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ity on the Reality

캔버스에서 모니터까지展   2014_0814 ▶ 2014_1019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4_0814_목요일_06:00pm

1부 / 2014_0814 ▶ 2014_0914 참여작가 / 김창겸_유현미_김지은_권구희_박진아_최혜련 2부 / 2014_0919 ▶ 2014_1019 참여작가 / 이경미_신건우_성유진_정직성_김근중_강이연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협찬 / 운생동 건축사 사무소(주)_월간객석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갤러리 정미소 ART SPACE GALLERY JUNGMISO 서울 종로구 동숭동 199-17번지 객석빌딩 2층 Tel. +82.2.743.5378 www.galleryjungmiso.co.kr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 국가체제, 법, 경제, 정치, 문화, 예술, 도시, 여가 등에서 끊임없이 좀 더 새롭고 극적인 것들을 찾아내며, 그 욕망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나 외의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고려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쉽사리 망각한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울타리를 만들고 또 그 안에서 최고로 풍요롭고 편안한 체계 안에 서 숨어 지낸다. 단연 이 부분이 최고 권력계층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그 위치에 적합하게, 각각의 수준에서 그러한 행위를 하며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다. 거대한 인간의 욕망을 앞에 두고, 시각예술파트에서 언급하고 발전 시 킬 수 있는 논제인 시각적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한다. 인간 욕망의 개수는 복잡하여 그 수를 셀 수도 없거니와, 또 그 욕망이 정점에 달하는 목표치도 없다. 그래서 그 욕망은 계속 새롭고 또 새로우며, 화려하고 찬란하다.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속도를 내고 있다. 지금 21세기를 살고 잇는 사람들이 다음 세상에 대한 예언적 발언을 할 수 있겠지만, 욕망의 속도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전적으로 가늠할 수 없다. 시각예술 영역에서 현재 우리는 급속도로 상용화, 대중화 되고 있는 TV와 컴퓨터 모니터의 해상도에 노출되어있다. 과연 컴퓨터 기술발전 이전에 사용된 회화의 물감 색상으로 우리가 보고 느끼는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을까? 가끔은 현재의 육안으로도 최고의 기술로 생산된 모니터 빛을 바라보기 힘든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 뿐 아니라, 우리가 시각적으로 환영을 느끼는 감각이 단연 눈(시각)만을 이용해서 작업의 의도된 감각이 모두 획득되지 않는다. 1) ● 따라서 시각예술에서는 무용, 영화, 미디어아트 등의 다양한 장르와의 다원예술을 넘어 융·복합을 꿈꾼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시각 외에 다른 감각 즉, 온몸지각방식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는가? 그리고 어떠한 예술작품들이 시대를 거쳐 이러한 감각체계를 부여하게 되었는가? 퍼포먼스의 시작이 사람들의 손동작과 작은 움직임을 통해 흥에 겨운 동작에서 시작되었다면, 그린다는 행위역시 그려지는 장소가 처음부터 특정 사이즈의 프레임이 있을리 없다. 기원전 동굴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도구가 개발되기 이전에 자연에서 획득된 모든 요소들이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보는 이의 시각에서 인식된 풍경들을 담아내었다. 작업의 특정 프레임이 상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눈에서 인식된 입체적 파노라마가 2차원의 평면에 표현하게 되면서 그리는 대상 하나하나의 입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프레임이 상정된 그림에서는 눈에서 인식된 모든 것을 그린다기 보다는 좀 더 자의식이 발현된 자신의 소개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나 중요한건 보는 이의 육안으로 획득한 넓은 공간을 정해진 화면에 컷으로 옮겨야 한다는 행위가 중요한 변수였을 것이다. 관찰자가 정면을 응시할 때 획득되는 장면을 화면에 공간감을 살려 담아내기 위한 최초의 화법은 원근법이었다. 원근법이 발달하면서 프레임이 상정된 캔버스 회화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실제로 필리포 브루넬스키는 조각가로서 중요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중앙투시원근법을 발견하여 그 당시와 그 이후의 회화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했다고 한다. 2) ● 자연현상으로 구축된 동굴에 그려진 벽화가 아닌, 특정 프레임에 육안으로 본 부분적 풍경을 가두게 되면서, 회화의 탄생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때 화가가 상정한 특정 프레임에 자신의 세계와 자신 밖의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했으며, 그 규칙이 원근법이다. 실제로 입체 조각가들이 회화론, 즉 원근법 발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조각(3D의 입체)를 평면의 프레임(캔버스 혹은 현재는 모니터)에 옮겼던 행위는 현재 회화와 미디어의 경계와 닮아 있다. 그럼 어떻게 원근법이 회화에 구체적으로 침투하였는지 알베르티의 회화론에서 알아보자. 알베르티는 제 3권의 회화론을 작성했으며, 회화론 제1권에서 시각피라미드 논의를 구체화 하였다. 시각피라미드는 삼각형을 평면에 도식화 한 것이며, 관객이 화면을 바라볼 때, 소실점을 기준으로 삼각형으로 도식화 할 수 있다고 밝혔다. 3) 이러한 맥락은 우리가 일상의 거리에서 보며, 사진을 찍는 행위에서 사실적 획득감을 더욱 잘 느끼는 것과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한 시각장치였다. 평면에 육안에서 획득한 시각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한 욕망이었다. 원근법 발견 이후 회화의 발달과정을 알베르티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회화란 다름 아닌 피라미드를 횡으로 잘라 낸 하나의 특정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회화의 정의는 어렵다. 하지만 회화는 주어진 거리, 주어진 시점, 주어진 조명 밑에서 시각피라미드의 횡단면으로 구성된 평면위에 선과 색을 사용해서 이루어진 예술적 재현이다. 4) 이러한 원근법의 발달은 자연에서 주어진 측정 불가능할 수 있는 벽화형식이 아닌, 상정된 프레임이 등장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아직까지 고수되고 있는 캔버스 회화의 전통의 시발일 수 있다. 위와 같은 논의도 알베르티의 회화론에서 밀접히 볼 수 있다. 그는 그 당시 화가들에게 조언하듯 전달한 문구가 있다. '자신이 관찰한 것은 화면위에 재현할 경우, 재현 대상을 마치 시각피라미드를 횡단하는 투명한 유리판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표현해야 한다'라고 밝힌 글에서 인간이 육안으로 획득한 이미지를 어떻게 특정 프레임 안에 그대로 재현하여 시각적 욕구를 해결해야 하는 가에 대한 방법론적인 조언과도 같다. 이렇게 원근법이 철저하게 사용된 캔버스 회화의 시작은 인간의 시각적 욕망을 재현할 수 있는 인간문명기술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단서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어떠한가? 볼터(Bolter)와 그루신(Grusin)이라는 두 학자의 재매개화(Remediation)의 논의를 좀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이들은 재매개화의 논의에서 우리가 현재 감각하는 3D의 비물질적인 이미지에서 확산되어 느끼는 사실적 환영이 단연 새로운 시각만이 아니다 라는 관점이다. 현실과 비현실을 온몸 지각으로 넘나들 수 있는 환타지가 부여는 원근법으로 보았던 시각, 라디오를 들었던 청각, 영화를 감각했던 지각, 신문을 보았던 시각 등 기술이 점차적으로 발달하면서 매개되어 지각되는 감각이 축척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각체계에서 발전되어 전개된 원근법, 카메라 옵스큐라, 파노라마시각, 디지털 이미지, 3D 가상현실까지의 시각적 매커니즘을 다시 환원시켜 볼 필요가 있다. 수용자의 감각을 변화시켜온 시각체계-카메라 옵스큐라에서 디지털 오픈소스까지. ● 사진과 회화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해졌다. 사진을 발달하게 했던 카메라 옵스큐라는 원근법 시각을 좀 더 편리하게 재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현실 그대로를 재현하기 위한 도구에 대한 해석은 물론 현대사진의 논의와는 상이한 맥락이 있지만, 사진술 역시 좀 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던 시각적 욕망의 산물임은 틀림없었다. 원근법을 도입한 이후, 서양회화에서 원근법의 지배 시기는 400년 이상 계속되었으며, 화가들은 이 방법을 다 각도로 해석해 왔다. 공간의 단면으로서의 회화, 시간의 단면으로서의 회화로 말이다. 왜냐하면 시대에 따라 시각의 역할에 대한 화가들의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5)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원근법에서 점차적으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거쳐 사진술로 발전되면서는 점차적으로 '무엇을 찍을까'가 아닌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보았는가' (데이비드 호크니)에 대한 개별 작가의 의도와 개념이 주도적으로 부각되면서 사진예술의 위치를 점차적으로 확고히 해갔다. 원근법과 카메라 옵스큐라를 거쳐 초기 사진술을 그리는 행위대신에 어떻게 대상을 사실주의적으로 잘 옮길 수 있을까에 대한 화두가 중요한 문제였다. 6) 하지만 그 이후에 발달된 논의는 현재 공간 3D매핑을 비롯하여 스퀘어 모든 벽에 빔 프로젝션을 쏘아 관객이 흘러가는 그림을 바라보는 주체가 되는 것에 직결되어 있다. 특히나 재현의 보조수단으로서의 카메라 옵스큐라 이후, 또 다른 논의는 공간전체, 즉 스퀘어 벽 전체를 그림으로 덮고 있는 14세기 프레스코화까지 연결한다. 그림 보는 이의 주체를 완전히 둘러싸였던 환경이 이제는 그림이 아닌 영상이미지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 따라서 파노라마는 보는 주체의 고정된 한 점을 향하고 있는 위치가 아니라, 시각을 좌우로 돌리면서 이미지를 획득하게 되는 방법이었다. 180도에서 360도까지의 몸의 움직임을 통해 획득한 이미지를 특정 틀 안에서 관찰하게 되었으며, 이때 이미지(시각에 한정된)의 확장 뿐 아니라, 경험(시각과 몸)의 확장까지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으로 90년대 제작된 파노라마는 원형극장처럼 둥근 프레임을 제공했으며, 관객이 그 프레임 안에 들어가서 시각뿐 아니라 온 몸을 움직이면서 관람할 수 있는 지각이 획득되게 된 것이다. 이후에 이미지를 틀 지우는 물리적인 프레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바로 빔 프로젝션 때문이었다. 빔 프로젝션 이미지 투사는 특정 프레임이 상정된 모니터와는 전혀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시각만을 상용하여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투사된 이미지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느낌을 더욱 극적으로 자극했다. 이러한 감각은 가상, 증강현실 체험까지 자연스럽게 연결하였으며, 우린 시각장치를 통해서 온몸으로 지각할 수 있는 전혀 다른 공간에 놓일 수 있는 즉, 타임머신과 같은 시·공간의 장소 이동마저 자유롭게 하고있다. 이러한 유기적 조작은 컴퓨터의 마우스, 게임기의 조이 스틱 뿐 아니라 물리적 매개 장치 없이 손, 팔과 같은 몸 동작만으로도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 즉 주체의 의지대로 작업을 무한히 열어 볼 수 있는 상호작용, 오픈소스작업을 만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시각예술을 단연 시각이라는 지각 뿐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 온몸몰입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캔버스에서 모니터까지. ● 이러한 관점을 두고 21세기 2014년, 오늘날의 회화는 어떠한가? 에 대한 문제가 이번 전시의 핵심 키워드이다.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각 외에 온몸지각을 사용하는 관객을 자연스럽게 전시장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현재는 회화가 단연 캔버스의 형식이 아닌, 캔버스 프레임 밖의 이야기 혹은 캔버스 화면 내부에서 무한히 다른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실질적 기술세례를 받았다. 가령 캔버스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거나, 변형가능하지 않다. 이제는 캔버스의 정적인 프레임이 무한한 확장을 이끄는 컴퓨터 모니터로 대신하게 되었으며, 사실적인 재현보다 더 실제적인 재현을 이끄는 도구가 우리 일상의 삶에 놓여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캔버스에 물감으로 완성된 작품을 과거의 회화론에 빗대어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없다. 물론 개개인의 내러티브가 중요하게 부각될 수 있겠지만, 이러한 회화를 생산해 내는 작가들도 모두 동시대인들 이라는 것이 이번 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알고 있듯이 수많은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으며, 시, 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 최근엔 이에 더해 작은 스마트폰으로 즉각적인 좀 더 촉각적인 반응들을 획득하고 있다. 미디어아트 세상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있으며, 또한 우린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동시에 점유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7) ● 회화의 원근법 역사이후, 다양한 기계장치의 출현이 인간문명의 속도를 더 재촉했으며, 이러한 영향은 단연 예술계와 예술가에게도 깊숙이 침투되었다. 회화 작을 완성하는 작가가 물감을 쓰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최첨단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작업맥락과 맥을 연결 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현재의 도구들을 사용할 수 있는 선택권을 이미 부여받은 셈이다. 캔버스 작업과 동시에 우리는 캔버스와 설치, 캔버스에 그리는 기법으로 활용되어 생산된 디지털 이미지(사진, 영상), 캔버스의 개념을 오브제로 확장시킨 3D 매핑 이미지 등의 다양한 회화작업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철저히 과거의 재현의 기술에 대한 미술적 방법을 마스터 했으며, 현재 자신이 경험하는 감각을 계속해서 재매개화 시켜 나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서두에서 언급했던 시각체계의 변형에 따른 이론적 서술이 한국미술계의 몇몇의 작가군들은 어떻게 이러한 논의들을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시각적 논리를 구현하고 구체화 시키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는 김창겸, 유현미, 김지은, 권구희, 박진아, 최혜련, 이경미, 신건우, 성유진, 정직성, 김근중, 강이연 작가이다. 이들은 주로 회화를 전공했거나, 회화적 기법을 동시대성을 머금고 자신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펼쳐가는 이들이다. 위의 시각체계의 변화와확장에 대한 서술을 위해 전시는 4개의 섹션으로 꾸려진다. 실재보다 더 나은 실재(김창겸, 유현미, 권구희), 시각의 환영(김지은, 박진아, 최혜련) 환영과 추상(최혜란, 정직성, 김근중), 프레임 밖을 열망하는 자아(이경미, 성유진, 신건우) 로 시각체계에서 유효하게 발전되어 왔던 형식체계에 따른 구별이며 이 안에서는 작가의 개별적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서술해 나갈 것이다.

김창겸_Still life_영상설치_00:05:00_2007

김창겸-오브제 캔버스에 투사된 디지털 이미지 ● 이번전시에서는 김창겸의「Stall Life」(2008)년 작을 만나게 된다. 특정 오브제에 영상을 입히는 시리즈 작업 중 하나이며, 하얗게 케스팅 뜬 여러 개의 병이 곧 영상 작을 투사하기 위한 캔버스가 된다. 하얀 프레임 캔버스만 회화라고 정의 내려질 수 있을까? 물감대신 영상의 색감이 대신하게 된다면, 하얀 병 오브제들은 곧바로 캔버스가 된다. 대표적으로 평면작업을 상징하는 2차원의 캔버스 그 자체를 입체로 변환하는 것이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오브제가 캔버스화 되는 순간 이제 그 캔버스를 칠할 물감은 영상이 된다. 가지각색의 병무늬가 반복해서 변하고, 또 그 병 오브제가 놓인 선반에서는 소녀의 그림자가 등장해 생명력을 더욱 불러일으키고 있다. 캔버스 개념의 확장과 더불어 물감대신 영상으로 프레임을 메핑하는 작품은 이 시대에 만날 수 있는 회화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유현미_Broken, 14 minutes_영상_00:02:14_2013

유현미-공간회화가 사진과 영상으로 전환된 이미지 ● 공간을 회화화하여 사진결과물을 주로 제작한 유현미의 새로운 영상 작 시도는 작년부터 진행되었다. 기존에 사진 결과물을 위한 공간 페이팅 과정을 영상화 하였다면, 이제 그 공간에 시간성을 부여하는 움직이는 오브제를 넣고 영상을 찍는다. 정지되어 있는 페인팅 화면에 움직이는 오브제가 등장하여 그의 작업을 금세 움직이는 공간을 상상케 한다. 회화를 사진같이, 사진을 회화같이 작업하면서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의심 없이 허물었던 개체의 실험이 영상작업에도 옮겨온 경우가「Broken, 14Minutes(2013)」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페인팅은 되어 있지만, 정지된 페인팅 화면에 무언가 움직이고 있고, 우리는 이를 프레임 없는 빔 프로젝션 영상으로 접한다. 회화, 사진을 넘어 영상매체까지 뻗어난 그의 행보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김지은_택지개발자의 집 2014 Developer's House 2014_타이벡, 나무, 시트지_가변크기_2014

김지은-일루전 페인팅이 설치와 만나다 ● 회화 캔버스 작업을 주로 해왔었지만, 어느 순간 그는 캔버스 프레임보다 더 확장된 이미지 샷 혹은 일루전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커다란 오브제를 설치하기도 했다. 정미소 12m 흰벽면과 5m스크린에 그는 마치 공사장과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하지만 그가 계속 유지했던 평면성을 고수하되, 그 위에 설치 오브제가 가미되었다. 고정된 벽의 이미지와 설치 오브제는가 쌍을 이루어 하나의 풍경을 완성한다. 벽면 이미지는 평면에 고착화 되어 있지만, 단순한 평면성만을 제공하지 않는다. 평면이지만 소실점을 두고 원근법적 일루전 효과를 주어 평면이미지가 공간화 된다. 그 공간화 된 이미지 위에 현장감을 위한 물질의 오브제(실제나무)가 가미되면서 평면과 오브제의 만남으로 제 3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즉 회화와 설치를 연결하고 2차원과 3차원을 연결하는 이미지 설치 작업을 완성해 낸다. 우리가 전시장에서 보는 것은 2차원과 3차원이 결합한 새로운 차원의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권구희_달, 별, 해 혹은 해, 별, 달 혹은 별, 달, 해 혹은 달, 해, 별 혹은 해, 달, 별 혹은 별, 해, 달 The moon, the star, the sun or the sun, the star, the moon or the star, the moon, the sun or the moon, the sun, the star or the sun, the moon, the star or the star, the sun, the moon_ 캔버스에 유채_163×260cm, 216×131cm_2011

권구희-화면안의 회화 공간이 다른 전시장과 만날 때 ● 권구희는 2차원의 평면에 3차원 공간을 그린다. 프레임 없는 이미지를 마주하게 된다면 분명 공간 안에 여러 개의 캔버스가 설치되어 있거나 바닥에 세워 설치되어 있는 듯 한 인상을 심어준다. 공간과 벽면을 화면에 담되, 벽면에 걸려있는 캔버스를 다시 그린다. 따라서 관객은 전시장에서 캔버스가 걸려있는 캔버스 작업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권구희의 캔버스로 일구어내는 환영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캔버스 속의 캔버스를 물리적 공간에 분리 설치하여, 캔버스 인스톨레이션 개념을 완성시킨다. 캔버스 속의 공간은 현재의 전시공간과 다른 공간을 그려냈지만, 그 캔버스 공간은 다시 현재의 전시공간의 특성에 맞게 재구성되어 설치된다. 마치 컴퓨터 속에서 마우스를 클릭하여 시뮬레이션 전시를 구상해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현실공간에 그대로 가져온 경우다. 따라서 앞으로 제작된 평면속의 입체 공간, 그 입체공간이 다시금 현실의 공간과 조우하게 되는 다양한 설치, 전개를 주목해 볼 만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마우스로 이미지를 마구 옮기면서 바꾸듯 그의 분할된 캔버스도 바로 그 역할을 실제의 물리적 공간, 전시장에서 실험하고 있다.

박진아_리허설 Rehearsal_캔버스에 유채_140×160cm_2014

박진아-4프레임 이상의 사진이 단 하나의 이미지 회화로 표현 될 때 ● 박진아의 캔버스 프레임은 전통회화매체의 정지된 샷의 의미와는 다르다. 전통적인 회화형식에 벗어나 있지 않으면서 지금 우리시대의 시각 체계의 기술이 자연스럽게 베어있다. 그의 이미지에는 하나하나의 분절된 사진의 컷, 움직이는 동작을 처리한 흔들리는 사진 컷이있다. 이러한 여러 컷의 모음으로 시간의 개연성 표출한다. 즉 그가 접했던 현실의 시간의 분절을 캔버스화 하여 화면 속에 완성된 네러티브의 시간 흐름을 재구성하여 설치한다. 따라서 그의 페인팅은 고정되어 있지만 정지되어 있지 않고, 계속 시간이 흐르고 있는 듯 한 설정을 연출한다. 캔버스 사이즈가 공간의 벽 전체를 채운효과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의 개연성을 두고 작업에 임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완성된 작업을 공간에 배치하면서 시간의 개연성을 끌어내고 있다. 즉, 그에게 페인팅은 정지, 고정된 컷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 한 컷 한 컷을 마치 사진작가가 사진을 찍듯이 제작해 낸다. 여러 장의 프레임 컷을 연결하는 것과 같은 형식을 페인팅으로 진행하고 있기에 고정된 이미지에서 화면 밖의 움직이는 세상을 상상하게 한다.

최혜련_어떤 땅 Installation for Mullae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4

최혜련-회화화면의 설치그림이 실제로 전시장에 설치되는 풍경 ● 최혜련의 캔버스는 2차원과 3차원의 세상이 믹스되어 출현된다. 그는 3차원의 설치공간을 위해 2차원 캔버스에 공간을 그린다. 드로잉과 설치의 경계를 시각으로 획득하는 듯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듯 자유롭다. 캔버스는 설치하기 위한 드로잉 같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캔버스 자체가 완성된 작업이 되기도 하고, 드로잉 캔버스가 없이 설치만 완성되어도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 때로는 드로잉과 설치가 믹스되기도 하고, 독립적으로 분리되면서 네러티브를 만들어 가는 작가다. 따라서 페인팅 작업에서 확장된 개념의 설치일수도 있고, 스토리의 개연성과 분절을 모두 담아 내는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에필로그 ● 위 논의를 전시로 시각화 시키는 연구는 200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시작은 2006년에 석사 논문으로 발표한「가상현실에서 제기되는 시각체계와 수용에 관한 연구-뉴미디어아트에서의 재매개화를 중심으로-」에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논의를 2014년에 감각하고 있는 상황과 조우시키며, 여러 작가들과 시각화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8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결과론적인 아닌 과정 중에 있지만, 시각적으로 한국에서 우리나라 작가들과의 현 상황을 점검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경미_Utopia on the Periphery_변형된 자작나무 패널에 유채_100×300cm_2014

이경미-화면속의 대상이 화면 밖으로 노출될 때 ● 고양이 작가로 알려져 있는 이경미의 그간 행보는 그야말로 다양한 매체의 활용하여 고양이 라는 화면속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끝없는 네러티브를 그려내고 있는 작가이다. 따라서 고양이작가, 고양이를 그리는 작가로 단순평가 할 수 없는 부분도 그가 지속적으로 선 보여졌던 인스톨레이션 개념의 작업들을 해석해내는 행위와 관통한다. 이경미는 눈에 보이는 것을 착실하게 어쩌면 과학, 수사학적 분석을 동원해서 그렸던 과거 원근법 화가들의 전통과 부분적으로는 맥을 같이 한다. 그의 회화는 철저히 원근법적 구도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경미 작가가 또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지점은 원근법 구도의 형식을 취하되 미디어의 개입이 자연스럽게 많아진 동시대상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작업에 취하여 완성해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점점 더 해상도 높은 영상작을 원하고, 또 좀 더 3D를 넘어선 첨단기계와 기술로 배출한 입체에 열광하며, 이미지를 본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되면서 미디어의 재매개화와 설치의 개념을 미술의 일부로 회화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과정을 겪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화를 통한 이경미의 다채로운 매체 실험이 지속적으로 유효한 메세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신건우_Hiatus 틈_알루미늄, 레진에 아크릴채색_110×220×10cm_2014

신건우-캔버스 오브제가 부착되는 일루전과 조각 ● 실질적으로 작업과정 자체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신건우의 작업은 조각과 회화사이 혹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와 혼합의 공존을 암시한다. 매체를 다루는 속성과 화면 오브제 맥락에서 드러나는 네러티브 역시 여러 레이어가 스스럼없이 얽혀있다. 그의 작을 단박에 인식할 수 있는 코드는 회화조각이다. 페인팅으로 인식하다가 점차적으로 그림을 가까이 마주 할 수록 마치 3D 안경을 끼고 이미지에 접속하는 것과 같이 입체를 경험한다. 프레임 속에 덩어리 부조를 뜨고 사진과 페인팅기법을 동시에 사용한다. 때로는 화면 속과 네리티브 상 연관된 오브제가 물리적 공간에 등장하여 전시장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존에 선보였던 페인팅 프레임 형식과 더불어 조각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대상을 조각한 후에 페인팅을 덧입히는 행위는 같다. 하지만 하나의 작업은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사용한 페인팅 형식의 작업, 또 다른 작업은 조각형식의 작업이 완성된 것이다. 이는 하나의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서 풀어내기 위한 매체 방식뿐 아니라, 완성된 작업이 보여지는 방식에 대해 좀 더 세분화하여 기록하기 위한 절차일 수 있을 것이다. 조각회화와 동시에 회화조각의 순환적 고리를 만드는 노력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다. 조각을 전공한 후, 페인팅과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의 사유를 그가 제시하는 조형언어 조각회화, 회화조각의 사이를 탐구해 본다면 분명작가가 발전시켜 나가는 시각언어를 구체적으로 감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유진_Cogito, ergo sum 코기토 에르고 숨_다이마루에 콘테_145.5×97cm_2014 성유진_Doors of Access_혼합재료_60×50×22.5cm_2014

성유진-프레임속의 대상이 화면 밖의 외출을 꿈꾸다 ● 회화에서 자화상을 그리듯 특정 대상을 완성시키는 성유진의 작업은 지극히 사적인 내러티브를 제시하면서 사람들에게 말 걸기 시작하는 방법을 택했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마치 화면 밖, 특히나 그림을 마주하는 이에게 대화를 걸 듯 한 제스쳐를 취한다. 프레임속의 여러 스토리텔링이 가능할 것 같은 사물도 있지만 등장인물의 특유한 표정과 빛깔이다. 사람이 저마다 성격이 다르고 때에 따라 제각각의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성유진 작가의 프레임 속의 등장인물을 흔히 행복지수가 높을 것 같은 들뜬 상태의 자아는 거의 없다. 그 인물로 하여금 내면을 바라보게 하거나,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어떨 때 어떠한 사건을 마주할 때 등장인물과 같은 심정이었을까? 등의 공감과 교감을 이끌어 낸다. 이 또한 예술작품이 가진 중요한 얼굴이다. 작가의 내면을 충실이 프레임 속에 담지만 프레임 속의 대상은 지극히 그 밖의 세상, 특히나 프레임 밖의 세상의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것들과 연결 짓고, 연결하고 싶은 표현이 깃들어 있다. 이때 이 캔버스 안의 갇혀 있는 듯 한 대상은 프레임 밖의 사람들과 상이한 다른 교감을 이끌어 내면서 사면이 막힌 공간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그 시도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심스럽고 또 미래지향적임을 프레임과 같이 설치된 문과 계단을 통해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정직성_201437, 201438, 201244, 201245_2014

정직성-사실을 재현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회화가 전부는 아니다 ●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느슨히 넘나드는 정직성의 전시작은 공간의 하드웨어를 상징하는 틀이 점차적으로 해체되고 흩어지면서 실재공간에 스스럼 없이 묻혀지기도 한다.(실제로 정직성의 커다란 페인팅을 도미도화 설치하여 마치 그 공간을 뚫고 지나는 시뮬레이션을 연출한다면 몸은 공간을 침투해서 걸어 들어갈 수록 점차 몸과 페인팅의 화면안의 이야기들(공간 밖의 프레임과 프레임 공간 안의 프레임 없는 공간)과 동일화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건물외부의 터치로 조화로운 도시전체의 이미지를 담아내기도 하고 도시와 그 도시를 이루고 있는 공간외벽, 내부로 점차적으로 침투돼 들어간다. 화면 안의 대상의 외연이 또렷해 질 수록 사실적 현상을 담아내지만 공간과 자신의 시야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공간 안을 걸어 들어가 듯 내부를 점유해 갈 수록 추상현식으로 화면을 거칠게 메꾼다. 재현의 대상을 그대로 옮기기 보다는 재현의 대상 속에서 머물며 붓 터치를 통해 화면을 현실에 있거나, 없을 법한 추상의 공간을 연출한다. 자신이 관망하며 거닐었던 공간자체를 화면에 옮겼던 진실을 구상으로 표현하였다고 가정한다면,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 같은 추상의 표현은 자신을 둘러싸는 지금 이 순간, 작은 내부의 공간에 대한 재발견과 동시에 이 공간과 마치 자신과 동일화 되는, 즉 사람의 시야로 획득되는 대상이 아닌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공간 자체에 관한 작가의 새로운 시선이 될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적공간에서의 경험이 점점 세상 밖의 공간과 조우를 맺으며 등장하겠지만, 구상과 추상, 공간의 외연과 내부, 사람과 사물의 관계 맺음과 해체, 관조와 동일화하는 시선의 경계가 앞으로도 치밀하게 연구되어 회회의 미덕으로 상정되는 '재현'에 대한 작가 고유의 재현방식이 확립되길 기대한다.

김근중_原本自然圖 Natural Being 12-2, 꽃, 이전 Before, Flower 花, 以前 14-3, Natural Being 꽃세상, 原本自然圖 13-5_2014

김근중-프레임 안과 밖에 동시에 공존하는 자아_세상에 내보이는 자신과 다른 내면의 자신 / 캔버스 프레임 안과 밖 ●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롭게 제작된「꽃, 이전(Before, Flower)2014」기존에 오랫동안 현장에서 만나왔던 캔버스 작업과는 또 다른 맥락의 이미지가 선보여진다. 기존의 페인팅이 세련되고, 세밀하게 덧칠하여 매끄러운 상태에서 세상과 교우했다면 이제는 조금 더 거칠고 내면 고유의 빛이 고스란히 베어있는 대작(3.316x855cm)을 만나게 된다. 부단히도 한 작품의 완성을 위해 끌어올렸던 열망을 위한 드로잉이거나 초기 내면상태의 표현일 법한 붓 터치들로 완성된 대작 가로 8m와 세로 3m 페인팅은 김근중의 또 다른 자아상태 그 자체다. 보이지 않는 심성과 정신을 최대한 비주얼화 하는 작가의 고뇌가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좀 더 구상적으로 잘 그리기 위한 초연의 단계를 제시한다. 그리고 전시에서는 이 두 개의 나눌 수 있는 내면과 외연의 공존을 같이 또 다르게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된다. 이젠 더 이상 세상을 그대로 옮기기 위한 회화가 아닌 자신의 내면의 수위를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매체 그 이상이 되었음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강이연_막 screen_영상설치_00:02:30, 가변크기_2014

강이연-물질의 캔버스와 비물질의 이미지의 조우 ● 현실과 가상, 물질과 비물질의 상관성을 시각화 시켜온 강이연은 최근 지속적으로 기존의 공간 자체를 재해석 하는 메핑 작업을 진행해왔다. 비물질의 빔프로젝션 메핑 이미지만 공간을 메우고 부유한다. 따라서 빔 프로젝션을 끄면 본래의 빈공간이 되어버린다. 마치 마법처럼 설치이전의 공간이 된다. 따라서 오브제나 캔버스 등의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시장 자체의 벽과 천장, 창문, 문등이 바로 미디어 캔버스가 된다. 이는 3D 매핑기술이 낳은 또 다른 이미지 생산의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3D메핑 기술이 때로는 빗물질 자체로 남기도 하지만, 작가가 초기에 연구한 회화의 캔버스 위에 영상이미지를 실제로 투영하면서 점차 비물질화 되어갔다. 빈 회화 캔버스에 피지컬 그 자체의 몸 움직임 동작을 촬영하여 투사함으로 영화 스크린과 비디오 아트의 TV프레임을 전통적인 회화의 캔버스로 옮겨온 경우였다. 회화를 전공한 그가 캔버스 자체에 영상 투사를 시작으로 캔버스를 매개한 공간까지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물리적 점유를 담당하는 캔버스마저 없어진 비물질 이미지 그 자체를 투영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에 놓여 작업을 하는 강이연의 이번 전시작은 캔버스, 공간매개스크린, 매핑 영상 등으로 지속적으로 연구해 가는 두 가지 주제를 혼합하여 제시하게 된다. 우리는 물질(몸)로 비물질(공간)의 영역을 침투하며 존재한다.(앉을 때나, 서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걸을 때, 뛸 때...기구, 기계를 탈 때에도)이러한 물음이 지속되는 한 강이연의 피지컬과 비물질의 경계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유효한 메시지로 남을 것이다. 에필로그 ● 이 전시로 시각화 시키는 연구는 200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시작은 2006년에 석사 논문으로 발표한「가상현실에서 제기되는 시각체계와 수용에 관한 연구-뉴미디어아트에서의 재매개화를 중심으로-」에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논의를 2014년에 감각하고 있는 상황과 조우시키며, 여러 작가들과 시각화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8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결과론적인 아닌 과정 중에 있지만, 시각적으로 한국에서 우리나라 작가들과의 현 상황을 점검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 이은주

* 각주 1) 따라서 시각예술파트는 점점 다원예술을 넘어 융복합을 지향한다. 이는 예술작품을 수용하는 감각체계의 문제이지, 예술작품자체를 변형시키는 문제와는 또 다른 차원이 패러다임이다. 현재의 미술, 예술관객은 단지 시각만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디지털 이미지에 수용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시장, 공연장, 일상적 공간 즉 어디에 있든지, 온몸으로 지각할 수 있다. 2) Leon Battista Alberti, Della Pittura,『알베르티의 회화론』, 노성두 옮김, 사계절, 1998, p.12. 3) 위의 책, p.25. 4) 같은 책, p.33. 5) 이토우 도시하루『사진과 회화』(1987), 김경연 옮김, 시각과 언어, 1993, p.18. 6) 이에 대해 또 다른 논의로는 다음과 같다. 원근법의 최초발견에서부터 19세기까지는 사실주의 대한 논의가 회화를 대부분 지배했다면, 사실주의의 시각적 증폭을 도왔던 기계는 사실주의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즉, '사실적'이라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 원근법의 경우 화가들은 멀리 있는 자연의 정경이 작고 흐릿하고 균형이 무너진 상태로 보이는 이유를 자연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불완전하게 보이는 것을 자연의 대상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수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회화예술이란 자연의 결함을 보완하는 하나의 기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초기의 원근법은 '사실적'이라는 의미 보다는 '이상적(Ideal), 즉 이상화의 의미를 지녔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위의 책, p.25~27. 7) 즉각적인 반응과 아웃풋으로 인해 우리는 몇 초안에 모든 것들을 과거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도구를 가지게 되었다.

Vol.20140814h | Reality on the Reality-캔버스에서 모니터까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