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STENCE and THOUGHT 존재와 사고 Exposed Soliloquies, Detected Silence 독백과 침묵의 발각

이태량展 / LEETAERYANG / 李太樑 / mixed media   2014_0910 ▶ 2014_0923

이태량_언어의 시각적 장치 VDL(Visual Device for Language)_ 전기 모터, 흑유, 영상설치_577×270cm_2014

초대일시 / 2014_0913_토요일_03:00pm

기획 / 갤러리 그림손 후원 / HP_지스마트글로벌(주)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독백과 침묵의 발각 이태량의 회화적 장치와 전략 ● 이태량은 최근 두 벌의 공학적 장치를 고안하고 그것들을 이 번 개인전(2014, 갤러리그림손)에 출품한다. 하나는 전동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회전체가 벽면에 돌출되는 버전(version)이고 나머지는 비디오 시스템으로 좁은 방에 동영상을 보여주는 버전이다. 이 둘은 이전의 시도들과 달라 보인다. 회화에서 출발해 사진, 설치 그리고 출판물의 편집에 이르는 지금까지의 다양한 시도들이 고정된 포맷을 유지해온 반면 최근의 두 버전은 움직임과 소리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미술가는 이 두 버전을 "언어를 대신하는 시각적 장치(VDL, Visual Devices for the Langue)"로 부른다. ● 본격적으로 전문 미술가로 등단한지 20년째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움직임, 소리와 같은 비가시적 매체의 도입은 자칫 여태껏 쌓아온 이력에 많은 부담으로, 그리고 일관성의 손상으로 비칠 법하다. 더욱이 번잡한 시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상 회화의 특성으로 반응하고 창작해 온 그이고 보면 이 새로운 방식은 너무나 생경하기까지 하다. 나는 이 공학적 버전이 탄생한 이유에 관심을 갖는다. 나의 관심은 새로운 매체를 적용하는 그의 비약을 통해 여전히 미술이 유효하고 삶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에서 비롯된다.

이태량_존재와 사고 EXISTENCE and THOUGHT, 명제형식 propositional form_ 종이에 아크릴채색, 유채_109×66cm_2014

망령의 극복: 호소 ● VDL(1) 버전은 화랑의 한 벽면을 통째로 차지한 채 그 표면에 문자와 기호가 그려진 넓은 평면, 검정색 액체를 끊임없이 퍼 올리는 회전축을 지지하는 사각형의 틀에 네 대의 스피커를 단 원판이 결합된 기계, 그리고 이들 모든 표면에 투사되는 이미지로 구성된다. 이는 미술가에 의해 그려진 평평한 회화의 층과 그 위에 소리를 내고 동작을 하는 기계의 층, 그리고 그 위에 동영상의 층으로 이루어진다. ● 벽면을 뒤덮은 회화의 층은 이태량이 지금껏 지속해온 평면 제작의 주요 징표들이 드러난다. 그 표면에 미술가의 예술적 표어(motto)인 "EXISTENCE"와 "THOUGHT", 그리고 천문의 순환과 문명 발생을 상징하는 숫자 "25920"이 전사되고 버전의 명칭과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저작에서 옮겨온 문장과 수식 그리고 기호들이 휘갈겨져 있다. 지금까지 미술가는 메마른 물감으로 칠된 바탕에 저돌적으로 붓질을 가해 "자신의 호흡과 에너지가 고스란히 기록"되고, 획의 "활달한 꺾임과 속도"로 문장과 수식을 회화에 표현하는 것으로 자신의 동질성을 주장해왔다. 이 버전에서 회화의 층은 이러한 미술가의 과거를 따른다. ● 이러한 그의 회화적 특징들 중 몇몇은 한동안 타피에스(Antoni Tapies)의 그늘에 머물렀다는 혐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2000년 이후 발표된 회화들에서 그 거장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노골적으로 거장이 즐겨 사용한 부호들이 등장하곤 했다. 타피에스는 이태량의 교사이거나 망령이었던 것으로 비칠 법하다. 2000년 이전 이태량의 개인전들(1995, 갤러리서호와 1997, 동주갤러리)에 걸린 회화들에서 회화평면은 벽처럼 막힌 것으로 표현된다. ● 이는 당시 회화공간에 대한 그의 이해가 구상 회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깊이의 공간이 아닌, 견고한 물질의 덩어리로 간주하는 것에서 출발했음을 말하다. 그 표면에 미미한 얼룩을 남기거나 긁음으로써 그는 자신의 회화적 에피소드를 남겼다. 여기서 아직 타피에스의 본격적인 영향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의 출발은 타피에스 류(類)의 건조한 재료의 물질감에 감염되기 좋은 여건을 지녔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태량_형식적인 관계 Formal Relation_패널에 혼합재료_90×75cm_2014

한편 2000년대 10년간 칠의 적용과 붓질에서 그러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이태량은 카툰식의 선묘로 외눈박이 형태의 캐릭터를 개발하거나 사사로운 일상에서 비롯된 문구와 낙서에 집중함으로써 칠의 물리적 특성에 머문 타피에스와 멀어지려했다. 더욱이 자신의 회화에 등장하는 특정의 이미지를 본 뜬 설치물을 실재하는 공간에 던져 놓기도 하면서 매체의 특질을 타피에스의 것과 달리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VDL(1) 버전에 등장하는 "X" 자 형태는 칠되지 않고 깔끔한 그래픽을 따르기에 타피에스의 "十"자 형태와 질을 달리한다. 칠로 휘갈긴 기호와 문장들 또한 중첩된 층들의 통합된 단위의 부속물로 보일 뿐이다. ● 새로운 버전에서 미술가의 몸짓에 의해 그려진 형태들의 시각적 자극보다 기계의 활기찬 동작으로 퍼 올리는 액체의 변화무쌍한 형태의 호소가 훨씬 더 압도적이다. 미술가는 이를 "감지되지 않는 지표면의 깊숙한 곳의 석유를 뽑아 올리듯이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원초적 욕망을 퍼 올리는 일"이라고 한다. 그와 함께 이 버전은 세 개의 상반된 층들이 한 곳에 결합됨으로써 발생하는 마찰의 규모로 모든 것을 삼키려 한다. 이 충돌의 결합체는 과거의 거장에서 유래하는 의혹뿐만 아니라 미술가의 작위적인 몸짓마저 희생시키려 한다.

이태량_형식적인 관계 Formal Relation_패널에 혼합재료_90×75cm_2014

논리의 극복: 독백 ● VDL(2)버전은 세 면의 벽에 비디오테이프를 층층이 쌓아 뒤덮고 한 면에 UHD패널을 설치해 비디오영상을 상영하도록 고안된다. 이 버전은 붓 자국, 얼룩과 같은 몸짓의 흔적이나 동력으로 작동하는 기계의 움직임은 제거되고 대신 과거 다른 곳에서 기록된 디지털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물, 그리고 이들의 동작과 음향이 강조된다. 이 버전은 어두운 벽면과 UHD패널의 고정된 평면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영상, 그리고 각본에 의해 연출된 서사로 구성된다. 이 포맷은 거의 UHD패널의 영상이 전하는 서술에 전적으로 시선을 집중하게 하고 이태량이 그의 과거 회화나 설치물에 유지해온 표면의 촉각적인 견고함을 몰아내었다. 따라서 이 버전은 회화 제작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표면의 물리적 선택에서 미술가를 한결 자유롭게 한다.

이태량_EXISTENCE and THOUGHT 존재와 사고展_갤러리 그림손_2014

"존재와 사고(Existence and Thought)"는 그의 첫 개인전에서부터 지금까지 이태량이 자신의 예술적 표어(motto)로 삼고 작품의 제목으로 그리고 도록의 제목으로 써왔다. 그는 이 표어로 자신과 회화를 일치시키거나 회화를 통해 자신을 주장할 때 곧잘 쓴다. 심지어 그는 이 말을 그의 화면에 영자로 직접 기입하기도 한다. 그가 이 표어를 선택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에 따른 것이라 한다. 특히 미술가는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자는 비트겐슈타인의 권유를 말할 수 없는 영역의 분명한 인정이라는 역설적 통찰로 받아들이고 가시적으로 규정되는 회화가 오히려 비가시적 사실을 드러낼 통로로 기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 이러한 표어는 그를 미술가로서 삶을 지탱하게 하는 신념의 지표이자 깊고 폭 넓은 생각을 분명히 가능케 했을 것이다. 개념미술이 아닌 한, 그리고 브라크(Georges Braque)와 피카소((Pablo Picasso)의 사례에서처럼 실재를 복원해 회화의 생기를 불어넣는 시각적 수단(매체)이지 않는 한, 칠의 속성에 의존한 화면(painterly canvas)에 시각적 기여가 없어 보이는 문자의 적용은 부차적이고 현학적 치장이 되기 십상이다. 이태량은 바로 이 지점에서 칠이라는 회화 본연의 특성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신념의 수단으로 회화를 활용할 것인가 하는 선택국면에 직면해 왔다.

이태량_EXISTENCE and THOUGHT 존재와 사고展_갤러리 그림손_2014

그의 세 번째 개인전(2000, 모로갤러리)과 네 번째 개인전(같은 해, 김천문화예술회관)에서 그의 표어는 배경의 칠에 묻힌 채 서명과 함께 간신히 드러나는 정도였다. 그러나 2010년 이후 그의 선택은 노골적으로 배경에 대비되는 휘갈김으로 표어를 기입하는 길을 택한다. 최근으로 올수록 이태량의 화면에 등장하는 문자와 수식 그리고 낙서들은 더 부각되고 심지어 양식화되기까지 해서 상징의 이미지가 되려한다. VDL(2)버전을 구성하는 영상물의 첫 번째 사건은 소녀가 끊임없이 문장을 반복해 읊조린다. 문법에 맞고 내용이 있기에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이지만 소녀의 지루한 반복으로 그 뜻의 전달은 실패하고 관람자 또한 이해하지 못한다. 모국어가 어느덧 낯선 말소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대신 그의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더라도 발설해야 할 중요한 강령처럼 들린다. 그런 류의 말은 독백에 해당한다. ● 이태량의 회화에서 적용된 문장과 수식의 전개를 살펴볼 때 그리고 최근 VDL(2)버전에서 등장인물이 구사하는 대사의 역할을 볼 때 그의 표어는 반드시 선명하게 뜻을 전달하기 위한 문법 곧, 논리를 가길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의 과거 회화에서 글이, 그리고 최근 버전에서 말이 이념과 논리에서 자유로운 채 그 기능을 유지하는 듯한 모습이다.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들리는 인간의 말은 외국어이거나 유아가 모국어를 배울 때 청취하는 사람들의 말이다. 이태량의 회화가 비트게슈타인의 강령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그의 매체에 적용하는 문장과 말들이 바로 이 지점에 머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태량_EXISTENCE and THOUGHT 존재와 사고展_갤러리 그림손_2014

칠과 공백: 침묵 ● VDL(1) 버전의 국자가 퍼 올려 사각형 틀로 지지된 투명한 아크릴 판에 칠하는 액체의 색이며 농도는 마치 썩은 체액과 같다. 이것으로 삶을 위한 어떠한 것의 표면이든 칠하기 불편해 보인다. 회전축이 돌아가는 대로 비정형의 형태로 아크릴 평면에 원을 그리다가 이내 흘러내린다. 그것은 투사되는 빔 프로젝터의 밝기와 천정의 광원에 따라 번들거리고 그 자체 살아 있는 듯 움직이면서 관람자의 망막을 자극한다. 이 액체는 벽면에서 돌출된 채 관람자가 서 있는 실재하는 공간으로 진출하려 한다. 이 장치는 어두움의 침묵을 드러낸다. 미술가는 그것을 욕망으로 본다. 달리 말해 이 장치는 보이지 않고 가늠되지 않은 심연의 욕망을 밝은 가시계로 돌출하는 포맷을 통해 드러내도록 설계된 결과이다. 이 때 관람자는 자신의 분명한 현실의 조건을 유지한 채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태량_EXISTENCE and THOUGHT 존재와 사고展_갤러리 그림손_2014

그런가하면 어두운 방에 설치된 VDL(2)를 구성하는 영상 속 소녀가 미술가의 큰 그림을 등지고 관람자를 향해 강령을 반복해 읊조리는 첫 번째 사건에서 그 소녀가 음식이 차려진 탁자 앞에서 아무런 말없이 오로지 식사를 하는 두 번째 사건으로 옮아가는 시점에서 UHD패널의 화면 전체가 균일하게 밝아진다. 이는 화면에서 이미지가 사라진 바로 그 사실에 관한 시간의 간격이다. 이 시간의 틈에서 관람자는 UHD패널 표면에 남은 누군가의 지문과 먼지를 인지할 정도로 화면의 물리적 사실이 복원되고 동시에 어두운 방에 자신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화면은 이내 공백을 연속해서 그 것이 그냥 빈 공간, 빈 시간이 아니라 소녀가 음식을 차려 둔 새하얀 식탁보임을 초점 거리를 멀리(zoom out)해서 확인시킨다. ● 이 틈의 지점에는 세 가지의 사실이 교차한다. 그것은 화면의 물리적 진실, 실재하는 공간을 장악한 관람자의 존재, 그리고 카메라에 의해 기록된 새하얀 식탁보의 환영이다. 소리가 멎고 이미지가 사라진 채 흰색으로 환한 화면은 아무 것도 없고 적막만 부각된다. 이처럼 침묵의 지점은 관람자에게 그 장치가 물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하고 습관적 일상에서 잊었던 그의 극명한 존재를 발견하게 하고 동시에 그 침묵의 틈은 한낱 가상일뿐인 소녀에 몰입했던 착각을 관람자 스스로 깨닫게 한다. 이들 진실의 발견은 침묵에 의해서 이다. VDL(1) 버전의 침묵이 비정형의 액체라는 대상을 통해 경험되지 않은 세계를 인위적이고 위협적으로 깨닫게 한다면 VDL(2) 버전의 침묵은 대상의 진실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의 진실, 이들 둘 다를 한꺼번에 비어 있는 간격을 통해 조명함으로써 목격자 스스로 각성하게 한다.

이태량_EXISTENCE and THOUGHT 존재와 사고展_갤러리 그림손_2014

미술가는 대개 새로운 매체를 도입하거나 비약을 시도할 때 동질성의 파괴에 직면하게 되고 주변의 염려를 한 몸에 받는다. 그 변화는 미래에서 오는 신호를 자신의 미술을 통해 반응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이태량이 최근 제시하는 두 개의 새로운 버전은 매체를 적용하는 측면에서나 실재하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면에서, 그리고 관람자에게 기회를 부여하는 면에서 비약으로 비친다. 이들 VDL 버전은 발설되는 영역을 너머선 세계에 대한 관심을 비시각적 매체의 도입을 통해 실재하는 화랑공장에 욕망, 독백, 침묵과 같은 개념을 가시화한다. ● 이 두 버전은 상반된 요소들이 결합된 장치를 통해 관람자에게 시각적으로 호소하고, 시간의 틈을 가시화하는 영상의 연출을 통해 관람자에게 각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 두 버전과 함께 이번 전시회에 소개되는 "회화적 부조"와 특수 LED를 적용한 "회화적 패널"은 VDL 버전의 비약이 과거의 거장의 영향에 대한 분투에서 보듯이 미술가 내부에서 근원을 두고 오래도록 품어온 내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겨났음을 보증한다. ■ 이희영

Vol.20140910e | 이태량展 / LEETAERYANG / 李太樑 / mixed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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