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의 생물학 The Figural of Life Forms

함준서展 / HAHMJUNSEO / 咸俊瑞 / animation.painting   2014_0808 ▶ 2014_0821

함준서_개념적 네발 동물_디지털 C 프린트, 디아섹_84×118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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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준서 홈페이지_www.qbodp.net

초대일시 / 2014_0808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더 미디엄 THE MEDIUM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32-27번지 3층 Tel. 070.4084.8965 www.themedium.co.kr www.aliceon.net

이미지의 형상성에 관한 해체와 환대 ● 오리를 닮은 개가 있다. 지면에 붙어버린 생명체도 보인다. 문자를 닮은 개체와 더불어 이종생명체로 인식되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함준서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모습이다. 우리 인식의 범주에서 낯익은 듯 낯설은, 세상의 모습에 기인하지만 존재할 수는 없는 개체 혹은 생명체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둘러싼 환경에서 이러한 캐릭터들을 발견한다. 창조가 아닌 발견이라는 수식은 그가 견지하고 있는 자세를 설명한다. 그는 실제 세계에서 마주하는 환경적 요소들로부터 캐릭터들의 기본적인 라인들을 추출하고 이를 자신의 세계 속으로 편입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개체들이 어느 한 부분에서는 반드시 이질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은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현상의 추상적 이미지로서, 특히 단순화되고 압축된 모습으로서 묘사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의 숙명이 그러한 압축과 추상 과정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오히려 실제의 순간을 보다 더 현실적으로 그려낼 때, 그리고 구상적 모습으로 재현될 때 몰입적 힘을 획득한다. 그러나 이미지가 지시-대상에 대한 가상적 차원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처럼, 애니메이션은 이미지의 기원적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일종의 매체적-도구로서의 운명에 얽매인다. 애니메이션은 이미지에 숨을 불어넣어 하나의 생명으로서 탄생시킨다. 그러나 그 근원적 힘은 다분히 이미지 스스로의 욕망에 기초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또한 그러한 역사의 흐름과 밀착되어 파생되어 왔다.

함준서_돌고래 늑대_지클 프린트_70×118cm_2014
함준서_오리개_디지털 C 프린트, 디아섹_59×84cm_2014

과거로부터 이미지와 움직임은 늘 그렇듯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요소였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이 멈추어있지 않기에, 이미지는 부단히 스스로의 움직임을 욕망했고, 다양한 아니메「animé」 도구와 기법은 이를 현실화시켰다. 애니메이션에게 누가 그러한 의무감을 부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니메이션은 우리의 상상력을 북돋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따라서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현실의 기준과 잣대를 초월한 캐릭터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하나의 율법은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 기반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생명체에 관한 진지한 애니메이션이라면, 그 세계 속의 개체가 가진 생물학적 기관들의 작동과 이에 대한 기관-묘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묘사를 뛰어넘어 이종의 생명체로 존재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개체들의 현실화 가능성은 애니메이션 세계 속에서는 일종의 상상력과 가능성으로 구현될 수 있지만, 결코 그것이 우리 세계와 중첩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분명하다. 또한 매체로서의 애니메이션은 이미지의 근원적 한계까지 물려받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도 정지된 캐릭터의 단면과 그의 운명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되어버렸다.

함준서_연결체_디지털 C 프린트, 디아섹_59×84cm_2014
함준서_가시발 둥근 생물_디지털 C 프린트, 디아섹_59×84cm_2014

함준서의 작업은 이러한 이미지의 존재론적 한계와 그로부터 이미 설정되어 버린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적 범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이러한 두 가지의 개념적 선 사이에서 작동한다. 진지하지만 기존의 생태-시스템적 규율에 얽매이지 않으며 따라서 다분히 역설적이다. 그에게 있어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는 부인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특정 시스템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은 이러한 시스템의 틈을 드러내는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기능한다. 틈을 드러내기 위한 캐릭터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그들은 모두 이질적 생명체이다. 애니메이션의 근간이 생명을 불어넣는 힘에 있다면, 그의 작업 또한 이에 충실하다. 따라서 여타의 애니메이션들처럼 무생물도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캐릭터들의 이질성은 그러한 생물학적 변이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닌, 각각 개체의 현실적 지시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부분에서 발견된다. 현실에서 그와 유사한 요소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결코 그것으로 완전한 개체 전체를 서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준서의 캐릭터는 친밀하면서도 언캐니「uncanny」한 감정을 유발하는 개체가 된다.

함준서_평면고릴라_디지털 C 프린트, 디아섹_59×84cm_2014

그의 작업의 두 번째 특성은 그가 추구하는 이미지/애니메이션이 기술적 형상으로서의 새로운 그림「이미지」을 표방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분은 매체철학자인 빌렘플루서「Vilém Flusser」의 언급과 그 맥을 같이 하는데, 작가가 컴퓨터를 기반으로 디지털적 프로세스만을 보여주는 작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본래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술적 형상의 의미가 디지털 프로세스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디지털 알고리즘이 지닌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현상학적으로 보자면, 그림「이미지」과 문자「텍스트」는 각각 선사와 역사 시대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 요소로서 스스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플루서는 전통적인 그림을 인간이 주체로서 객체를 관조함으로써 생긴 주변세계「환경」와 틈을 메우기 위해 창조된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이미지는 상징들로 덮힌 평면이 된다. 그러나 텍스트의 등장으로 인해 이러한 상징과 상상의 영역은 개념적 관계들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작가가 주목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러한 개념적 관계들은 이미지들에 일종의 관념을 부여하여 상상의 여지를 제거해버리는 부작용 또한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작가의 역설적 캐릭터들은 이중의 임무를 수행한다. 즉, 현실에 기반한, 그러나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일종의 언캐니「uncanny」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도구인 동시에 텍스트들이 만들어놓은 일종의 선형적 의식을 뛰어넘고 이후의 단계를 촉발시키는 이성적 개체로서 기능한다.

함준서_Walking Follows Form_CG 애니메이션_HD_00:02:45_2014

함준서는 이를 자신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내포하는 '형상성「形象性」'이라 칭한다. 그러나 문학 작품에서 발현되는 형상성이 사상을 형상으로 파악하고 이를 텍스트로 제안하는 것이라면, 그의 작업은 이러한 과정을 전복시킨 구조를 보인다. 때문에 역-형상성에 해당하는 흐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즉, 캐릭터들의 모습을 통해 의미와 사상을 해체시켜버리는 프로세스를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독자들의 적극적 개입이 전제된다. 우리는 이미지에서 기호를 읽는다. 그리고 이러한 기호가 이미 구축해놓은 관념적 세계 속에서 안전하게 작품을 감상한다. 그러나 함준서의 작업은 이러한 안전한 감상보다는 불편한 의심을 촉구한다. 이것이 그가 시도하는 시각적 프로세스의 해체적 접근이자 새로운 기술적 형상에 관한 환대이기 때문이다. ■ 유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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