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W

박성현展 / PARKSUNGHYUN / 朴成鉉 / painting   2014_1114 ▶︎ 2014_1121

박성현_Flow_캔버스에 유채_112.2×162.2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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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홈페이지_www.pshclub.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4 퍼블릭에어 레지던스 프로그램 입주작가展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충청북도_충북문화재단 기획 / 퍼블릭에어

관람시간 / 10:00am~06:00pm

653 예술상회 갤러리 653 ART FIRM GALLERY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2동 653번지 Tel. +82.10.6682.5502 blog.naver.com/pubair2010 www.publicair.org

박성현_생경함으로 다가오는 존재의 부재 - 공간과 시간 or 차이의 묘사 ● 그림마저도 스스로가 관람의 목적이아님을 명시하고 있다. 결국 얼굴에서 중요한 눈동자는 사선을 바라보면서 그 곳에 당도해있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대상을 떠올릴 때도 눈동자는 정면을 향해있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대상을 선택하고 인물을 그리기 시작한다. 처음 보는 인물의 특별함과 거기에서 오는 인간자체의 모습이 선택의 조건이다. 특별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다 같은 인물이다 . 유전자와 염색체가 달라서 외모는 다 다를 수 있지만 본질에서 오는 인간상을 그리고자 작가가 선택한 요소이다. 그만큼 시간의 변화를 잘 담아내는 대상 중에 하나인 것이다. 시간이 존재하는 공간 그리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변화에 의해 사람의 모습은 언제고 바뀌기 마련이다. ● 그렇기 때문에 인물이라는 대상은 가히 가변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작가는 대상으로부터 그 찰나에 느꼈던 이미지를 화폭에 담아낸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노동집약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스케치를 하고 초벌칠을 하고 물감을 배합하고 색상을 배치시키지만 철저히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도 작가는 그 당시의 인물을 그려내는 것으로서 완성이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과의 모양새, 빛깔이나 품질보다 두꺼운 껍질 내부에서 베어나오는 향을 감지하고 그 향을 통해 스스로가 가지고 있었던 내면의 이미지로 다시 사과를 그리듯이 인물 시리즈는 대상과 관람자 사이의 시간인 것이다.

박성현_Flow_캔버스에 유채_112.2×162.2cm_2014

실제로 작가가 인물을 선택하고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하고 물감을 배합하고 초벌칠하고 덧칠하는 과정 중에 가장 소모적인 시간은 인물을 선택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요성은 그림을 그릴 대상을 고르는 것이 아닌 모델이기 이전에 나와 상대, 타자와 나로서의 교감에 더욱 공을 들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작품을 보는 이들은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려진 테크닉에 가려져 작가가 모델로서 마주하고 있는 당시의 시간을 그리고 있는 것을 지나치게 된다. 이는 리얼리즘이라는 사조가 나타내고 있는 역설적 표현들이 기술적 표현에 의해 묵살되고 있는 현상으로 그만큼 우리는 자극적 내거티브(사실)에 의해 내러티브(이야기)를 바라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것을 "착각에 의한 착시"라는 가칭의 단어로 가정해보았다. 착시는 착각에 의해 생겨나며 얼룩말의 무늬를 봄으로 인해서 우리는 얼룩말 자체의 존재를 부정해 버리게 된다. 흔희 쉽게 우리는 대상보다는 표면에 더욱더 집착하게 되는 미디어 증후군에 가까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을 보이고 있다. ● 그런데도 작가는 더욱더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려냄으로 인해서 스케치하기 시작하는 순간이후에 시간의 영향을 받는 모델과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일례로 작가는 그 당시의 인물을 그리기 시작하고 수많은 시간을 작업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작업실에서 흐르는 시간도 몸으로 체득한다. 사실그대로라면 처음에 모델을 보았을 때와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실제인물이 변화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재로 머리카락이나 손톱 피부조직의 변화와 더불어 심적 상황에 따른 정체성에도 미묘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고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모델과 사진 속 모델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가변적 대상일 수밖에 없고 당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 인해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다.

박성현_Flow_캔버스에 유채_53×45.5cm_2014

작가는 거기에 반하는 언어인 시간을 설명하는 요소를 첨가하기 시작하였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물고기가 그 예이지만 그 모습은 분명치 않고 그림 속 대상의 주위를 산재해 퍼져있고 피사체 또한 다시금 인물을 향해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열대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열대어로 설명되지 않으며 핵심은 그러한 관계의 사이에서 발생되는 시간으로 축약해 놓은 대상인 것이다. 그려진 그림과 그것을 관람하는 관람자 사이의 사물을 배치해 놓음으로서 공간의 유효함을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 보는 이와 작품사이에는 공간이 필히 존재하지만 공기층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하는 오류들에 대한 역설적 장치이기도 한 것이고 그 물고기의 실루엣은 언제고 다른 형태의 것으로 화면을 장악한 채 표현이 되기도 한다. 물고기의 입장에서는 절대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것 아닌 질량과 밀도 유속을 수염과 옆줄이라는 진화론적 매체를 통해 감지해낼 수밖에 없는 공간의 유효함은 더 이상 망막에 의존해 직접 작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한계점에서 작가는 오랜 작품의 끝에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끌어들이는 동시에 타자와 나의 관계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 관계라는 것은 나와 상대가 밀접했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닌 물리적 유속을 발생시키는 질량을 포함한 공간이 있어야만 성립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성질의 상대적 기능의 차이에 따라 관계가 성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공간이 있음으로 인해 시간이 있고 그에 따른 물리적 변화도 나타난다. 결국 인식의 차이이다. 숱하게 많은 과학적 이론들이 그를 증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라는 대상을 보며 느끼는 인식은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차이를 읽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인 증명일 뿐이며 필수 불가결하지 않다. 하지만 차이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관계를 통한 미적본질을 간과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예를 들어 내가 서 있는 곳을 기점으로 100m지점에 떨어져있는 나무를 과거 20초의 나무라고 인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나무와 20초의 간격을 지나서 마주했을 때 나누는 그 짧은 시간동안에도 변화를 가졌고 이미 20초 전의 나무가 아님을 작가는 설명한다. 결국 그 변화의 폭에 선명하지 않은 불특정 사물을 그려 넣음으로 인해 나와 상대(그림)의 차이를 의도한 것이다.

박성현_A Journey To Nothing_캔버스에 유채_130.3×162.2_2013

완성을 위한 미완의 작업 - 流作 ● 유작의 뜻을 달리해보았다. 보존되는 작품이기보다 소비되고 소모되어 흘러가는 흐름의 유작으로 개념을 달리했다. 그리고 그 유속의 흐름에 의해 대상의 힘을 공간과 시간의 영향을 받는 차이로 설명한다. 같은 한사람인데도 실제대상과 그림 속 대상의 다름을 인지하는 것은 오로지 작가 자신인 것이고 거기에서 오는 생경함이 더욱더 인물을 독립된 개체로 상징화 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그 인물 속에는 작가 자신도 포함되어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언제부터 작가는 독립된 개체가 가진 시간을 내포하기 시작하였을까. 그것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다루기 시작하면서부터 였 을 것이다. 모델을 선택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물감으로 묘사하기 이전의 과정(준비하는 단계)을 더 많이 기억한다고 작가는 이야기 했다. 작가의 작업적 해석은 바로 이곳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박성현_one's eyes_캔버스에 유채_116×130.3cm_2013

정체성 ● 누구든지 그러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존재를 되새김질하고 다시 내 존재를 반영해내며 그 요소에서 또 물음을 찾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결론을 도출해낼 수 없고 가령 그렇다 해도 그것마저도 잠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순간 다른 나를 발견하고 거기서부터 .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존재에 대한 탐구가 미술사적 가치로 많이 드러나기도 한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의식너머에 존재하고 때로는 육체가 나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나를 확립시키는 것은 내가 속해있는 환경 즉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공간들이다. 물속에 있는 나, 숲속에 있는 나, 방안에 있는 나, 도시에 있는 나, 그리고 사람들과 섞여있는 나, 상대와 있는 나처럼 나와 상대적인 물질과 대상,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는 요소에 나를 포함시켰을 때 정체성이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보았을 때 박성현의 그림은 철저히 그림으로서가 아닌 마주하고 있는 나와 가변적 인물, 작업으로서 배치되었을 때의 대립된 긴장감으로 공간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더 이상 관조를 통해 생기는 이질적 대상(작업)이 아님을 관계로서의 작업임을 명시한다.

박성현_one's eyes_캔버스에 유채_116×130.3cm_2013

무엇을 위한 작업인가. ● 기술과 테크닉으로 단련된 생산적인 작업은 더더욱 아니다 이미 그는 노동집약적 작업을 통해 본질과의 차이를 설명하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작품 속 대상과 실재인물의 차이를 느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작가는 이러한 차이로 인한 착각을 관객들에게 던져놓음으로서 현대미술의 맹점을 되짚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인물을 선택하고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에 있어서 작업을 풀어나가는 방식에 능숙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글을 마무리한다. ■ 추연신

Vol.20141114i | 박성현展 / PARKSUNGHYUN / 朴成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