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iness to lightness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장승희展 / JANGSEUNGHEE / 張丞希 / painting   2014_1203 ▶ 2014_1209

장승희_Inca storyⅠ_한지에 스톤파우더_50×50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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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20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아이 GALLERY I 서울 종로구 인사동 4길 8(낙원동 283-13번지) 2층 Tel. +82.2.733.3695 www.egalleryi.co.kr

막다른 길목에서의 '탈출기' ● 장승희는 동양화에서도 다루기가 매우 까다롭다는 석채(石彩)를 사용하고 있다. 매체와 싸우며 얻어진 그녀의 작업은 '인공'이 판을 치는 오늘날, 그 자체로 시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석채는 '한 켜'씩 색을 쌓아 갈수록 투명하게 발색하며, 보다 정확하게는 붓질의 적정한 누적을 통해서만 본연의 투명한 색을 발산하는 특성을 지녔다. 그러기에 석채를 다루는 작가들은 특유의 섬세하고 예민한 회화 감각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석채란 것이 색채가루가 '쌓임'으로써 '투명성'을 발휘하는 역설적인 재료라면, 장승희의 작업은 석채가 지닌 역설 속에서 생겨난 셈이 된다. 석채를 다루는 일 자체가 지닌 의미와 더불어 소재의 문제를 감안하면 역설은 배가된다.

장승희_Inca storyⅡ_한지에 스톤파우더_50×50cm_2014
장승희_break of dayⅠ_한지에 스톤파우더_60.6×72.7cm_2014
장승희_break of dayⅡ_한지에 스톤파우더_60.6×72.7cm_2014

장승희의 그림은 익숙하다. 이 작가가 다룬 청바지, 가방, 꽃, 구름, 지도, 자동차 등의 소재는 진부하게 보일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친숙함은 청바지와 가방으로 대변되며, 이들은 또한 집요할 정도로 반복되어 나타남으로써 자기 '순환적'인 실생활계를 지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장승희 작업은 단순히 순환적인 실생활계를 지시함을 넘어 하나의 패러독스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청바지가 실생활계를 지속적으로 지시할 때 그것들은 동시적으로 일상계를 탈출해 하늘 위로 '날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독스를 우리는 장승희 식의 과감한 역설법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녀의 역설은 동일의 모티브가 현실계를 반복 지시함으로써, 작가 스스로가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게끔 하는 종류의 것이다. 이러한 역설이 과감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작가 스스로 모티브의 반복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알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작가란 생리적으로 모험을 좋아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탐험가들이다. 그들에게 하나의 시도가 성공적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부차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들의 탐험은 그 자체로써 목적을 지니며 유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승희_an evening glow_한지에 스톤파우더_100×100cm_2014
장승희_a morning glow_한지에 스톤파우더_100×100cm_2014
장승희_red skyⅠ_한지에 스톤파우더_60.6×72.7cm_2014

한편, 앞에 언급한 청바지의 비상(飛上)은 반복적 일상의 막다른 길목에서 일어난 기적의 '탈출'과도 같아 보인다. 왜냐하면 푸른 색 청바지는 불현듯 수직상승해 하늘에 '안착해' 있기 때문이며, 거기 있는 구름과 결합되었다. 그러나 실생활계 청바지의 비상과 구름의 만남이란 사건에 대해 작가는 별반 단서를 주지 않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생략법이다. 이러한 '생략'은 일어난 사건에 대해, 특히 작가의 심경에 대해 궁금증을 증폭시키며, 작가들의 침묵은 종종 수다스런 '말'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곤 한다. 사실 역대 위대한 중국화가들 중 일부는 거대한 축약법을 개발하였고, 그것은 적게 보여줌으로써 최대한의 것을 담아내는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 11세기 중국 송대 목계나 (형)옥관이 그린 선화(禪畵)를 떠올려보자. 비할 데 없는 효율성, 빠름으로 대변되는 이러한 축약법은 동양화에선 지속적인 시적 감흥을 일으키는 '특약'이기도 했다. 작가 장승희의 생략법은 분명 전통화의 것과는 같지 않다. 그것은 '몽상의 기술'이라는 또 다른 방식의 회화적 축약술(상이한 것들의 접합이 즉각적이고, 그러한 접합의 이유를 수다스럽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현실 너머로의 탈출을 꿈꾼다는 의미에선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장승희 그림의 구름 위에 자리 잡은 '푸른 청바지'가 현실로부터의 극적인 탈출을 천진난만하게도 기념하는 듯 보이지는 않는가? 동양화 전통 속에서 중국 전국시대 위대한 시인 굴원(屈原)은 그의 신비한 시문을 통해 이러한 종류의 탈출과 비행을 예시하기도 하였다. ● (...) 석림(石林)은 어디에 있다는 것이며, 말할 줄 아는 짐승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 규룡(虯龍)은 어디에 살고 있어서, 곰을 지고 노니는 것일까? 수이무기는 머리가 아홉인데, 그 빠른 동물은 어디에 있는가? 불사(不死)의 땅은 어디에 있으며, 거인은 어디를 지키고 있을까? (...) (굴원의 "천문 天門" 중)

장승희_red skyⅡ_한지에 스톤파우더_60.6×72.7cm_2014
장승희_in the eveningⅠ_한지에 스톤파우더_45.5×53cm_2014
장승희_in the eveningⅡ_한지에 스톤파우더_45.5×53cm_2014

한자의 비상(飛上)은 '날다'와 함께 '튀다', '뛰어넘다', '빠르다'의 의미를 또한 지닌다. 장승희 작업이 가지고 있는 여행의 모티브들은 '장소성'을 벗어나 추상화 되어있다. 작업에 등장하는 모티브들은 그것이 실제로 속한 장소에 대해 매우 피상적인 단서만을 제공한다. '비(非)-장소(non site)'에 대한 관심은 중국의 원대 예찬(倪瓚)을 위시하여 동양화 전통에선 낯설지 않으며, 그녀의 여행 또한 실공간적 여행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매우 먼 곳으로, 지상의 그 어떤 초고속 매체보다도 훨씬 빨리 그녀를 데려다 줄 수 있는 초강력 엔진을 장착한, 심적 여행을 지시한다. 마음(mind)에 의거한 즉각적 이동은 거대한 점프를 통하거나 극히 압축된 공간 속에서나 가능한 것으로써, 이때 공간은 본질적으로는 탈공간적 성격을 갖는다. 그 여행은 물리적 신체들이 지닌 무거움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뤄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여기서 작가 스스로가 몰두한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의 문제가 대두된다. 삶에의 두려움과 그것의 무게를 과연 그녀의 나이에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만약 신비술이 존재한다면, 그녀는 그 기술을 작동시켜 앞의 것들을 기적과도 같이 날려버리고 싶은 것 같다. 장승희의 몽상은 사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의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불가능'을 꿈꾸는 어른-아이의 간절한 기원과도 같아 보인다. 반복적 등장과 함께 화면을 꽉 채운 청바지들은 그러한 불가능을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발로는 아닐까. ● 장승희는 무거움을 지닌 것들과 싸우고 있는 중이며, 그것을 덜어내기 위한 여행은 이제 시작이다. 따라서 장승희의 비상이 무엇을 가져올지는 시간을 두고서 지켜볼 일이다. ■ 김예경

Vol.20141203h | 장승희展 / JANGSEUNGHEE / 張丞希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