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展 / CHUNGHYUN / 鄭鉉 / sculpture   2014_1015 ▶︎ 2014_1109 / 월요일 휴관

정현_무제 Untitled_종이에 콜타르_109.5×78.5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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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01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30am~07:00pm / 일요일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 Hakgojae 서울 종로구 삼청로 50(소격동 70번지) Tel. +82.720.1524 hakgojae.com

영혼의 울림 (Movimento dell'anima) ● 조각가 정현의 작업은 '흐름'을 담고 있다. 시간의 흐름, 의식의 흐름, 기(氣)의 흐름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시각적 서사시이다. 흐르는 세월이 우리네 삶에 남긴 흔적을 오롯이 담고 있는 체험적 기록이다. '흐름'의 속도와 힘, 움직임을 형태화하고 '흐름'의 매개가 되는 공간까지 아우르는 다차원적 창작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샘솟듯 흘러나와 시각적 언어로 발현된 창작의지를, 그 힘과 에너지를 세상에 전하는 울림이다. ● 이번 전시는 그가 어떻게 '흐름'을 담아 왔고 울림을 만들어 냈는지 보고 느낄 수 있는 체험의 장이다. 신작 드로잉 작품들을 이미 발표한 삼차원작품들과함께보여줌으로써그동안의작업들이형성한예술적맥락을되짚어볼수있게하는자리이다. 강렬한 존재감으로 그를 세상에 알린 '인체 작업'에서부터 쇠를 부수는 쇳덩어리 '파쇄공 작업'을 거쳐 작가의 골수로 빚은 듯 종이 위에 그려 낸 '드로잉 작업'까지 '정현표' 예술의 역사를 간결하게 보여 준다. ● 전시의 주인공은 신작 드로잉이다. 사람의 얼굴을 닮은 것, 나무나 풀처럼 보이는 것, 응축돼 있던 에너지를 발출하고 있는 듯한 형체 등을 그린 작품들로 전시장 벽면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삼차원 작품이나 지닐 법한 힘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함께 전시된 인체 작품, 파쇄공 들과 견주어도 손색 없을 정도이다. 그는 끌로 긁고, 정으로 쪼아 내고, 톱으로 썰고, 도끼로 내려찍듯 연필과 콩테(conté)를 움직여 종이 위에 조각을 했다. 그리고 콜타르(coal tar) 머금은 붓을 휘둘러 팔에서 전해지는 에너지를, 그 흐름을 형체화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을 '드로잉'으로 분류했다는 사실이 삼차원작업의물성과존재감을지닌이차원작업이라는것만큼이나흥미롭고역설적이다.

정현_무제 Untitled_스틸_110×126×126cm_2013
정현_무제 Untitlted_콘테 연필_79×55cm_2014
정현_무제 Untitled_브론즈_316×92×62cm_2013

디자인(design)과 함께 'disegno'라는 용어이자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드로잉(drawing)'은 직관적 창작의지, 예술적 충동, 감성의 표출 등 '날것'들을 정제해 완성시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각가 정현의 드로잉은 '날것'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내재하는창작에너지를뿜어내듯발산하는행위를세심하게다듬고조율하는과정을거치지않고있는그대로종이위에기록한듯하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드로잉'이 아니라 '스케치'에 더 가까운 것 아닐까. '스케치(sketch)'의 어원으로 지목되곤 하는 이탈리아어 단어 'schizzare'는 '짜내다', '내뿜다'를 의미하는데 전시되고 있는 '드로잉작업'을 설명하는 데 그보다 더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작품에 드러난 연필, 콩테, 또는 붓의 궤적을 찬찬히 살펴 보면 하나하나 섬세하게조절한것은아닐지라도내뿜듯휘두른손의움직임들을여과없이기록한것과는분명한차이가있음을알수있다. '스케치'인 듯, '날것'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가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창작에너지를 예술적으로 처리하고 승화시킨 것이다. 그렇게 예술적으로 거르고 담아 내는 과정을 거쳤기에 그 의식적 행위의 주체인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스케치'가 아니라 '드로잉'으로 구분한 듯하다. ● 어쩌면 '스케치'와 '드로잉'을 구분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스케치'와 '드로잉'을 구분하는 척도는 완성도인데 얼만큼 기술적으로 잘 다듬고 마무리해야 완성도가 높은 것인지 가늠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기준조차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학적 디테일'에 집착하는 글쟁이에게나 의미 있을 법한 완성도가 '정현 예술'을 논할 때에는 의외로 몹시 중요한 화두가 된다. 그는 '조각의 본질을 힘, 에너지로 파악한다'고 털어 놓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힘, 에너지, 물성, 실존, 해방 등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들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것들을구현하는것만이유일한사명이라여기는우직한작가로만알고있다면그를반만이해하고있는것이다. 사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어떤 기운,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힘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행위,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섬세함을 겸비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교묘한 기술과 기법에 빠져들거나 화려한 형태와 스타일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한다고 해서, 완전무결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그의 창작활동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고) 해서 완성도를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작업의 완결성을 판단하는 그의 기준과 그의 작업에서 완성도가 갖는 의미가 남다를 뿐이다.

정현_무제 Untitled_철판에 녹드로잉_71.3×71.3cm_2014

'Non finito'. 정현의 작업을 마주하면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예술적 개념이자 조각적 표현 기법이다. 'Non finito'란 '끝나지 않았음' 또는 '완성되지 않은 것'을 일컫는데 '의도적으로 미완성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행위, 또는 그 결과물'로 풀이하면 얼추 뜻이 통할 듯싶다. 말장난 같지만 '완성된 미완성' 아니면 '미완성의 완성'쯤으로 요약해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표현 기법으로서의 'non finito'는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남기는 진한 여운, 완성되지 못하고 '날것'과 다름 아닌 상태로 남겨져 있는 물체나 존재가 자아내는 처연함과 비장미 등의극적효과를주기위해서사용된다. 그리고 완성된 'non finito' 작품은 강렬한 존재감과 엄청난 표현적 힘을 지닌다. 참으로 '정현스러운' 것들 아닌가. 사실 그의 조각 작업 대부분이 의도된 'non finito'는 아닐지라도 'non finito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석고로빚은형체에마닐라삼을한겹한겹감아만든초기작품에서부터침목, 아스콘, 레진, 그리고 이번에 전시되는 청동 작품들까지 '인체 작업'은 거의 모두가 그렇다. 재료, 형태, 작업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근원적 힘을 품고 있는 완성된 날것들이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이상적 형태, 또는 추상적 개념과 가치의 완전무결한 구현이 아니라 무언가가 되어 가는 과정과 순간, 그런 와중에 있는 존재, 그 모두를 가능케 하는 힘과 행위 자체를 드러내고 담아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 점에서 조각가 정현은 종종 비교되곤 하는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가 아니라 1504년 '다윗상(David)'의 완성을 마지막으로 1564년 죽을 때까지 창작 에너지를 'non finito'에 쏟아 부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와 닮아 있다.쟈코메티의 작품들과 정현의 '인체 작업', 특히 초기작들 사이에는 형태적, 시각적 친연성이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큰차이가있다. 비록 'non finito 적'인 요소들을 내포하곤 있지만 쟈코메티의 작업은 시공을 초월하는 실존적 존재, 또는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있는 전형적 존재를 구현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그래서 늘 '실존주의적'이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에 반해 흐르는 시간 속의 존재, 기(氣) 또는 에너지의 흐름과 응결이 만들어 내는 그 무엇을 '캡쳐'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정현의 '인체' 작업은 체험적, 현상학적 성격이 더 강하다. 이러한 특성은 선문답을 하듯 그가 밝힌 그의조각관에서도엿보인다. "하찮게보이는것에서발견되는가치, 말로 표현되기 이전의 것, 살아있음 그 자체, 날것, 예측을 불허하는 이미지, 느닷없음, 비탄으로부터의 해방, 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헤맴들의 깊이..."공교롭게도 얼핏 보면 마치 미켈란젤로의 대표적 'non finito' 작업 '노예(Slave)'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돌 덩어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인 듯 사람 아닌 에너지 덩어리. 비록 지금은 '노예'라 불리고 있지만 미켈란젤로는 원초적 힘을 지닌 이 존재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정현은 자신의 '인체 작업'에 '무제', 즉 제목 없음이란 역설적 제목을 붙였다.

정현_무제 Untitled_브론즈_250×75×60cm_2012

그렇다면 '파쇄공작업'은? 단언컨대 조각가 정현이 만든(?) 최고의 문제작이다. 침목이나 아스콘으로 만든 '인체 작업'과 마찬가지로 '누적된 시간이 불러일으키는 인고의 세월, 그 시간의 숙성이 드러내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고 싶은'마음에서 비롯됐음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한 것이라곤 산업현장에서 철판 등을 부수는 쇳덩어리를 옮겨 온 것뿐이라서 그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Non finito' 작품도 아니고 '미완성의 완성'을 구현하려 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작가의 개입을 통해 무언가가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도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뒤샹(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readymade) 대표작 'Fountain(분수)'조차 공장에서 찍어낸 남성용 소변기에다가 자신의 손으로 'R. Mutt'이라고 적은 뒤 전시대 위에다가 뒤집어 놓고 'Fountain'이라 명명하는 정도의 개입은 있었기에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최소한의 개입이지만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새로운 맥락을 형성하는데성공했기때문에작업(作業), 즉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파쇄공은 원래 있던 곳에서 전시장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이름조차 없다. 이름이라도 불러주어야 하나의 몸짓이 꽃이 되듯 파쇄공도 쇳덩어리에서 다른 무엇이 될 것 아닌가. ● 파쇄공 작업은 열린 결말이다. 숙성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날것이 들려주는 후일담이다. 들고 나고 흐르지만 없어지지 않는 에너지, 기(氣)를 위한 증언이기도 하다. 자신의 작업을 '격렬하게 폭발하고 발산한 뒤에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들여 더 조용해지고 담담하며, 주장하기보다 성찰하는 것'이라고 언명한 작가가 넌지시 던지는 선문답의 화두이다. 닳고 닳아 20톤이 12톤이 될 때까지의 세월과 사건들을 견뎌 온 쇳덩어리가 안으로 갈무리해 둔 힘, 그 에너지가 느껴지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걸 느낄 수 있는 직관력, 통찰력이 있느냐고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어떤 행위의 개입 없이도 '파쇄공 작업'이 가능하다고 믿는지도 모르겠다. 부딪히며 닳아 없어진 8톤만큼의 에너지와 절절한 사연들이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스러져 가는 쇳덩어리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라고 여기는 것은아닐까. 그런 인식, 깨달음이 산업폐기물로 제철소 야적장에 방치될 뻔한 쇳덩어리를 울림 있는 작품으로 전시장에 놓이게 한 것이니 감상에 젖은 글쟁이의 억측만은 아니리라. 그의 말처럼 조각의 본질이 힘, 에너지라면 그는 힘, 에너지를 다루는 사람이다. 그런데 에너지의 본질은 움직임, 흐름이다. 결국 그는 움직임, 흐름을 다루는 사람이란 얘기가 된다.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에 따르면 움직임을 잘 담아낸 작품에서는 '영혼의 울림(movimento dell'anima)'이 느껴진다고 한다. 움직임을 담아내고 흐름을 만드는 정현의 작업에서 전해지는 기운, 그것이 바로 '영혼의 울림(movimento dell'anima)'이다. ■ 김영준

Vol.20141019c | 정현展 / CHUNGHYUN / 鄭鉉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