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종례展 / CHAJONGRYE / 車鍾禮 / sculpture.installation   2014_1103 ▶︎ 2014_1129 / 일요일 휴관

차종례_Expose exposed 111030_나무_58×58×67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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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103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 Gallery Bundo 대구시 중구 동덕로 36-15(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53.426.5615 www.bundoart.com

다양한 표면의 상태로 맴도는 조각의 한 가지 방법론 ● 나는 갤러리 분도에서 시작되는 조각가 차종례의 전시를 화랑 스태프들과 준비하면서, 그녀의 작업에 관하여 생각할 기회를 만들었다. 삼 년이 되었다. 내가 그녀의 작품을 직접 본 이후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그동안 나는 이 조각가의 독창적인 작품에 관하여 정리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본 바에 관해서도 살펴보았다. 물론 우리는 안다. 대부분의 전시 서문이나 미술 비평이 비판보다 칭찬하는 쪽에 가깝다는 점을 말이다. 차종례 작가의 경우 역시 여러 평론이나 자기 기술에서 사변적인 내용을 주로 건드리면서 그녀의 작업을 복잡한 관념체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가 봤던 그녀 작업의 특징은 명료함이다. 나는 명료함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아마도 내가 쓴 다른 예술 평론에서도 이 단어는 곧잘 등장했을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도 쓴다. 나는 차종례의 조각을 둘러싼 많은 찬사가 그녀가 가진 명료함을 도리어 흩뜨려 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그녀에 관한 서술이 기본적으로 작업에 목재를 쓰는 전후맥락과 관련된 설명에 바탕을 두고, 궁극적으로는 조각가의 내면과 작품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강조해 온 건 분명하다. 이를 하나의 견해가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나? 어쩌면 이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내면이라는 두루뭉술한 모델에 기대어 더 이상의 설명을 못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에너지를 언급하는 것 또한 측정 불가능한 물리 현상과는 관련 없는 레토릭이 아닌가? 이 모든 게 작가가 펼쳐놓은 작업의 현묘한 외형 때문이다. 그것은 보는 우리로 하여금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게끔 한다.

차종례_Expose exposed 141007_나무_120×120×40cm_2014
차종례_Expose exposed 140715_나무_133×90×18cm_2014

커다랗고 수도 없이 솟아 오른 그 굴곡은 어떤 것은 뾰족하고, 어떤 건 몽글몽글하고, 또 어떤 건 넘실댄다. 이 단자들의 집합체들은 관객들이 실물로 봤거나, 아니면 과학 도감이나 영상물로 봤거나 간에 자연 속 생명체 활동 아니면 화학 반응 혹은 물리 작용과 아주 흡사하다. 그녀의 조각에는 자연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조화의 형태가 재현되어 있다. 아, 재현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되겠다. 작가는 본인의 작업이 구체적인 대상을 형상으로 나타낸 의도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미메시스(mimesis)의 원칙은 많은 예술가들이 그들 작품을 자연에서 본뜬 것임을 털어놓고 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야기 했듯이, 작가는 자연의 법칙들을 모두 알기 전까지는 자신의 미술 작품에 자연을 완벽하게 옮길 수 없다. 따라서 차종례의 조각 작업 앞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은 작가 본인이었고, 우리들은 거창한 뭔가로 이야기를 치장하려 한 거짓말쟁이였다. 나는 작가를 도와서 진실한 원리를 찾고 싶다. 하지만 완전한 설명은 못 된다. 일단 그녀 작업에 대한 예술사회학(과학)적 가설은 세울 만하다.

차종례_Expose exposed 140925_나무_40×40×13cm×12_2014
차종례_Expose exposed 141015_나무_72×114×26cm_2014

그녀의 작업 안에는 같은 형태가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아주 사소한 변형을 이룬 채 조각되어 있다. 전체를 보지 말고 그 원뿔형의, 버섯 모양의, 산등성이 형태의 완성태 하나를 보자. 내 추론이기는 한데, 작가에게는 매번 작은 조각 하나하나를 완성시키는 게 한 단위의 노동과정이다. 나는 이 낱개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SSP라고 부른다. '스스로 추진하는 단자(self-propelled particle)라는 뜻이다. 바다 속 물고기 떼, 번화가를 거니는 인파도 그렇다. SSP는 옆에 있는 단자들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연동한다. 차종례 조소 작품 속 낱개 형상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입자들이다. 여기엔 전적으로 조각가의 머리와 손끝에서 나오는 매너리즘이 작용한다. 미술사를 공부했다면, 매너리즘이 구태의연함이란 부정적인 뜻보다 장인의 숙련된 손놀림으로부터 비롯된 개념이란 사실을 안다. 조각가의 매너리즘은 낱개 모양을 명료하게 나타내는데 일차적인 목적을 두고, 그 다음에는 전체의 조화로운 흐름을 눈여겨보았다. 작가의 손이나 도구가 전후좌우로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비집고 들어간 틈은 유난히 도드라진 개체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가 가진 의식과 기교가 완성한 SSP를 우리는 하나의 작품으로 감상한다.

차종례_Expose exposed 130622_나무_76×102×41cm_2013
차종례_amiliar or unfamiliar01_나무, 레진_42×180×7.5cm_2013

여기에 내면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주관성, 예컨대 작가의 기억, 꿈, 찰나의 인상은 내면을 떠나 현실 속 3차원 공간이라는 외면으로 솟아올랐다고 해석하는 것은 쉽다. 이런 상투적 표현에 내가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녀의 작업은 내면적인 영역에서 현실 영역으로 옮겨 온 것이 아니라, 올까말까 망설이며 그 경계의 문턱 위에 불안정하게 놓여있는 상태로 보는 편이 더 매력 있다. 그 모호한 위치로 오게끔 추진된 그녀 개인의 주관적인 이야기에 대해서, 비평의 형태가 작가론이 아닌 이상에야 꼭 알아야 될 필요는 없다. 작품이 작가가 아닌 보는 관객들의 상상으로 되먹임(feedback)되는 그녀의 작업은 내면과 외면의 경계인 동시에 2차원과 3차원의 경계를 떠받히는 표면의 명료한 힘이다. ■ 윤규홍

Vol.20141103b | 차종례展 / CHAJONGRYE / 車鍾禮 / sculpture.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