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잡화점 General Store

Family Name & Given Name展   2014_1010 ▶︎ 2014_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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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010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현주_류장복_류해윤_릭킴_박용 연기백_이재헌_정원연_조광희_최중원

주최,주관 / 우리가족플레이연구소 기획 / 김용민 매니저 / 유혜림

크리에이터 김소현_김시연_김신애_나민경_김민영 박희현_배미나_배은영_송서현_이지원 엄세영_장윤정_전다애_전우상_조아현

관람시간 / 11:00am~07:00pm

통의동 보안여관 ARTSPACE BOAN 서울 종로구 통의동 2-1번지 Tel. +82.2.720.8409 cafe.naver.com/boaninn www.facebook.com/artspaceboan

우리가족플레이연구소가 주최하는 『잡화점』은 동시대 가족을 주제로 한 전시다. 지금, 가족은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판다. 그것은 콘텐츠로, 가족이 머무는 집에 각각의 소비문화가 들어왔다. 아이에게는 게임, 엄마에게는 쇼핑, 아빠의 경우는 뉴스나 스포츠다. 바로, 미디어가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 미디어가 집밖으로부터 왔지만 지금은 몸의 일부로, 가족의 소통수단으로, 또한 집 속에 가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집으로 들어온 미디어, 소비다. 그래서 '잡화점'이다. ● 이 기획은 크게 두 가지로, 생산의 범주에서 가족, 소비의 측면에서 가족을 다룬다. 다시 말하면, 자연(미술)과 미디어(아트)다. 생물학적인 가족을 너머서는 가족, 동시대 가족의 규정은 디지털미디어 시대를 구조화하는 것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가족은 인간 개개인을 연결하는 창발적 융합의 가능성이 숨어 있는 지점이다. 이곳은 위계 없이 질서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자연과 닮아 있는 처소다. 언제나 자연 그 안에 생명이 숨어서 발현되는 것처럼, 각각의 가족은 그 자체에 저마다 특수한 생명운동의 원리가 내재돼 있다. '다르다. 하지만 다르지 않다.'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구조화 되어 있다.' 이것이 자연(미술)과 미디어(아트)를 잇는 내재하고 있는 원리, 가족이란 실마리다.

정원연_트라우마의 족보_가변설치_2014
릭킴_FDP(Face Drawing Project)_혼합재료_2014
김현주_김밥더듬기_단채널 영상_00:08:30, black and white_2014
류장복_초저녁에 불두화_리넨에 유채_72.2×90cm_2014

좀 더 살펴보면, 자연미술과 미디어아트는 예술바깥에서 예술에 관여한다. 그 바깥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바깥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연미술은 서양미술사에서 등장한 대지미술, 환경미술, 생태미술과 구분된다. 미디어아트 역시 전통적 미술과 갈린다. 내부의 바깥은 예술 안에 예술 아닌 구역으로 예술의 결핍된 공간이다. 미디어는 메시지로 그 자체는 예술이지 못한다. 그럼에도 미디어는 예술 안에서, 예술의 결핍된 메시지로 예술에 개입하고 있다. 아울러, 자연은 본성(Nature)으로 그 자체는 예술을 넘어서면서 예술을 포괄한다. 동시에, 자연은 예술 안에서 예술의 결핍된 본성으로 예술에 개입한다. 이 곳이 본성과 메시지가 만나는 지점, 가족이다. 하나의 본성(Family Name)을 갖고 메시지(Given Name)를 낳는 장소다.

류해윤_모내기_종이에 아크릴채색, 핸드메이드 나무 프레임_51×65cm_2014
이재헌_Mother And Son_캔버스에 유채_45.5×38cm_2014
조광희_날숨들숨_깃을 단 양단 한실이불, 디지털액자, 아크릴, 목재, 영상설치_130×79×13cm_2014

이 틈(성과 이름)에서는 노이즈(마찰음)가 발생한다. 그 어느 것도 내 의도로 정해진 것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두 개의 이름이 갈등을 빚고 있다. 여기서 갈등은 의미화 이전의 소리다. 자연에서 노이즈는 파도나 바람소리다. 의미를 갖지 않는 소리며 틈이다. 자연에서 비롯되는 틈은 충분히 비어 있어서 응시의 거리를 제공하여 메시지를 발견한다. 미디어의 노이즈는 기계적 소음이다. 의미화 이전의 실재, 곧 예술의 원형이다. 노이즈를 통해 자연과 미디어는 이 틈에서 무한이 자리바꿈을 한다. 이것은 아들이 아빠로 딸이 엄마로 끊임없이 자리바꿈을 하는 가족의 역사와 닮아 있다. 이 곳에서 동시대예술의 의미는 드러난다. '아버지의 성을 왜 내가 따라야 하는가.' 그리고 내 이름은 내 것이 아니면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가장 분명한 주소다.

연기백_A Mirror_자개 거울_114×90cm_2011
박용_마음의 풍경_유채, 아크릴채색_50×87cm_2011
최중원_회현제2시범아파트_잉크젯 프린트_120×160cm_2010

구체적으로, 이 틈은 집(부엌)에서 출현하는 음식물 찌꺼기로 장소를 바꾼다.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도 모두로부터 소외당한 잉여물이다. 이점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음식물은 아버지의 성(Nature)으로 자연으로부터 왔다. 찌꺼기는 아버지로부터 분리된 나의 이름(Name)으로 미디어다. 찌꺼기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미디어의 찌꺼기는 자연에게 음식물이 된다. 환원의 방식이 아닌 늘 새로우면서 같은 자리로 이동한다. 음식과 더불어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게 있다. 대화다. 대화는 함께 먹는 것에서 시작한다. 바로 부엌이다. 부엌은 거실보다도 더욱 중요한 장소다. 가족도 그렇고, 손님(이웃)이 집에 방문하면 가장 먼저 과일과 차를 제공한다. 거기서 대화가 시작된다. 대화는 음식의 찌꺼기로 확인된다. 정확하게, 대화의 소재가 되는 대상이 소외당한 잉여물이다. 공동의 적을 만듦으로 그를 우리와 분리하여 우리는 같은 편이 된다. 이렇게 남은 것은 공유된 마음으로, 대화 속에 공동의 적을 만들고 우리는 친한 관계(친구)가 되어 다음의 식사시간을 정한다. 그렇다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대화는 미디어다. 대화로 서로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면서 이웃은 낯선 외계인이 아닌 가족과 같은 이웃이 된다. 처음은 어색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 '자연스럽다'는 것은 집과 닮아서 굳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집이 파편화 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질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의식하지 않는다. 거실, 안방, 화장실, 배란다, 창고 등 각각의 공간은 가족의 합의하에 구분되어 있다. '보아하니, 이곳을 거실로 하자.', '여기도 보아하니, 부엌으로 하면 적당하겠다.' 안방을 드레스 방으로 활용해도, 부엌을 거실로 활용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각의 집은 저마다의 질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다. 각자의 집에는 '같이 보는 것'이 생략되어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에, 자연이 질서를 스스로 감추고 있듯이 가족은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미디어를 감추고 있는 가족, 서로에게 근본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말하자면, 사랑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미 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는 약속이다. ● 미디어의 전제조건은 약속이다. 알고리즘이라는 언어로 프로그래밍 된 미디어는 이미 약속된 언어다. 이 말은 약속된 언어가 해석되고 구현되면 기계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반대로, 약속은 대화할 수 없다는 것,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빈 공간에 관한 약속이다. 이 지점이 인간을 동물과 기계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자연은 말하지 않는다. 식물도 동물도 곤충도 인간과 같은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약속된 언어가 작동하고 있다. 이것을 연결시켜주는 게 '결정'이며 '판단'이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는다. 곤충은 뼈를 갖고 있지 않다. 돌은 숨을 쉬지 않는다. 자연은 계속 그 결정된 상태로 움직이고 있다. 단지, 자연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을 뿐이다. 자연, 그 속에서 식물이라는 동물이라는 타자들의 결정이 자연을 밖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구성한 것이다. ● 약속은 분명하지 않은 것에서 서로가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신화의 세계다. 가족은 인간에게 주어진 작은 신화의 세계다. 결정을 통해 의미가 발생하고 가족의 이야기가 생산된다. '결혼 하는 것', '아이를 낳는 것', '새로운 식구를 들이는 것'등. 결정은 알 수 없이 주어진 것에 대한 판단이다. 이 판단으로 말미암아 이야기가 발생된다. 바로, 문학(예술)이다. 우리가 문학을 대할 때 깊은 심연을 서성이다 온몸이 물로 흠뻑 젖은 채 주인공과 함께 깊은 바다 속으로부터 빠져 나온다. 이것이 주인공과의 약속이다. 그렇게 하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공유하고 그 결정에 동참하는 것이며, 뭔지 모를 권력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의 권력은 자본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예술에서의 권력은 작품이며 미디어다. 권력 없는 작품,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작품, 음식물찌꺼기와 같은 작품, 작품이 없는 작품의 전시가 자연미술과 미디어아트를 잇는다. 가족의 구성원은 권력으로부터 기인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권력이란 헤게모니를 잡고 있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그 가정은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로 인해 눈치가 작동한다. 존경은 권력이 아니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어머니를 어머니로 결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족에서 존경은 결정이다.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교육열, 아빠의 무관심이 존경과 권위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과 무관하여 그것을 넘어서서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결정이 자연(미술)을 지금의 담론으로 하여 디지털미디어 사회의 미디어(아트)를 보다 더 고고학적인 방향으로 인도하게 한다. ●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조상과 우리의 죽은 친구를 불러낼 수 있으며, 아직 알지 못하는 자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하지만 아직 이곳에는 없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바로 우리 얼굴에 증조할아버지의 표정이 남아 있다. 죽은 친구의 습관이 우리 몸에 배어 있다. 우리는 언젠가 태어날 아기의 모습을 닮았다. 저기, 뿌리가 잘린 죽은 나무가 겨울을 지나 봄을 맞았다. 거기서 싹이 나고 잎이 무성하게 되었다. 죽어 있음 위에 살아있음이 푸른 기묘한 현상이다. 이것이 자연이고 미디어다. 존 레논 사망 34년 아직도 그의 모습은 유투브를 돌아다니며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마치, 메시아처럼. 놀랍게도 우리의 자녀가 알지 못하는 그와 논다. 텔레파시의 역사다. 몸이 분리된 샴쌍둥이의 교감이다. 결핍과 틈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세계는 어딘가 비어 있기 때문에 완전하다. 이것을 맹목적인 기계는 알 수 없다. 기계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내려 하기 때문에 인간에 도달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한다. 이것이 미디어의 무덤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희망은 우리의 자식이 언젠가 아이를 낳을 것이란 기대다. 그 무덤 위에 싹이 피어오를 때를 기다리고 있다. 함께 소비를 통한 생산의 가족이다. ■ 우리가족플레이연구소

관객참여 프로그램 1. "요즘 뭐하고 지내세요?"
관객참여프로그램 2. 릭킴의 미디어 퍼포먼스

워크숍 안내 관객참여 프로그램 1. "요즘 뭐하고 지내세요?" 장소 : 통의동 보안여관 1층 대상 : 전체관람객 일시 : 10월 10일(금) / 11일(토) / 18일(토) 오후 1시-6시 진행 : 우리가족플레이연구소 내용 : "요즘 뭐하고 지내세요?"는 우리가족플레이연구소가 현대 가족들에게 묻는 인사말로 총 3회에 걸쳐 진행하는 관객 참여형 프로그램이다. 관객들은 종이블럭 위에 페인트로 인사에 답한 뒤, 낯선 이웃들과 블럭을 쌓아가며 전시 공간을 새롭게 구축한다.

관객참여프로그램 2. 릭킴의 미디어 퍼포먼스 장소 : 통의동 보안여관 1층 대상 : 전체관람객 일시 : 10월 10일 (금) 오후 6시-7시 진행 : 작가 림킴 X 프로그래머 요한 내용 :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자유롭게 오가며 펼쳐지는 릭킴 작가의 PFD(Project Face Drawing)프로젝트가 전시의 오프닝 행사로 진행된다.

Vol.20141012f | 2014 잡화점 General Store-Family Name & Given Name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