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속 풍경

정복수 바닥화 PROCESS & DOCUMENTATION   지은이_김진하

지은이_김진하 || 판형_4×6배판 || 페이지_80쪽 || 발행일_2014년 12월 10일 글/기획_김진하 || 사진_김진하(사진제공: 조문호, 정연신, 한상진) || 디자인_나무아트 인쇄_아트 프린팅 || ISBN_978-89-966435-6-2 97650 || CIP_653.11-KDC5 / 759.9519-DDC21 / CIP2014034764 ||가격_10,000원 || 출판사_도서출판 나무아트

도서출판 나무아트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뼈 속 풍경, 진심의 공간"정복수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동물입니다."- 정복수 작년 초가을쯤 나무화랑을 방문한 정복수 형에게 다짜고짜 전시하자는 말을 건넸다. 몇 년 전부터 그의 전시를 열고 싶었으나 늘 개인전 스케줄을 끼고 바쁘게 작업하던 작가라, 몇 번인가 전시를 제안하려다가 그만두곤 했었다.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낸 것은 내가 주저하면 그의 전시를 못할 것 같아서였다. 또 복수형이 2011년 사비나미술관에서 대형 개인전을 하고 어느 정도 재충전이 되었으리라 여기고 한 말이기도 했다. "형, 당분간 개인전 스케줄이 없으면 여기에서 전시 한 번 합시다. 기존 제도권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그러나 형이 꼭 하고 싶은 주제나 전시형식이면 좋겠소." 나의 이 말에 복수형은 예의 느린 말투로 생각을 좀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방문한 형은 어떤 전시가 좋겠냐고 필자에게 물었고, 실험적이고 강한 내용의 탈 상업적인 전시가 좋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79년과 83년에 복수형만이 했던 바닥화를 작업과정과 결과까지 현장 공개하며 진행하는 전시, 그리고 관객들과의 직접적 만남에서 우연히 발생하는 해프닝까지 복합적으로 얽힌 새로운 형태로 풀어보자고 제안했다. ● 바닥화는 미술사에서도 유래가 없는 정복수 고유의 회화방식이다.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이나 이브 클라인의 이벤트와는 전혀 다른 지점에 있는, 전혀 다른 개념의, 정복수만의 작업 내용을 담보하는 독자적 형식이다. 또한 이 바닥화는 천정화나 벽화와 대립된 것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정화처럼 신의 세계를 그린 그림에 비해, 정복수는 살아있는 인간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 바닥화란 장르를 시도한 것이었다. 그곳은 절대적 관념인 신에 대한 이데아나 숭고 등에 대비되는 몸과 욕망과 같은 인간 삶에 대한 토로의 장이다. 관객들이 밟고 다님으로써 스스로 온몸으로 체감하며 그림의 아우라를 제거하는 수평적인 소통 현장이기도 하다. ● 그런 바닥화를 2014년의 정복수는 1979년에 비해서 어떻게 다른 내용과 감정과 회화문법으로 해석해 내는지를 비교해서 드러내게끔 하는 것이 애초 기획자의 포석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뼈 속 풍경 - 정복수의 회화 Process & Documentation』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렇지만 작가에겐 대단히 부담스러운 프로젝트이고, 만약에라도 좋은 결과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작가나 기획자에게 치명적인 오점이 될 수도 있는 기획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복수형은 더 적극적이었다. 바닥화뿐 아니라 벽면까지 전체 공간을 동시에 작업하겠다는 거였다. 조그만 화랑 운영사정과 일정상 가을 황금시즌을 3주 이상은 투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바닥면적 실평 20평과, 벽면 40평 등 대략 60평 정도의 공간을 회화작업으로 채운다는 건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려는 것보다 어려운 것 아닌가. 물론 이 전시가 보통의 캔버스회화처럼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작업 프로세스의 공개를 통한 관객들과의 교감과 공감의 과정을 통해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과 소통방식을 타진하는 것이라 통상적인 완성의 부담에서 벗어난 것이긴 해도, 작가가 받는 스트레스나 중압감은 만만찮은 것이다. 그럼에도 복수형은 자기 스스로에게 도전을 하고 싶어 했다. 힘든 프로젝트이지만 작가에게 이런 기회나 경험은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복수형은 그야말로 뼈 속 깊숙이 새겼던 화가로서의 의지를 이번 기회에 스스로에게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였다. 스스로 기획한 프로젝트 욕심에 작가의 능동적인 저돌성까지 얻었으니 기획자는 이후 금상첨화의 맘으로 전시진행을 하게 된 것이었다. ● 복수형은 기민했고 빈틈이 없었다. 올 1월에 '뼈 속 풍경'이란 전시 타이틀과 전체 작업 개념과 바닥화 및 회화의 에스키스를 보내왔다. 그 에스키스를 보는 순간 난 이 전시가 성공적이 되리란 것을 직감했다. 25년을 전시기획만 해온 경험에서 나오는 직관이었다. 곧바로 기획안을 짜기 시작하면서 여러가지의 면을 살폈다. 공간이야 기획자가 늘 활용하던 익숙한 곳이라 부담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8월에 1주일간 리허설 및 밑그림 작업을 하기로 하고, 10월 3주간 전시기간을 확정했다. 이런 형태의 공개작업에 전시공간 전체를 타블로로 쓰면서 3주 만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형상성을 어느 정도 채울 사람은 정복수란 작가와 그의 작업스타일이라 가능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준비과정에서 철두철미한 복수형의 작가적 태도에 전적으로 신뢰를 하고나자,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없어졌다. 그의 회화적 기량과, 성실도와, 이번 프로젝트에 임하는 진지한 눈빛에서 기획자는 조력자의 역할만 하면 될 만큼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만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이 프로젝트는 진행되었다. 이런 경우 기획자는 행복하다. 작가와 트러블이 없는 신뢰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연락을 주고받으며 8월을 맞고, 일주간의 밑그림 작업을 하고, 10월의 본 전시를 맞게 되었다. ● 전시 말미에 작가는 이 전시가 자신에겐 힐링의 과정이라고 말했다(다수의 관객과 모 저명한 비평가도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다). 외딴 시골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에만 전념한지 수 십 년, 사람들과의 왕래와 교류가 없는 고립된 상태에서 거의 자폐적 증상까지 느끼는 시기에 이 프로젝트와 그림을 통해서 비평가들, 동료작가들, 그리고 일반관객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대화하면서 스스로를 치유했다는 것이었다. 작가가 작업으로 자신을 치유한다는 것, 위대한 경험 아닌가. 진실하게 작업했기에 가능한 거다. 관객들의 호응 뿐 아니라 작가의 이런 마음에 기획자의 보람은 더 커진다. 이 전시는 작가나 기획자에겐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전시준비와 전시기간중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기록들을 토대로 이 자료집을 보고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뼈 속 풍경 – 진심"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감동을 주지 않는다. 석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상실토록 해주기 때문이다" - 앙토냉 아르토 작품 어느 구석엔가 정복수는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골수로 그려야 그림이 됩니다", 라고. 골수(骨髓). 인체의 가장 단단한 곳, 뼈 한가운데에서 역설적으로 부드러운 물질. 근육과 살 안쪽에 있는 견고한 뼈의 가장 내부이자, 척추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몸의 중심이기도 하다. 그런 골수로 그린다는 건 그 골수가 안료와 같은 물질의 의미가 아니라 작가의 정신이나 작업에 임하는 태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정수를 드러내려는 작가적 의지다. ● 그러면 그런 골수로 그리는 정복수의 뼈 속 풍경은 과연 어떨까. 이번 전시 타이틀이 뼈 속 풍경이니 '골수'로 '골수 풍경'을 그린다는 것 아닌가. 형용모순의 이 말은 작가 정복수의 작업에 대한 의지에 다름 아니며, 한편으로는 그만큼 내밀한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표현해내겠다는 출사표라 하겠다. 그 정직하게 드러내는 내면이 바로 정복수가 그의 이름을 걸고 우리들과 대면하는 이곳 작업공간인 전시장의 풍경이기도 하다. ● 전시장을 가득 채운 그림엔 대상이 없다. 소재인 인체는 넘치도록 많이 등장하지만 그가 실제로 보면서 묘사하는 인체는 없다는 뜻이다. 형태나 구조의 재현에 의한 서구적 인체 그리기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해부학적 분석도 없고 사실적인 비례나 색채도 없다. 이 말은 정복수에게 있어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그가 그리고 탐구하고 진술해야 할 주제이자 세계이지 묘사해야 할 소재가 아니란 거다. 그의 그림엔 사람에 대한 그의 관념과 지향성·진술·통찰 등이 형상화되어있을 뿐이다. 그는 인체를 모델링 없이 상상으로 그린다. 특정한 모델을 두고 그와 닮게 그리면 그 대상의 특징이나 개인사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정복수는 이런 개별성을 무화시키는 익명적 방식으로 숱한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동작이나 행동, 신체기관과 표정만을 드러낼 뿐, 누구이거나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게 된다. 개별적인 형상은 모두 보편적인 인간일반으로서의 욕망과 생리와 생태를 반영하는 하나의 전형, 혹은 상징소(素)일 뿐이다. 따라서 그가 이르고자 하는 주제에는 인체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내면과 몸에서 자동적으로 뱉어져 나오는 지금의 표현성과 형상성이 더 적절한 것이다. ● 그의 뼈 속, 그러니까 그의 무의식적 내면엔 욕망하는 사람들의 삶과 본능과 생리에 관한 무한한 이야깃거리와 이미지와 우주가 있다. 그런 세계를 그리면서 정복수는 언어나 제도, 구조에 의해 선험적으로 규정된 인간일반에 대한 보편적 인식으로부터 본능적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복수의 체험적 진실성으로 온존하게 자유롭고 해방된 세계를 지향한다. 그러나 관습화된 사회적 관념에 대한 도발과 저항은 가파르고 위험하다. 특히나 금기를 넘는 표현일 땐 일반 관객들의 낯섦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반작용은 더 크다. 사회적 통념에 거역한다는 게 그만큼 고독하고 힘든 일일진대, 그것을 조형으로 증명해야 하는 미술은 참으로 지난하면서도 힘든 소외와 소통의 협소함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적 서사를 발언하는 이 작업과정은 정직해야 한다. 머리로, 손으로, 혹은 논리나 기교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세계에 대해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감각과 통찰을 신체의 반응으로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복수는 그의 말대로 "그림으로 통곡하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그는 "몸부림치면서" 그릴 수밖에 없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화가가 아니"라 "그림과 싸우는 사람이 화가"이므로 그런 통념화 된 인식들과도 싸우고 있는 게 정확하다고 하겠다. 지난 40년을 정복수는 그렇게 그림으로 버텨왔다. 그 작업관과 뚝심으로 인해 그림 이전에 이미 한 인간으로서도 그는 크게 보인다. ● 이런 정복수의 작가관은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일까. 그에게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집요한 삶(작가)의 태도는 그의 인생 궤적이 어떠했기에 그의 의식/무의식에 이런 철저함으로 새겨진 것일까. 오로지 그림 '노동'에 복무하면서도 그가 정신적·육체적·경제적 한계와 스트레스를 버텨낸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의 작가로서의 바탕을 이루는 정서와 세계관은 그가 살아온 삶과 그 삶에 대한 반성적 사유로 구축되었을 터, 그 곳이 궁금해진다. 그러나 그곳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해설이나 설명이 아닌 오로지 그가 토하고 뱉어놓은 그의 그림을 통해서 감지해야만 한다. 육감과 인식의 문을 모두 열어놓고 그의 그림 속 투명한 사람들처럼 작품의 내부를 해부해내야 한다. 그의 뼈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온갖 이미저리를, 그 삶의 발아과정도 체감해내야 하고…. 정복수 그림에서의 숱한 인체형상과 표현들, 그 틈 사이에서 삐져나오는 생생한 자상(刺傷)과 선홍색 체험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진실성이 바로 삶의 아름다움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는 시각이미지 배면에 그가 살아낸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서사적 유추와 상상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삶 - 그림의 중심"우리가 '삶'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이는 사실의 표면을 통해 아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연약하며 불안정한 중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 앙토냉 아르토 삶은 삶을 영위하는 주체의 독자적 체험과 그로인한 내면(심리, 의식, 무의식, 욕망, 의지…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합리적 이성으로만은 인식하기 어렵듯이, 회화도 작가에게 일어나는 온갖 현상들이 상호 전치되고 혼성됨으로 간단하게 질서화 시킬 수 없다. 모순과 갈등, 거기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괴로움 등이 예측할 수 없는 즉발성과 비정형으로 형해화되어 혼돈스럽게 구성되는 것이니까. 중심을 법칙이나 공식처럼 모듈화 할 수 없다는 거, 그리고 그 내연을 제대로 깨달을 수조차 없다는 건 인간에게는 치명적 약점이다. 그래서 불안정함은 만물의 척도라고 자부하는 인간이 스스로 장악할 수 없는, 자기 내면과 세계와의 어긋난 경험들로부터 비롯된 '원형 archetype'인 것이다.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키며 제공되는 '평형수 平衡水'가 없는 우리 삶의 중심은 그래서 불안정하다. ●시각이미지 배후에 잠재되어 있는 작가의 체취와 촉각과 무의식을 담지하는 회화도 삶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고 명료하게 인지되지 않기에 불안정하다. 정복수의 그림은 대상의 형태와 표면을 취한 구상의 영역이라도 작업의도가 대상성 너머의 주제를 지향하기에 해석학적 접근을 요하는 형상성*의 영역에 있다. 따라서 보편적 개념화의 안정된 체계로부터 이탈한 이 작업에서 주제를 수용하는 과정은 균형이 와해되고 혼돈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작품에 대한 관객마다의 주관적 접근과 해석이 불러일으키는 '소통불일치 Aporia'의 진폭이 작품의 중심으로의 진입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회화의 시각성, 물질성, 촉각성 등의 감각적 단위요소들은 명료한 지시언어가 아니기에 그런 현상은 더 커진다. 그러나 우리가 그 지점으로 몸과 마음을 열고 다가갈 때 비로소 작가의 체험적 진실과 표현과 나와의 통일이 아름답게 이루어진다. ● 정복수의 그림은 그만의 삶으로부터 출발해서 한국현대미술이라는 전문적 영역과 교직되며 진행되어왔다. 지난 40여 년간 인간이라는 일관된 소재와 거기에 반응하는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며 삶과 존재에 대해 토로해 왔다. 인간의 본능이 어떻고, 원시적 생명성이 저렇고 하는 단순한 차원은 아니었다. 과거 그가 조우했던 구체적 사건이 있었을 테고, 그 사건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원형적 이미저리가 그의 내면에서 어떤 거대한 울림으로 구축되었을 것이고(나는 이를 정복수의 내면적 서사라 여긴다), 그 원형이 반복·증식·일탈·환골·탈태·변주되며 오늘에 이른 것일 테다. ● 문제는 앞서 거론했듯이 그의 그림에서 문자언어로는 추출하기 어려운, 그 주제와 형식의 난해함이다. 상황설정의 생략, 서술적 설명 배제, 시공간적 배경의 모호함, 서정성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이탈한 중성적 화면구조 등은 그의 그림의 중심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다. 위에서 인용한 바, '사실의 표면'과 '형태'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시적 언어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식 불가능한(그래서 모호하고 불안정한) '중심'의 영역인 시각적 상징에서 그런 문학성에 기댄 서술적 주제를 도출해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언어체계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작가가 선택한 매체가 그림이었을 터인데, 그것을 언어적 서술성으로 읽으려는 것은 어쩌면 동굴의 우상처럼 중심보다는 표면(어둠)과 형태(실루엣)만 보는 우를 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말이 아닌 그림으로 살기 위해서 그는 그 과정을 어렵게 겪어왔다. '골수'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래야만 진짜 그림이 나온다고 그는 믿는다. 인간과 삶의 불안정한 중심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내면과 인간이라는 존재와의 불화에 끊임없이 기름을 뿌리면서 침을 뱉고, 싸우고, 소리치고, 토하고, 배설하고, 되새김질 하고, 회의하고 있는 것이다. '뼈속 풍경'은 세상살이에 대한 그의 무의식, 욕망, 본능이 응결된 지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증명하려는 화가로서의 미술형식에 대한 의지이기도, 또 그가 생각하는 미술에 대한 개념적 접근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복수의 그림에서는 인간의 이성 체계에 대해 대응하는 욕망이라는 상대적 지점만 보이는 게 아니라, 그의 원형적 체험에 대해서 그 스스로가 얼마나 깊은 성찰을 동반했는지가,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그가 그려왔고 지향하는 회화에 대한 열린 매체개념이 동시에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이번의 바닥화는 정복수의 그림이전에서부터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서 발화되는 그런 회화의 중심을 관객들이 직접 눈과 몸으로 부딪히며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고, 동시에 그 그림의 뼈 속 풍경인 그의 이력이 여기저기서 꾸밈이나 연출 없이 평평하게 묻어난 작업이었다.

바닥-삶의 투명한 터"나를 견딜수 있게 하는 사랑이 나의 그림을 만들었습니다." - 정복수 편안하다. 누워있다는 건 불안정을 제거하는 거다. 정복수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핥고·먹고·뱉고·상호 다른 기관들이 간단없이 연결되어 있고·다시 그것을 통해서 발기하고·사정하고·배설하고·여러 토막으로 잘린 육체·마구잡이로 긴 혀·서로 다른 내장기관들의 연결과 재배치 등으로, 여전히 과거 작업처럼 동물적·폭력적·성적 혐오감을 보여주고 있다. 합리성와 윤리로 폭력과 야만을 가린 위선에 대한 비판적 조롱과, 본인을 위시한 모든 인간들 또한 거기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사실을 통해 강력한 공격성을 드러내던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번 바닥화에서 그런 요소들의 제시가 불러일으키는 건 오히려 리얼하고도 투명한 존재에의 갈구같은 겸허함이다. 가장 낮은 바닥에서, 거기에 부재한 것에 대한 작가의 기원인지는 몰라도 형태와 색채의 향연, 혹은 그런 육체들의 주술적 카니발 같은 신명과 해방감이 느껴진다. 직접적인 형상을 배반하는 이 콘텍스트에서 이전의 작업들과는 다른 작가의 또다른 냄새가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습관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여전히 마초적일수 밖에 없는 이 형상들에서 뜻밖에도 발생하는 전도된 "싱싱함과 즐거움"(다수 관객들의 감상평)이 보인다. 공개되고 열린 작업과정에서 작가 본인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가 바라던 세계에 대한 기대가 발현되거나 반영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 아무튼 정복수의 어떤 미묘한 감성의 변화가 중력에 몸을 맡긴 채 누워서 입체감을 버린 평평한 포즈들로 얽히고설키면서 그 조형을 밝게 이끈 것이다. 거기에 작가의 그리기 유희가 더해져서 활발한데도 경건하고, 발랄하되 영성靈聖적 신비스러움이 중첩된 다층적 분위기를 이끌어낸 것이다. 작가의 인간에 대한 새로운 대면기가 기록된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왜곡된 육체의 형태와 배치 스타일은 여전하지만, '야수'로부터 따뜻하게 '생각하는 짐승'으로 진화된 듯한 뉘앙스가 두드러진다. 낮은 곳에서의 배려심과 같은 섬세한 디테일을 토로하는 탈 거대서사방식,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미시적 '내면서사'라고 할수도 있는 성격으로 말이다. 작가의 이 긍휼함은 어쩌면 관객들의 얼굴을 직접 마주해야 하는 공개작업에서 오는 부담감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스스로를 이완시킴으로서 한 호흡 뒤에서라야 볼 수 있는, 릴랙스형 어법으로 회화적 공격성을 더 강화시킬 수 있는 단서를 찾은 건지도 모르겠다. ● 관객으로서 실제 현장에서 그림을 밟고 있는 발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촉감은 예술에 대한 무례의 낯섦에서 점차적으로 안정과 편안함으로 이행한다. 그러다가 바닥에 앉으면 내 방처럼 친근하고, 누우면 아예 허공에 뜬 기분이다. 전시장과 특정작가의 그림을 밟고 서 있는 사람이 사적으로 점유하는 이 공간적 떼페이즈망의 특별함이란, 평생을 통해서 단 한번밖엔 겪지 못할 독특한 경험이 아닌가. 그곳에서 관객들은 작가의 전유물이었던 회화적 프로세스를 눈이 아닌 가장 넓은 면적의 피부로 마찰하며 숨쉬기로 교감한다. 뿐인가, 관람자 스스로가 놀고, 작가에게 묻고 대답하며, 함께 술을 마시고, 웃으며 즉흥 퍼포먼스도 벌인다. 관객들은 작가의 뼈 속을 들여다보고, 작가는 자신의 골수로 그가 본 관객들의 세계를 회화로 갈무리한다. 선/악, 정의/불의, 질서/혼돈, 이성/감성, 시是/비非 등의 경계를 넘어서는 감각과 인식의 자유만이 있다. 위화된 세계와의 관계로부터 그것을 부드럽게 뒤집는 만남의 현장, 그러면서도 여전한 공격성의 혼재. 거기가 정복수의 현재 뼈 속 풍경인 것 같다. ● '나'와 '타인'의 살, 기능과 구조가 단순화된 내장기관, 그리고 신경계 등이 서로 어긋나고 엉뚱하게 결합되며 화면을 주/객체, 그리고 중심을 소거시킨 분별의 필요가 없는 하나의 우주로 만들어 놓았다. 생각과 판단 이전에 이미 대립적 요소들을 거세한 하나의 소우주. 그림으로 꿈꾸는 세상은 이처럼 현실의 위계를 전복시킨다. 제약이나 틀이 없는 그 곳에서 자유롭게 얽히거나 풀어헤쳐진 온갖 인간사가, 그 자체가 욕망으로 결정화된 몸으로 드러나면서 말이다. 사실 우리는 자유로운 욕망 이전에 정해진 사회적 틀에 우리들의 몸을 맞추어 살아왔다. 정복수의 그림은 그런 제도화된 몸과, 그런 몸에 대해 고착된 인식체계에 대한 거부이자 일탈이다. 언어에 의해 몸의 욕망을 규정한 논리적 체계성과 도그마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다만, 그는 이제 화가의 눈이 아닌 사람의 마음으로 그 형상들의 리얼리티를 구하고 있는 것 같다. ● 쪼그리고 앉아서, 혹은 엎드려서 바로 자신의 신체가 가장 낮은 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흔쾌히 수용할 정도로 그는 그림에 편안하게 "미쳐"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편안함은 그림을 그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노동의 힘듦에서 기인한 것이다. 35년 전 바닥화에 등장했던 사람들처럼 추락하는 듯 머리카락을 갈기처럼 세우고 야수와 같은 공격성으로 그리되, 그 과정은 자신을 다독거리며 삶의 불안정한 중심을 민머리 수행자처럼 온전하게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서 포착된 것은 그의 그림에서의 공격성이 바로 자신의 그림을 밟고 있는 타자에 대한 통교의 갈구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거기엔 외부로부터의 공고화된 질서나 체계로부터 자유로운 원초적 만남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그게 미술을 통해 사람간에 자연스럽게 발아하는 투명한 생명현상으로 여기는 듯하다. ● 이번 전시엔 저간의 선입관이 작용할 수 있는 공격적 요소는 최소한으로 줄었다. 그림을 보러 온 관객과의 대화를 향한 접대의 마음이 우선한다. 예의다. 작가자신이기도, 관객이기도, 여타 전시장 바깥 도로를 활보하는 사람들이기도 한 익명의 대머리로 주체(작가)/타자(관객)의 이분법적 구별을 넘어서는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이름의 소멸은 언어(인식)가 아닌 진솔함으로 사람을 맞이하면서 나와 너가 수평적으로 대등함을 의미한다. 진정한 소통은 사회적 위치나 지위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 마주한 사람의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니까.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작업과정을 공개하는 건 그만큼 투명하게 타자에게로 향하는 마음의 반증이다. 한 인간으로서든 작가로서든 그의 진심이 바탕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삶에 대한 그 평범한 정복수의 '진심'이 이번 전시 작업의 화두이자 핵심이라 하겠다.

뼈 속으로부터 토해내야만 하는 이유"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는 안된다. 화가가 내려와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림이 무엇인지 다시 출발해야 한다. 더러운 그림들이 사라져야 한다. 그림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것이 그림이다, 라고 외치는 그림이 나타나야 한다." - 정복수 지금 이 시대에 페인팅을 하고 있는 화가는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라는 원론적 지점으로 돌아가 보자. 화가 Painter. 그림 그리는 사람. 진부한 용어다. 지금의 화가는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서 조형을 완벽하게 가다듬는 형식 탐구자인가, 자신에게 내재된 독자적인 세계를 그림으로 드러내려는 나레이터인가, 아니면 자신의 이념을 그림을 통해서 실현시키려는 실천가인가, 그도 아니면 그림을 통해서 밥벌이를 하는 생계형 직장인인가. 화가마다 미술에 대한 입장이 다르고 또 태도도 다르다. 그만큼 화가의 개념정의는 몇 개의 언어로 개념화나 범주화 될 수 없다. 그게 더 좋다. 다만 현대의 화가는 단순하게 감각적인 시각이미지나 시각현상만을 탐닉하는 테크닉에만 빠진 기능인이 아니란 사실만은 명확하다. 자기내부든 외부와의 관계든 간에 분명히 어떤 '세계'를 갖고 그것을 작업으로 증명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 세계의 독자성과 거기에 비례하는 형식의 창출이 화가로서의 관건이 아닌가. ● 정복수가 그의 뼈 속으로부터 무언가를 토해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의 가장 내밀한 세계를 외침으로써 마침내 자기 작업의 능동성을 확인할 수 있어서다. 은밀하고 고립된 세계일수록 세상에 드러냄을 통해서 타인과 공유하고 대화하는 단서로서의 가치가 크다. 그래서 정복수가 작업을 통해서 유지하고 있는 작가로서의 스탠스는 건강하고 싱싱한 것이다. 장식적인 꽃그림보다는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똥그림의 도발적 진실성이 현대엔 더 예술적이듯이, 정복수가 배설한 세계와 그 형식이나 어법 등은 한국현대미술에 만만찮은 연구의 단서를 제기했다. 1970년대 후반 충격적이고도 독특한 그로데스크로 화단에 파문을 던진 이후 40여 년을 줄기차게 자기만의 미술을 제시함으로써, 한국현대형상회화의 중요한 한 축으로 그의 작품들은 중요한 텍스트가 되었다. ● 작가의 이런 활동은 그의 세계와 작업에 대해서 기획이나 비평을 하라고 암묵적 요구를 한다. 그가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뼈 속에서 풍경을 꺼낸 첫 번째 이유 같다. 그는 그림에 침을 "뱉거나", 그림과 "싸우는" 사람이지만, 기획자나 비평가는 그 침의 성분, 뱉는 행위나 싸움의 이유, 사건의 전말 등을 관객에게 전지적으로 제공하는 게 업무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 곤혹스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도 기획자가 작가를 초대한 것이지만, 엄밀하게는 정복수의 그 쉼 없는 작업과정이 기획자에게 전시를 요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작품을 통해서 세상과 교유하려는 작가로서의 진정성과, 작업으로만 성공하려는 작가적 욕망이 더 큰 요인일 것이다. 그림 사이에 써놓은 "나에게 물 한잔만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 한잔이 세상에 빛이 될 것입니다. 물 한잔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란 구절은 거기에 꼭 합당한 내용이다. ●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말로만 가능한 레토릭에 지나지 않겠지만, '진정한 미술', '진짜 미술'이 있다면 정복수는 그걸 하고 싶어 할 것이다. 물론 그게 무언지에 대한 생각은 작가나 사람들마다 모두 다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작가와 그의 작업을 떠올릴 때면 그게 우리미술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부박한 상업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에 천착하며 그만큼의 독자적인 형식을 길어 올린 작가, 약간의 손재주와 세치 혀로 자신의 허명을 위해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않고 오로지 뚝심으로 작업에만 전념해온 작가, 삶과 미술에 대한 폭 넓고 깊은 사유로 우리미술의 주체적 토대에 튼실하게 기여한 작가 등…. 정복수란 작가의 작품과 궤적을 오랜 기간 지켜보면서 느낀 점은, 앞에서 언급한 예처럼 그의 결벽할 정도로 일관된 작가적 태도가 축적한 작업성과의 두께감이다. 그 두터움이 종합적으로 응결된 '뼈 속 풍경'전은 그의 다음 변화와 도전을 위한 주요한 이력이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뼈 속으로부터 이번 전시를 토해내게 만든 이유다. ● 글이 길어져서 정복수가 쓴 잠언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구절로 끝맺으려 한다. 작품은 작가의 진심어린 태도가 결정한다는, 다소 촌스런(?) 나의 미술에 대한 지론과 맞아 떨어지는 구절이기에 그렇다. 물론 정복수뿐 아니라 많은 작가들 또한 그럴 것이다. 다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의 초심을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했고, 실천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믿음을 작업을 통해 증명해주었기에 공경의 마음으로 인용해 본다. "더러운 화가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더럽게 기억될 것이라면 연기로 사라지겠습니다."김진하

Vol.20141211h | 뼈 속 풍경-정복수 바닥화 PROCESS & DOCUMENTATION / 지은이_김진하 / 도서출판 나무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