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립의 나날들 直立的每一天 Upright in Every Single Day

송필展 / SONGFEEL / 松泌 / sculpture   2014_0823 ▶ 2014_0916 / 월요일 휴관

송필_行-Walking_합성수지, 혼합재료, 유리섬유, 강화 플라스틱, 신발_390×186×77cm_2014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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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 홈페이지_songfeel.co.kr

초대일시 / 2014_0823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제로 아트 센터 ZERO零艺术中心 ZERO ART CENTER Middle First Street 798 Art District, No.4 Jiuxianqiao Road, Chaoyang District, 100015 Beijing, China Tel. +86.10.5978.9931 www.zart.org.cn

낙타, 황금도시, 그리고 사막"사막을 건너는 낙타는 자신의 혹에 저장한 지방을 분해해 힘을 얻는다. 이토록 자명한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리얼리즘의 급진적 재구성을 꿈꾸는 비평의 자세일 것이다." (장성규) ● 조각가 송필이 중국에서의 전시제목을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불현듯 라오서(老舍. 1899~1966)의 『낙타샹즈(駱駝祥子)』를 떠올렸다. '직립의 나날들'이라는 연작 작품들이 처음 탄생했던 수년 전부터 아마도 나는 '낙타샹즈'를 마음에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석에 잇대 붙여서 제작한 그의 '낙타돌'(그것은 분명히 낙타와 돌이 한 몸으로 붙어 있었다)은 그 조형적 특이성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마음에 박혀서 잘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간간히 '직립의 나날들'이라 이름붙인 그 '낙타돌'들의 전시 소식을 전해왔다. 소식은 마치 먼 길을 가로 질러가는 상인들의 길 소식처럼 멀어서 도무지 상을 종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실크로드의 낙타들처럼 일렬로 배치한 전시장면을 보내오자 머릿속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명해졌다. ● 그의 전시에는 분명 작품 하나하나가 아니라 그 전체의 배치가 보여주는 미학적 맥락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 뿐 나는 그의 작품들이 상징하는 바의 심중(心中)을 헤아릴 시간적 여백이 없었다. 내 여백은 늘 가장 긴박한 것들에 의해 먼저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그를 만나 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그 말들 사이에 나를 사로잡는 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중국전시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신발낙타'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라오서의 『낙타샹즈』가 떠오른 것은.

송필_行-Walking_합성수지, 혼합재료, 유리섬유, 강화 플라스틱, 신발_390×186×77cm_2014_부분
송필_行-Walking_합성수지, 혼합재료, 유리섬유, 강화 플라스틱, 신발_390×186×77cm_2014

'낙타돌'들의 사물환 된 리얼리즘 ● 1989년 최영애 선생에 의해 '낙타샹즈(駱駝祥子)'가 『루어투어 시앙쯔』로 첫 번역판이 나왔을 때 나는 시앙쯔(샹즈보다는 시앙쯔가 베이징 사투리 발음에 가깝다)의 삶에 참혹했다. 실크로드의 사막을 건너는 낙타들의 거친 삶의 리얼리티가 시앙쯔의 삶에 또한 고스란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시앙쯔의 삶은 '인력거=훔친 낙타'에 종속되어서 여지없이 으깨져 버리듯이 송필의 낙타들(처음엔 낙타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말과 사슴, 캥거루, 팽귄, 달팽이 등으로 변환된다)도 그 힘겨운 바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돌 속에 파묻힌 그 모습들을 누가 자연과의 일여(一如) 따위로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 '낙타돌'로 묶여 있는 돌은 돌이 아니라 무게다. 그것은 직립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이며 고통이다. 절망과 회한이며 분노다. 사람살이의 고행이며 멈출 수 없는 탐욕이다. 수도승에게는 탐진치(貪瞋癡)의 허깨비이고 부처에게는 불쌍한 중생들과 나눌 자비이며 예수에게는 사랑이다. 나누고 쪼개어서 비워야만 얻을 수 있는 투명한 존재의 실체다. 그리고 그 돌은 사물화 된 리얼리즘이기도 하다. 리얼리즘은 모순된 현실과 들끓는 현실의 안으로부터 바깥을 지향하는 실천적 미학 개념이다. 비루한 현실의 내부를 뒤집어 안과 맞붙은 새 현실로서의 바깥을 펼쳐내는 것이다. 바깥은 안의 '외부'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이미 안에 바깥이 스스로 존재한다. ● 바깥을 추궁하는 것은 신명을 크게 살리는 것과 같다. 내 앞에 당신이 있고 내 옆과 뒤에도 당신이 있다. 나를 까뒤집는 것은 당신에게 나를 편재시키는 것이다. 새 현실의 바깥을 위해서 우리는 안을 뒤집어 바깥에 편재시켜야 한다. 이것이 서로 삶이고 서로주체성이며, 늘 새로운 리얼리즘의 현존태이다. 그러나 송필의 '낙타돌'은 틀에 갇힌 동물들의 형상을 재현하고 있다. 돌은 이정표로 나무로 현현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새로운 방향타를 찾지 못한 채 헤매는 우리의 모습을 은유하는 것이다. 낙타가 혹을 비워 사막에서 살아남듯이 '낙타돌'의 돌도 뒤집어 까야만 삶도 새로워 질 수 있으리라.

송필_山-MountainⅠ_청동, 자연석_41×53×15cm_2014
송필_尊 Respect_청동, 자연석_146×46×46cm_2014
송필_standing1,2 _청동,자연석_108×37×37cm×2_2014

'신발낙타'의 자본도시 사막 ● 문학평론가 장성규는 그의 평론집 『사막에서 리얼리즘』(2011)에서 바로 지금의 후기자본주의를 '사막'에 비유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이 사막을 가로질러 건너가기 위한 문학적 예술론으로 주저 없이 '리얼리즘'을 꼽았다. 이러한 장서규의 문학비평이 묘파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과 그 리얼리즘의 형체를 조각적으로 재현하는 곳에 나는 송필의 낙타상들이 '비판적 리얼리즘'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낙타에게 있어서 사막은 자신의 혹을 태워가며 견뎌야 하는 생사의 현실이다. 또한 비열하기 짝이 없는 투쟁의 장소이자 멈추기를 허락하지 않는 무한 걷기의 현기증이다. 이런 낙타의 삶에 빗대어서 송필은 후기자본주의의 사막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자본주의에 노출된 아시아의 현실/우리의 현실을 조각을 통해 상징화 해왔다. 그의 조각들은 자본주의의 스펙터클이 보여주는 비신화적 할리우드 영웅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거대 물신론에 빠진 기념비적 욕망들을 시커멓게 들춰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낙타들은 여전히 사막의 자본 도시를 살아가는 시앙쯔의 다른 얼굴들이라 할 수 있다. 매일 같이 인력거를 끌며 쉬지 않고 베이징의 골목골목을 누벼야 했던 시앙쯔의 삶이나 직립의 나날을 견디지 않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낙타들의 삶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준비한 '신발낙타'의 형상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낙타돌'의 리얼리티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 신발들이 시앙쯔의 신발들이라고 생각한다. 후기자본주의의 사막을 바쁘게 살고 있는 수없는 익명의 시앙쯔들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할 것이다. 신발은 허상의 실체다. 이곳저곳에서 존재하는 존재자들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그 존재자들의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낱낱의 인물들이 아니라 그 인물들을 비운 자리에 남아있는 신발들이야말로 익명의 존재성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과거, 조선의 초상화가 형(形)과 영(影)의 예술이었듯이, 송필의 얼굴 없는 그림자의 실체인 '신발낙타'의 경우도 형과 영의 예술인 것이다.

송필_direction_청동_331×126×63cm_2014
송필_Looking for Utopia_청동_650×500×100cm_2014

지금 우리는 인식하지 못할 만큼의 빠른 속도를 살고 있다. 도시는 속도를 구축하고 사람들은 그 속도에 휩쓸린다. 자본이 자본을 키우면서 확장하는 도시는 옛것과 새것을 구분하지 않고 먹어치운다. 아시아의 도시들은 아시아의 정체성을 깡그리 지우고 다시 세운다. 새것은 진리가 되고 유토피아가 되며 옛것들은 쓰레기가 된다. 과거는 지워야 할 그림자이고 미래는 쟁취해야 할 실체라고 소리친다. 그 소리들은 도시의 빌딩들 사이를 메아리치며 떠돈다. 송필의 조각들은 바로 그 도시들을 향한다. 사물화 된 도시들의 리얼리즘을 혹으로 키워서 횡단하는 낙타들을 세운다. 자본도시는 사막이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뒤덮인 열사의 타워펠리스를 낙타들이, 낙타를 대신하는 숱한 동물들이 자신의 혹을 태우며 걷고 있다. 그런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의 전시장은 바로 그 '어디'를 묻는 사자후의 일갈을 놀랍도록 크게, 무겁게,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 김종길

Vol.20140823c | 송필展 / SONGFEEL / 松泌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