 수직적 구조에 질문을 던진다. 작업실 인근 재개발 구역의 집들이 처참한 몰골로 파괴되어가는 광경을 목도한 뒤 흙으로 집의 축소판을 만들고, 전시 전날 물을 부어서 아래로부터 서서히 침식시키는 김주리의 집은 몸의 연장으로서의, 즉 존재론적 자문자답의 공간이다. 많은 이들이 궁색하다고, 그래서 말끔히 정리해서 새로운 풍경을 일구어야 한다고 믿는 이 시대에 작가는 그 풍경이야말로 삶의 원초적 뿌리임을 굳세게 믿는다. 아울러 흙으로 낡은 집의 외벽 타일 무늬까지 완벽하게 재현한 그녀의 집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은 일상의 도처에 내재한 우리 안의 파시즘일 거라고, 나는 믿는다. 뒤바뀐 공간에서의 낯선 풍경을 재기발랄하게 포착한 노상준의 공간은 도시 속 개인의 외로움과 소외감이 스미어 있다. 오브제와 텍스트, 설치 등의 복합적인 장치와 단서들을 조합시켜 특정 공간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이수진은 개인 혹은 집단의 심리, 행동 패턴으로 만들어지는 공간의 시각적인 정황과 그것을 통해 산포되는 심리적 경험과 맥락, 상호관련성을 '공간'으로 보여준다. 나무로 조각적 입체를 일구고, 공간에 줄을 매다는 회화가 아닌 방식으로 궁극의 회화성을 탐색하는 정승운의 작업은 공간의 깊이와 회화의 평면성을 동시에 껴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기억될 것이다.

이수진_Luminizing Sequence 빛이 되어주는 사건들_ 도자 타일, LED 조명, 공, 대리석, 혼합재료_가변크기_2013
정승운_공제선_실에 유채_가변크기_2014

물론, 공간을 매개로 한 전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래서『공간유희』展이 강조하는 것은 공간에 대한 단순한 서사성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왜 다시 공간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라는 서사적 책임감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어떤 이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로, 어떤 이는 과잉의 제스처로 발산하는 서로 다른 공간에 대한 감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 작가들은 자신의 누추한 공간으로 우리를 불러들였다. 그 공간을 삶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무방하기에 그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통제할 수 없는 공간적 상황에 놓인 예술가의 고군분투를 눈앞에서 목도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 아니던가. 그들의 고통이 깊어질수록 그들을 방문하고 돌아서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워질 것이다. 나는 그 유희가 좋다. ■ 윤동희

Vol.20140710d | 공간유희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