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Art Showcase-A Sublime Dinner Season Ⅱ

노지현展 / NOHJIHYUN / 盧智賢 / painting.installation   2014_0823 ▶ 2014_0910 / 일요일 휴관

노지현_백일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72.7cm_2013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기획 / 튤립아트랩 Tulip Art Lab www.tulipartlab.com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일요일 휴관

카페 오시정 논현점 CAFE 5 CIJING 서울 강남구 논현동 265-14번지 Tel. +82.2.541.8636 www.5cijung.com

A Sublime Dinner는 '극진한 성찬', 또는 '격식 있는 만찬'이라는 뜻이다. 이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유추할 수 있는 단어이다. 첫째로 대접하고자 하는 소중한 사람을 향한 설렘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둘째로는 성의와 정성을 다해 만찬을 준비하는 이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사람들이 모여 만찬을 즐기며 함께 보내게 되는 풍요로운 시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만찬의 자리로 인하여 행복한 경험으로 서로가 공유하게 될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본 A Sublime Dinner는 예술가들이 이 사회에 데뷔하는 본질적이고 창의적인 시스템으로 제시한다. ● Tulip Art Lab이 생각하는 예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우선적으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고, 그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설렘으로부터 창작의 욕구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예술은 최선을 다하는 성의와 정성으로 관람자와 만날 준비를 한다. 다음으로 작품이 창작되고 설치가 완료되어 예술적 만찬이 차려졌을 때, 사람들이 모여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최종적으로 예술 전시라는 만찬의 자리에서 얻게 된 영감을 서로가 더불어 공유하는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결국 예술은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경험이고, 그 본질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다. ● A Sublime Dinner 에서 순차적으로 선보이게 될 작가들은 각자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전달하게 될 것이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Inquiry into Meaning and Truth"라는 저술에서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때 가장 먼저 습득하는 언어는 구체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Object-language)라고 하였다. 즉 사과, 나무, 빨간 색과 같이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을 우선적으로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지칭할 수 있는 대상이 없는 추상명사이다. 사랑은 어떠한 행위, 또는 상황으로부터 유추하게 되는 복잡한 의미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규정할 수 없고, 정의 내리기 어렵다. 우리는 단지 사랑이라는 감정을 여러 가지 상황들 속에서 느끼게 될 뿐이다. 다시 말해 사랑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체적인 감정 변화와 행위를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만큼 사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A Sublime Dinner 는 여러 작가들이 창의적으로 창조하는 사랑의 모습들을 담아내고, 만인과 공유하기 위한 자리이다. ■ 튤립아트랩

노지현_백일홍 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8×38cm_2014
노지현_백일홍 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8×38cm_2014
노지현_백일홍 Ⅲ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8×38cm_2014
노지현_백일홍 Ⅳ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8×38cm_2014

새로운 차원으로 재설정된 기다림의 의미 ●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백일홍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기호로서 차용되고 있다. 차별적 요소와 분별의 찌꺼기는 모두 현실 세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작품에서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완벽히 제거되었다. 하나의 꽃 봉우리가 정확하게 다른 꽃들만큼만 피어있는 풍경에서 관람자는 절대적인 평등을 보게 된다. 기호의 형태로 표현된 개별적인 꽃과 줄기는 분명 두께가 없는 2차원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공간적 깊이 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얽혀있는 이미지들 사이의 중첩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작품은2차원의 평면적 이미지에서 3차원의 현실적인 공간을 암시하게 된다. 다시 말해, 패턴적 기호로 대변되는 완벽한 평등이 다시 현실의 3차원 세계로 흡수된 것이다. 작가는 모든 주체적 가치가 절대적으로 동일하게 평가되는 이상적인 모습을 현실에서 실천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앞에서 관람자는 현실 세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평등의 이상을 실천하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경험을 한다. 관객과 작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차원의 전환이 있는 것이다.

노지현_백일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3×116.7cm_2014
노지현_백일홍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3×116.7cm_2013

노지현 작가의 작품에서 기호화 된 백일홍이 상징하는 것은 다름아닌 "기다림"이다. 누구나 어떠한 형태로든 기다림을 경험한다. 그 기간이 길거나 짧아도, 그 대상이 중요하거나 보잘것없어도 인간에게 기다림의 행위는 동일하게 유발된다. 작가는 이러한 모든 형식의 기다림을 평등하게 다루고 있다. 그것은 백일홍의 형태를 빌려 비로소 보편적인 기다림의 상징적 기호로 표현된다. 작가가 작품 전체를 통하여 그토록 전달하고자 하는 기다림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대 사회에서 기다림은 비생산적인 시간의 낭비로 여겨진다. 현대인에게 개인의 시간은 얼마든지 통제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막연한 기다림의 자리를 정확한 일정과 계획이 대신한다. 그만큼 현대인에게는 상대를 위해 비워둔 시간적 여유와 관계적인 배려가 사라졌다. 그러나 기다림의 행위가 유발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둘 이상의 주체가 참여하게 되고, 이들 사이에 믿음과 신뢰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책임과 배려를 통해 각자의 시간을 나눠 갖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이고 관계를 증명하는 숭고한 실연(失戀)이다.

다가올 무언가를 위해 묵묵히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기다림은 확연히 드러나는 행위는 아니지만, 분명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다. 작가는 모든 형식의 기다림을 동일한 가치로 다루며,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도 아직까지 기꺼이 기다림의 시간을 내어줄 소중한 무엇인가가 있는지,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지 자문하게 된다. ■ 홍용상

Vol.20140823b | 노지현展 / NOHJIHYUN / 盧智賢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