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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0702_수요일_06:00pm
PT&Critic / 2014_0705_토요일_05:00pm 패널 / 강석호(작가)_김연용(작가)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02:00pm~08:00pm / 주말_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SPACE WILLING N DEALING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225-67번지 B1 Tel. +82.2.797.7893 www.willingndealing.com
파국의 소실점 ●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 (공산당 선언) 1.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 감독의 영화, 자브리스키 포인트(Zabriskie Point, 1970)의 마지막 장면에는 문명의 이기와 자본의 기호들이 산산이 조각나 흩어지는 폭발과 파열의 광경이 펼쳐진다. 여기서 자신의 위엄을 뽐내던 호사스런 건물 전체는 무참히 파괴되고 소비산업사회의 상징으로 표상되던 수많은 상품은 모두 풍비박산 나버린다. 자본과 권력의 환영들이 한순간에 혁파되어버리는 이 매혹적인 파국의 장면에는 실현되지 못한 혁명으로부터 한 개인의 상상이 만들어낸 묵시록적인 서사가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다. ● 세계의 완고함에 대한 저항의 현실적인 불가능성 앞에서, 외상과 환상을 통해 균열의 틈을 발견하고 그것의 실재를 드러내려는 욕망은 종종 격렬하고 잔혹한 이미지의 파국적 풍경으로 제시되곤 한다. 그러한 욕망이 한 개인의 비극적 상상에서든 혹은 집단적 무의식의 현현에서든, 결국 파국의 서사에서, 견고한 모든 것은 근원에서부터 파열되고 대기 속으로 흩어져버리는 이산의 순간을 통과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이 세계에 만연한 허무에서 비롯된 세계의 끝을 향한 충동만은 아니다. 파국을 향한 의지는 아마도 정상성의 세계가 가상과 허위의 세계로 판명되어 처참히 무너져 내려 우리에게 전복과 해방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과거와 단절하여 새로운 것을 찾아내려는 우리 자신에 내재한 창작의 잠재성을 추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천창환의 파열의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폭력의 감각과 부정의 정념은 자본과 권력의 수많은 상징적 기호들을 파국의 소실점으로 이끌기에 전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의 작업에서 이미지를 대하는 파열의 강도가 그가 가진 폭력의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미지와 의미의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그에게 부정의 정념이 얼마나 큰지를 충분히 가늠하게 해준다.
특히 그의 작업에서 세계를 대면하는 폭력과 부정을 향한 의지는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이미지의 조각들에 각인된 것만큼이나, 세계로부터 분리된 개별 이미지의 삶에 이미, 모두 투영되어 있다. 차이의 메커니즘을 통해 세계를 분할하며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의 분절된 이미지는 폭력적인 세계상으로부터 파편화한 부분들의 삶까지 모두 연결된다. 그래서 작가가 선택한 개별화한 이미지는 세계로부터 이미 떨어져 나온 파국의 원풍경이지만, 그것은 그의 작업들이 펼쳐내는 파편화한 세계에 모두 바쳐진다. 아마도 그가 제시하는 파국의 장면은 총체성이 깨져버린 세계에서 기표들의 잔해들이 놓인 이미지의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최소한 그의 작업에서, 분절된 세계에 대한 미분화한 체험이 말해주는 것은 세계를 단순히 나누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닌, 파편화한 세계란 우리 시대의 전제 조건이라는 점이다. 세계의 부분으로서 끊임없이 연쇄하는 기표들의 세계는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만큼, 이미 언제나 파국의 소실점을 향해 있었을 것이다. ● 부분으로서 세계에 정주하는 이미지를 파편화한 조각들의 부분으로 나누는 것, 여기서 그가 부분에 천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꽤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파열의 이미지가 작업의 미적 구조로 전환된다는 점에서일 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의미의 문제를 그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작가는 작업 안에서 의미를 위해 기능하는 그 어떤 미적 장치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단지 그는 세계로부터 파편화되어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부분으로서 호명하고, 평면 위에 예상 불가능한 위치와 각도로 산포시키는 것이 전부이다. 주어진 이미지를 매번 서로 다른 형태로 분할하는 그의 미적 실천은 단지 접힌 천이 펼쳐짐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재배치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기계장치처럼 미리 정해진 규칙에 의해 단지 부분으로서 기능하는 것들이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파열의 이미지는 강렬한 저항의 서사나 혹은 도래할 상상적 파국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표들의 위치와 방향, 힘이 만들어내는 부분들의 위상학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파열의 이미지가 결국 어떠한 의미도 취하지 않는 파편들의 좌푯값이고, 형상 없는 질료이며, 따라서 심도 없이 기표의 밀도만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추측건대, 작가는 이를 통해 이미지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파국은 단지 시각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이미지와 의미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위기와 단절의 국면으로 전환된다. 언제나 의미를 초과하여 존재하는 이미지의 근본적인 조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그가 결국 파국의 끝 지점까지 이미지를 잘 지켜내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우상파괴자가 아니다.
2. 예술작업이 우연의 결과를 목적에 두는 것과 그것이 우연을 포함하는 구조에 기대어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우연을 미학적으로 특별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닌,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는 우리 세계의 일부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나에게 여전히 흥미로운 것으로 남는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술에서 실패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작업의 미학적 성패 여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의도가 작동하지 않는 지점에서, 의도는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포함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그의 작업 안에서 의사-우연을 통해서만 비로소 전해질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언뜻 생각하는 우연한 조건이 만들어내는 예상치 못한 형상의 결과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작업이 의미나 해석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그의 작업이 작업 바깥에서 작동하는 비미학적인 기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 창작의 층위에서 작가는 이미지의 우연적인 결과에 주목하지만, 감상의 층위에서 관객은 작업의 결과로부터 이미지의 본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한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움직이는 두 개의 충동을 둘러싼 시선의 교차가 그의 작업 주위를 항상 맴돌고 있다. 이미지와 의미의 파국만큼 작업이 놓인 운명의 파국은 작가와 관객의 시선이 만나지 못하는 곳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분명 의도가 실패하는 지점이지만, 진정한 우연의 세계는 이렇게 의도 바깥에서 우발적으로 우리를 엄습해온다. 진정으로 미적인 것과의 대면은 아마도 자신의 고유한 사유와 실천을 그 한계 바깥으로 노출하는 경험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의 작업이 우연을 가장한 의도일지라도 그것답게 우연이 의도의 실패를 위해 놓인다면, 의도된 우연은 작업에 대한 그 어떤 미적 당위를 갖추는 것보다 그의 작업에서 단연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 김연용
Vol.20140713b | 천창환展 / CHUNCHANGHWAN / 千昌煥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