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집 재생프로젝트 9

공모당선 작가展   2014_0718 ▶︎ 2014_0930 / 공휴일 휴관

1부 초대일시 / 2014_0718_금요일_05:00pm 2부 초대일시 / 2014_0812_화요일_05:00pm 『아홉 개의 사다리』展 초대일시 / 2014_0827_수요일_05:00pm

1부 / 2014_0718 ▶︎ 2014_0727 오종원 / 오종원 기획-김덕수 개인展 유목연 / MY Cooking Class_The Old House展 2부 / 2014_0812 ▶︎ 2014_0823 김현주(ex-media) / 아귀다툼-인간/기계/동물의 네거티브 피트백展 퍼포먼스 콜레보레이션 / 성혁_홍승비(열혈청년예술단) 일시 / 2014_0812_화요일_06:00pm 최성록 / 그 집에 빛展 초대展 / 2014_0827 ▶︎ 2014_0930 조소희 / 아홉 개의 사다리展

주최,기획 / (사)캔파운데이션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12:00pm / 01:00pm~06:00pm / 공휴일 휴관 * 주말은 비정기적으로 운영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를 참고바랍니다.

오래된 집 Old House 서울 성북구 성북동 62-10,11번지 Tel. +82.2.766.7660 www.can-foundation.org

(사)캔 파운데이션은 성북동의 두 채의 낡은 가옥을 작가의 레지던시와 전시공간으로 활용한 오래된 집 재생프로젝트를 6년간 진행해 오고 있다. 본 프로젝트는 매년 공모를 통해 오래된 집과 함께 호흡하며 오래된 집에 스며있는 시간의 흔적과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풀어 나갈 참여작가를 선정해 왔다. 특히 이번 오래된 집 재생프로젝트9기는 장마프로젝트와 조소희작가의 초대전으로 구성되며, 이 중 장마프로젝트는 7월, 8월의 장마기간을 접목하여 흥미로운 퍼포먼스와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본 프로젝트는 지난 6월에 진행된 공모의 지원작가 중 선정된 김현주, 오종원, 유목연, 최성록의 전시가 각각 1부(오종원, 유목연), 2부(김현주, 최성록)로 나누어 진행된다. 60년 이상 된 오래된 집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장마기간이 맞물려 만들어질 이번 프로젝트는 오래된 집의 새로운 읽기를 제공 할 것이다. ■ (사)캔파운데이션

오종원_오종원 기획-김덕수 개인전 포스터_2014
오종원_김덕수씨와의 인터뷰 영상_2014

7월 18일부터 27일까지 성북동 소재한 오래된 집에서 오종원이 기획한 김덕수의 개인전이 열린다. 기존 시스템과 예술의 관계에 관심을 갖던 오종원은,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내러티브가 예술로서 정의 내려질 수 있을까 궁금해하여 본 전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 2013년 말 우연히 김덕수를 알게 된 오종원은 처음엔 아버지 뻘인 그에게서 한동안 큰 세대차이를 느꼈지만 짬짬이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삶, 그리고 산업의 역군이라고 불려왔던 전후 세대의 삶이 무척이나 극적이라 느꼈다. 57년생인 그는 6명 중 셋째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철이 들기도 전에 당장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형편이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손재주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따로 미술은 커녕 학업조차 자신의 힘으로 겨우 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구들장 장사를 돕다 돌을 떨어뜨려 허리를 다치고, 학교 운동 중의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는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다. 스스로의 삶이 결코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실제 그가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꿈을 펼치는 행위는 남의 얘기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삶의 여유를 가지고 나서 우연히 잡게 된 붓은 그에게 희망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늦은 나이에 막 시작한 그림이지만 자신이 꿈 꾸었던 '그림 같은 풍경을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에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꿈을 품었던 시기'를 회상해보고자 한다. ● 마침 오종원은 예술을 상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결과물을 떠나 작가의 삶이라던가 시대의 변화 등이 영향을 미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예술로서의 평가 기준으로 삼게 되는 오묘함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이 세상으로부터 가치를 부여 받는 행위 같았고 만약 그것이 예술 지표의 한 점이라면, 김덕수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과연 그의 그림과 이야기들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지게 될 것인가에 대한 실험을 하고자 한다. 이것은 과연 예술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오래된 집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공간의 특수성이 매우 강한 곳이다. 단순히 낡은 벽과 지붕이 있어서가 아닌 누군가가 살아오고 관리하였던 집이었기에 그 특유의 존재감이 있다. 왜 물건도 사람과 오래 살면 영혼이 깃든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오래된 집은 단순한 공간 이전에 자기 자신을 매우 강렬히 어필하려는 듯, 들어오는 이들을 자기 아가리 속에 집어넣으며 다른 가치의 무엇인가로 바꾸어 낸다. 이곳에서 태어나는 작품들은 단순히 어떤 작가의 작품이라기 보다, 그 작가와 공간이 짝짓기를 한 듯 새로이 잉태되는 것이며 공간 스스로가 현실을 거부하고 다시금 태어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나는 김덕수씨의 삶과 그의 그림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의 뒤늦은 그림 역시 자신의 오래된 몸뚱이를 순순히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래된 집에 김덕수씨의 그림을 놓음으로 공통점이 많은 둘, 오래된 집과 김덕수씨의 삶이라는 콜라보레이션을 시도하려 한다. 다만 나는 결코 극적인 삶과 작업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려는 것은 아니며 단순히 그 동안 실험대 위에 늘어져 있던 예술 판단의 한 표본을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 동안 내가 배워온 현대미술, 그리고 예술성의 판단이란 것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있는데, 만약 극적인 삶과 작품을 통한 공감대가 예술로 판단되는 계기가 된다고 가정한다면 오래된 집과 김덕수씨의 인생이란 듀엣은 그런 맥락에서 중요한 샘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오종원) 중요한 것은 예술이다 아니다란 평가가 쉽고 어렵고를 떠나 누군가의 인생을 하나의 평가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서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시대가 지날수록 점점 문화예술에 대중의 관심이 쌓이는 것과는 별개로 현대 예술은 모든 이에게 이해되거나 인정받지는 못하며, 특히나 얼마 전 모 케이블 방송을 통해 미술이라는 장르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면서 몇몇의 평가단들이 나름의 잣대로 무엇은 뛰어나고 뛰어나지 않고를 결정하였다. 또한 언론에서는 종종 특정 작품의 가격이 대중들의 상식을 초월하였을 때 마치 그들만의 리그라는 식으로 비판적 표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들이 벌어지는 사회 속에서 오종원은 앞서 말한 예술이라고 정의 내리는 과정이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점이라 표현한다. 예술로서의 평가와 위치는 개인의 작업을 넘은 외부의 영역이며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시대의 가치관과 합의하거나 혹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가리는 것, 평가를 내리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또한 예술이라는 장르만큼 시대가 흐를 때마다 호불호가 갈라지고 민감한 영역도 없을 것이다. 고로 오종원이 말하는 예술로서의 평가라는 문제도 누군가에게 쉽고 극명할 수 있으나 또 누군가에게는 무척이나 난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이 전시를 통해 자신이 품었던 고민에 대해 해법이라던가 분명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이해는 되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영역이라 생각하며 의문 그 자체로서 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스스로가 정답을 못 내리는, 혹은 머릿속에 계산은 끝났지만 정답을 내리길 유보하고자 하는 지금 이 상황에서, 어쩌면 이 전시는 스스로 슬라이드 속의 샘플이 되고자 하는 그의 어리석은 풍자일지도 모른다. ■

유목연_MY Cooking Class_The Old House展_오래된 집_2014
유목연_Guidebook Series-The Kitchen # 007_페이퍼북_15×21cm_2014

살아가면서 가장 흔하고 쉽게 접하는 음식을 직접 만들려고 했을 때 밀려오는 혼란을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 무엇이 달면서 신맛을 내는지 등 크고 작은 고민과 무수한 선택의 연속, 그리고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견해의 차이들은 천차만별의 요리를 만들게 한다. 요리강좌를 통해 차이에서 오는 다름을 보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은 차이에서 오는 맛의 변화는 오감을 통해 감지된다. 요리란 그런 것이다. 보면서 먹고, 음식향을 맡으면서 먹고, 씹으며 촉각을 느끼고, 소리를 듣어 맛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이번 요리교실이 각자의 감각이 풀가동 되는 순간 작고 오래된 집에 소박한 음식을 들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각 지역 요리고수로부터 전수받은 전설적인 유목연 쉐프의 요리! 그 기원을 찾아 떠나본다. 다소 어려운 듯 보이는 한식 일품요리의 비법이 낱낱이 공개될 예정이다. 오래된 집에서 진행될 요리강좌「MY Cooking Class」는 목연쉐프의 요리노하우를 선보이는 자리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경험한 작가의 음식에 대한 견해를 강좌를 통해 풀어낼 계획이다. ■ 유목연

김현주(ex-media)_아귀다툼 part1_부부, 영상사운드 설치_가변크기_2014
김현주(ex-media)_아귀다툼 part3_기계, 기계사운드 설치, MCU, 센서, 모터, 플라스틱_가변크기_2014

언제부터 나와 내 주변의 삶이 전쟁터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미치듯 격렬히 싸워 가지지 않으면 존재의 끝을 볼 것만 같은 총체적인 불안은 존재하는 관계를 다양한 종류와 층위의 네거티브 피드백으로 점철시킨다. 아귀(餓鬼)다툼이다. 그것은 집이라는 아주 사적인 공간에서부터 직장, 학교, 의회, 국회, 농성장, 전쟁터 등의 다양한 공적 공간까지 증오와 원망, 분노의 참을 수 없는 분출과 격한 물리적 충돌을 동반한다. 탐욕과 몰이해, 동물적 감정과 생존에의 본능은 이성적 인간을 삼키고 인간을 격하게 꿈틀거리게 한다. 나는 약간은 어둡고 습기 찬.. 사람의 기억, 묵은 감정, 공간의 괴기함이 함께 뒤섞여 있는 곳이 필요했다. 거기서 나는 "아귀다툼"이라는 다소 불편한 주제를 두고, 미디어실험과 설치로 공간을 재구성 해보고 싶다. 축축한 장마와 무더위의 기간 오래된 집은 이러한 아귀다툼의 기억과 네러티브를 담고 있는 공간이 된다. 사적인 공간으로서 오래된 집은 몇 가지 층위로 다툼을 상징화, 시각화하는 공간이 된다. 이것은 예전에 이 공간을 살았을 법한 가상의 부부 사이에 일어 났을 수도 있는 그들만의 은밀하고 집요했던 갈등과 이후의 깊은 상처에 대한 기억이라 할 수도 있겠다. 오래된 집은 이들의 전쟁터이자 외부로부터 이 사적인 전쟁을 은닉시키는 역설적 방공호이다. 공간은 이들 부부의 서로에 대한 비난과 절규, 외침의 소리들로 둘러싸여 있고, 곳곳에 이들 다툼의 흔적들을 관객은 더듬어 나간다. 이것은 영상과 오브제의 상징적 배치를 통해 집의 현관을 들어서며 부터 나오기까지 연결된 가상적 네러티브를 완성한다. 상징과 보완의 장치로서 나는 여기에 덧붙여 동물적, 기계 생명체적 요소를 함께 접목하고자 한다. 눈에 보이는 감정적이고 격렬한 다툼은 이들의 몫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그들의 다툼이 아닌, 우리의 전쟁터를 연상시킨다. 전시의 일환으로 Ulay와 Abramovic의 1978년 "AAA-AAA" 퍼포먼스(열혈예술청년단의 성혁과 홍승비를 초청한 콜레보레이션 퍼포먼스)를 성북동의 오래된 집에서 재현해 보고자 한다. ■ 김현주(ex-media)

최성록_stars_페인트된 창문에 칼로 드로잉_38.5×69cm_2014
최성록_The Flashing Window_HD 애니메이션_00:02:00_2014

그 집이 기억하고 상상하는 빛 ● 지어진 지 60년이 되어간다는 그 집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유지한 채 그 존재의 의미를 잃고 그대로 남겨져 있다. 주인 없는 빈집은 수직적으로 팽창하는 주변풍경들에 묻혀 그 집의 높이와 역사를 간직한 채 남겨져 있다. 매일매일 그 집에 오고 가던 빛은 점점 그 집에 다가가지 못하며 빛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공간과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이번 오래된 집에서 진행될 공간설치 프로젝트는 인간의 눈이 빛을 감지하면서 시작된 빛에 대한 갈망과 빛이 만들어내는 현상과 사건을 증명하며 기억하려는 시도로부터 시작되며 그 빛이 이 오래된 집이라는 공간에 남기고 간 것들과 남겨진 것들을 드로잉, 애니메이션, 프로젝션 맵핑을 통해 기록하며 증명하며 상상하는 몇 가지의 실험을 해보려 한다. ■ 최성록

조소희_네사람_비디오 퍼포먼스, 단채널 영상_00:03:00_2009

1. '오래된 집'과의 화해 ● 현대 미술가가 공간을 대할 때의 태도를 볼 때면,『노인과 바다』에서 "인간은 파멸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한 산티아고의 대사가 오버랩 되곤 한다.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의 몇몇 작품에서도 이러한 비장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만큼 작가들에게 있어 이 '장소(place)'가 중립적인 의미의 '공간(space)'이 아님은 분명하다. 조소희 역시 이 곳이 탐났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결론을 얘기하자면 조소희는 결국 장소와의 싸움을 내려놓았다. '파멸'과 '패배'를 애써 구분 지으려는 예술가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오랜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이곳을 장악하기보다 오히려 그것 자체를 작품화하는 것으로 화해를 시도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 성북동 62-10, 11번지. 이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는 장소 특정성의 전형이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스페이스 캔 역시 "오래된 집이라는 공간을 해석하고 그 안에 켜켜이 쌓여 있는 시간과 흔적들을 작품으로 풀어냄으로써 또 다른 집을 생성해 가는 과정을 내보이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김성희, 「시간과 흔적의 축적에서 공간의 중첩으로 -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 2쪽) 정제된 화이트 큐브가 아닌, 80여 년의 성북동 역사와 주거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한 이 사연 많은 장소는 그 자체로 작품이다. 때문에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는 작가와 작품이 얼마나 이 장소에 녹아들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것은 사실 오래된 집을 정복하는 것보다도 더 난해한 과제임에 틀림없었다. 거미줄, 곰팡이, 덜컹거리는 미닫이 문, 손바닥 만 한 마당과 그 한 켠에 서 있는 수돗가 등, 하나하나시간과 내러티브로 가득한 이 공간에 작품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녹아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 장소를 대하는 조소희의 시각은 달랐다. 그는 이 곳을 장악하려들거나, 애써 변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이 공간에 흡수되도록 작품을 최소화 했다. 왜냐하면 오래된 집이 가지고 있는 그 '오래됨' 다시 말해 '시간의 축적'이나 그것에서 빚어진 '기억들'이 곧 조소희의 작품이었고, 또 실제로 그녀가 지금까지 지속해서 보여 준 주제였기 때문이다.

조소희_아홉 개의 사다리_사각봉_가변설치_2014

2. '나' 된 것"나는 이 가벼움과 무게의 중간쯤에서 자유로이 부유하는 형태를 존재의 모습이라 여기고 있다. 이는 늘 '의문형'이며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쪽에도 저편에도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극 모두를 끌어안고 있는, 어쩌면 양편의 구분자체가 불가능한 포괄적인 '중간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조소희) 2002년의 전시『지영의 장롱』을 시작으로 연이은『두 개의 방』,『여행voyage』, 그리고 최근의 전시『사적인상』과『Salon de Hyaloplasm』전에 이르기까지 조소희가 그동안 보여 준 작품들에는 시간과 기억, 그리고 지속성과 동떨어진 부분을 찾을 수 없다. 매일 조금씩 실을 짜서 길이를 늘여가는 띠, 날마다 한 구절씩 타이핑하는 두루마리 휴지, 또는 한 장씩 한 장씩 겹쳐져 이제는 제법 두툼한 두께가 된 하얀 종이 십자가까지 이전부터 조소희 작품은 시간과 기억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오래된 집을 살리는 이 재생 프로젝트에 조소희가 초대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작품 오브제로서 이 낡은 집을 선택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을지 모른다. ● 많은 현대 미술가들이 장소 특정성을 내세우면서도 결국 그렇게 선택한 장소를 배경화하는 상대적인 태도를 보인 것과 비교하여 조소희는 장소 자체를 또 하나의 오브제로 선택하였다는 시각에서부터 출발점을 달리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가 공간과 작품을 타자화하는 것이 아닌 작품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동일시 또는 자기화하는 것에서부터 가능했다. 오래된 집에 켜켜이 쌓인 시간처럼, 조소희가 선택한 장소와 그곳에 흡수된 작품은 작가의 삶, 곧 조소희의 '나 된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매일 아침 작업실에 도착하여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해야 하는 작업들, 심지어 전시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타이핑, 실 짜기 등의 '일상'을 지속적으로 작업해 왔으며, 오래된 집은 이러한 일상의 응축이라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조소희의 작업은 특정 형태가 계획되어 있어서 완성의 단계로 종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매일 반복 해왔던 일들을 축적한 '나 된 것'이 바로 작품이었다. 방식 뿐 아니라, 작품의 재료 또한 삶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루마리 휴지, 선물 포장용 습자지, 실, 초 등은 값 비싸거나 특별한 재료가 아닌, 연약하고 유한한 삶 자체를 보여준다.

조소희_아홉 개의 사다리_실_가변설치_2014

3. 유한의 미학 그리고 자유 ●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스펙터클하지도, 서사적이지도, 압도적이지도 않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환영(illusion)을, 그것도 할 수만 있다면 근사해 보이는 환영을 추구하여 온 미술가들의 오랜 전통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실제적 삶' 앞에 부인할 수 없는 회의에 부딪히게 된다. 환영이 더 스펙터클하고, 웅장하면 할수록 유약한 실재 앞에 그 거대함은 더 초라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조소희가 선택한 재료들, 예를 들어 천 조각, 종이, 실 등의 물질성은 대개 가늘고 약하고 부서지는 한계를 가진다. 또 아주 작은 자극에도 더럽혀지고 흩어지고 찢어진다. 연약하고 낡아지는 실제의 삶과 같다.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의 유한함에 대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의 기저에 흐르는 감정은 결코 허무하지 않다. 오히려 유한함이 가치를 더하여 준다.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존재에 가치를 부여한다. ● 조소희의 작품이 비관론으로 치우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시적인 아름다움과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물리적 부피와 질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어느 면에서 비물질적이다. 오를 수 없는 실 사다리, 신을 수 없는 거즈 신발과 드레스 또한 비물질적(dematerialization)이다. 하얗게 빛나는 사다리의 실들은 오래된 집 안까지 새어들어 온 가느다란 빛줄기처럼 보인다. 또한 조명에 의해 벽과 바닥에 생성된 실 그림자들은 우연적 드로잉이 된다. 견고하지 않으며 가변적이고 정형화되지 않은 조소희의 작품은 이처럼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자유롭게 유희하는 듯하다. 비물질적 요소가 보여주는 자유로움과 유희는 재료의 물질성이 나타내는 유한함과 약함을 신비와 시성(詩性)으로 바꾸어주었다. 작가는 이러한 즐거움을 본능적으로 체감하는 듯하다. 조소희가 특정한 형태와 이미지에 대한 강박적 태도와 조급함이 없다는 것 또한 그가 재료의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경계에서 이미 충분한 만족과 유희를 누리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바꾸어 말하면, 무엇인가 규정하고 추구해야 하는 부담과 피로함에서 탈피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소희_아홉 개의 사다리_실_가변설치_2014

4. 아홉 개의 사다리 ● 그런데 이번 전시『아홉 개의 사다리』에서는 진행형의 삶에서 더 나아가 또 다른 변주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사다리의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하늘이 보이는 한 뼘 크기의 마당 한쪽 구석에 새빨간 사다리가 6미터 높이로 솟아 있고, 여덟 개의 어두운 방마다 실 사다리가 늘어서 있다. 디딜 수 없는 이 사다리들은 낡은 집의 벽만큼이나 소박하게 세워져 있다. 사다리의 의미에 대해 작가는 고정된 해석을 보류하였다. 그러나 사다리의 원래의 기능이 한 공간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 특별히 수직 이동을 목적한다고 보았을 때, 욕망과 고양, 또는 높은 곳으로의 방향성이나 또는 어느 곳에도 속한다고 볼 수 없는 진행 과정, 혹은 차례로 겪게 되는 단계(step)에 대한 의미일 수도 있겠다. 이러한 의미들 중 어떠한 사다리인지 상관없이, 이것은 기능을 박탈당한 사다리이며, 목적이 좌절된 사다리이다. 그러므로 이 사다리는 상승으로의 방향을 지시하는 존재로만 머물러 있다. 이처럼 사다리 자체는 분명 목적과 이상이 될 수는 없지만, 아홉 개의 사다리들은 그러한 이상과 절대성이 존재함을 지시하고 있다. 때문에 거친 공간과 그 곳에 기대어진 사다리들은 단순히 고됨과 연약함이라는 이원적 대비가 아니다. 이들은 고통스러운 일상이자 동시에 깨어질 수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삶이기도 하다. 좌절된 존재에도 불구하고 다다를 수 없는 방향으로나마 뻗어 가려는 '나'이며, 이 필연적인 좌절은 또한 역설적으로 절대성을 가리키고 있는 '나'를 마주하게 만든다. 오래된 집과 사다리, 그리고 '나'는 이처럼 유한한 존재, 좌절된 존재로서의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진행 중에 있고 계속해서 갈망한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규정하려 들지 않고, 목적과 결과를 고집스레 이루려 하지도 않는다. 스펙터클하지도 않고, 장엄하지도 않으며, 서사적일 필요도 없다. 이렇게 존재의 유한함, 좌절, 연약함을 가장 실제적인 모습으로 드러내면서, 과대 포장의 욕망도 스펙터클의 탐욕도 지성의 날카로움에서도 벗어나 한 없이 자유로울 수 있고, 유희할 수 있게 한다.

조소희_아홉 개의 사다리_실_가변설치_2014

"내가 짜는 그물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구멍들을 따라 그 '결'들을 음미하는 것이 존재를 인식하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마치 발을 담그고 있는 강물에서 발가락 사이를 스치고 흐르는 물의 시원함, 간지러움, 그 물의 결을 음미하는 것과 같다. 이는 머리를 짓누르는 강에 대한 사유가 아니고 물과 그 흐름에 관한 촉각적인 즐거움인 것이다." (조소희)이상윤

Vol.20140718a | 오래된 집 재생프로젝트 9-공모당선 작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