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엄치는 새

곽상원展 / KWAKSANGWON / 郭相源 / painting   2014_1211 ▶ 2015_0105 / 일요일 휴관

곽상원_만월을 외치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130.3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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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211_목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09:30am~06:3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이마주 GALLERY IMAZOO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20길 12 ANN TOWER B1 Tel. +82.2.557.1950 www.imazoo.com

스펙터클의 균열을 확대하는 표류자의 시선 ● 곽상원의 '헤엄치는 새' 전은 존재와 그것이 놓이는 맥락 간의 모순이 있다. 이 전시부제는 자연스러운 듯 하지만 볼수록 낯선 그의 풍경의 역설을 알려준다. 작품에는 새도 등장하지 않는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엄치는 새'라는 시적 제목은 낯선 곳에 던져진 실존적 존재/상황에 대한 비유이다. 작품의 배경은 도시와 그 인근이라는 건조한 지역이지만, 작품마다 송글송글 맺혀있거나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자국 때문인지 습한 기운이 있다. 물기는 먼지 풀풀 나는 곳을 쾌적하게 씻어낼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습기는 먼지와 같은 부류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서로 엉겨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서늘한 색감은 장면들의 썰렁함을 가세한다. 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떠오르게 하는 막막한 공간이지만, 그의 작품 속의 부표처럼 정확한 시공간이 제시되어 있지는 않다. 작품에는 인적이 없고, 인적이 있어도 미미하며, 인간이라는 것만 표시될 뿐인 철저한 익명성이 특징이다. ● 추상적인 큰 공간에 놓인 작은 생명이라는 설정은, 동양화나 낭만주의 풍경화만큼이나 현대 도시와 그 속에 거주하는 인간이라는 비유로 다가온다. 정처 없이 배회하는 인간의 시선이 머무는 장소는 자연 그자체도 본격적인 도심도 아니다. 말하자면 곧 중심이 되어 번영을 구가할 것이라 기대되는 주변부이다. 중심을 불완전하게 복제하는 주변은 중심을 바라보며 무한정한 대기나 유예의 상태에 있다. 그곳의 집들은 정주도 유목도 아닌 어정쩡한 유보의 상태이며, 사람들은 그곳에 완전히 뿌리내지 않는다. 잠시 머무르거나 스쳐지나갈 뿐이다. 성장이라는 목표는 이러한 과도기적인 시공간 또한 양산해 냈다. 이러한 장소들은 작가만이 발견할 수 있는 특별히 예외적인 장소가 아니라 도처에 있다. 명확한 시공간을 지우는 그의 방식은 이러한 보편성의 확보에 도움을 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토포스(Topos)로서의 특징이 있다.

곽상원_지금 여기에 잠시 기대어 신호를 외치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각 193.9×130.3cm_2014

배회라는 방식은 작품제작에도 적용되어, 그의 작품은 정확한 스케치가 없이 계속 바뀐다. 그러나 붓터치나 분위기는 일정하여, 여러 뜬금없는 장소들과 사물들과 상황들이 나름의 연결망을 이룬다. 그것은 특정한 현실이라기보다는 기억이나 상상, 어떤 정조에 의해 감축, 강화된 장면이다. 사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현대의 화가는 사진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미미한 단서에 불과하다. 아크릴로 그려진 화면은 명암법이나 원근법도 희미하다. 많은 차원을 제거하고 남은 얇은 평면은 어떤 감정적 정조로 물들어 있다. 애매한 장면들이지만, 사람이나 그 흔적이 있기에 나름의 서사가 발생한다. 작품 속 인물은 작가, 또는 관객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다. 장면은 외부의 풍경이면서도 내부의 풍경이다. 마음의 필터는 장면들을 어떤 특징과 정조로 조율한다. 30대 초반의 작가에게 특유한 경계인의 입장은 애매함과 강렬함을 연결시킨다. ● 작품 「사이의 거리만큼」은 허허벌판에 맥도날드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서있는 풍경인데, 24시간 영업하면서 차타고 오는 고객을 상대하는 그곳은 인간을 파트타임 노동자와 소비자라는 코드로 삼아 현대적 삶의 패턴을 강력하게 구조화하는 상징이다. 인간 없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는 상징성이 적막한 풍경의 쓸쓸함을 더 한다. 그것은 모두에게 다가오는 가혹한 운명이지만 각자 헤쳐 나가야 하기에 씁쓸하다. 작품 「모두가 돌아간 자리」, 「표류된 조우」, 「이름 없는 집」 등에는 인적 없는 가건물들이 등장한다. 인간들은 보이지 않지만, 그런 곳에서 펼쳐지는 삶이 망망대해에 떠있는 섬이나 배 같은 막막함일 것이라는 공통적 느낌이 깔려있다. 120호 크기의 캔버스 3개로 된 작품 「각자의 벽」은 주변인의 시선이 맞딱뜨린 거대한 벽의 이미지이다. 전면구도로 포착된 벽이 그려진 캔버스 자체가 또 하나의 벽으로 다가온다.

곽상원_모두가 돌아간 자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93.9cm_2014

실제의 화면과 환영을 일치시킬 수 있는 화가에게는 권력이 있다. 세상에서 환영의 몫이 커질수록 그들의 역할도 커질 것이다. 언어를 바꿈으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사항이 예술가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떠나 있었던 적은 없다. 수직 수평의 벽돌 선들을 뭉개고 흘러내리는 액체는 자연에는 없는 가로 세로의 직선들을 녹여 버릴듯하다. 여러 버전으로 그려진 곽상원의 벽 그림은 즉물적이면서도 표정이 있다. 인간 앞에 똑바로 서있는 모든 것들은 인간을 반영한다. 작품 「벽은 언제나」는 벽돌 외에 담쟁이덩굴 흔적이 함께 있다. 인공적이고 기하학적인 요소를 깨는 리좀적 방식이다. 낡은 벽에 내재한 시공간의 중층성은 흘러내리거나 뭉글거리는 맺힘을 통해 표현되며, 벽돌 하나하나의 공간이 또 하나의 풍경처럼 보인다. 주변인으로서 배회하는 자의 눈을 찔러온 작은 세부(푼크툼)처럼, 작가는 큰 장면 안의 세부들, 일괄적인 처리방식을 비껴가는 작은 흐름들에 주목한다. ●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장면, 가령 스포츠 경기장 같은 세트에도 인적은 없으며, 본격적인 경기가 아니라 홀로 연습하는 장면 등이 포착되곤 한다. 빈 축구 골대나 하키 장은 자유로운 여가의 장이기 보다는 인생이라는 경쟁의 무대가 주는 압박감, 즉 경쟁력 강화를 위해 홀로 있어도 자동적으로 실행되는 미시 권력이 스며 있다. 깊은 숲이나 탁 트인 바다라고 해서 쓸쓸함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도시적인 격벽이 없어서인지 메아리는 더 크게 되돌아온다. 작품 「거기에 낯선 이 있다」는 막막함 속에 던져진 인물이 하늘, 바다, 갯벌을 이루는 여러 수평적 층들의 공간 제일 아래에 있다. 서 있다기 보다는 위로부터의 중층의 무게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듯하다. 작품 「만월을 외치다」은 심연과 만월 사이의 갈대밭에 한 사람이 뭔가 외친다. 뭉크의 「외침」처럼 풍경의 전요소가 소리의 파장을 전달한다. 숲, 또는 산 모양으로 출렁이는 실루엣은 외침의 강도를 알려준다. 존재는 작지만 울림은 크다.

곽상원_사이의 거리만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93.9cm_2014

작품 「지금 여기에 잠시 기대어 신호를 보내다」 역시 표현주의 풍으로 기괴하게 변모한 나무의 역동적인 실루엣이 어딘가에 신호를 보내는 이의 절박한 마음을 공(共)감각적으로 전달한다. 한 인물의 다양한 모습, 상황일 수도 있는 여러 장면은 도처에 편재하는 유령 같은 존재를 예시한다. 작은 캔버스에 하나하나 담겨진 사물들은 인간이 없는 가운데 인간을 말한다. 맨홀 뚜껑을 그린 작품 「숨」에는 위압적인 사각형 한가운데 수상한 구멍이 탈주로처럼 뚫려있다. 작가는 빡빡한 공간을 느슨하게 할 수 있는 빈틈을 주시한다. 그곳이 빠져나가기에 너무 좁다면 주체가 변형되어야 할 것이라는 카프카적인(Kafkaesque) 교훈에 따르면서 말이다. 작품 「잠든 부표」에서 일종의 신호체계인 부표는 짝패처럼 수면 위와 아래를 동시에 점한다. 지금 여기의 명확한 좌표축을 설정하는 기능이 아니라, 실제와 환상이 동등한 몫을 가진 모호한 모습이다. 또는 바깥을 가리키지 않고 스스로만을 지시할 뿐인, 그래서 결국은 지도나 지표의 기능을 상실하는 자기 참조적 문화를 반영한다. 이러한 동일자의 문화는 타자를 배제한다. ● 작품 「바람 안에 내가 있다면」는 바위와 식물이라는 일견 자연의 대상인 듯하지만, 조경용으로 사용하는 다듬어진 돌과 시늉으로만 박혀있는 식물이 인위적이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반응하는 그것들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생명임을 암시한다. 돌과 식물은 도시와 인간처럼 보이며, 양자는 그곳에 붙박여 있지만 전체는 언제나 가변적일 수 있다. 사막 같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뿌리를 내리지 않고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주변의 수분을 흡수하며 사는 식물을 닮은 그것들은 현대도시라는 거대한 사막에서 뿌리내리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채 근근이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비유이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친숙한 곽상원의 풍경은 그가 작품 소재를 멀리서 찾지 않는 다는 점과 관련된다. 그의 작업실이 있는 신도시에서 풍경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구도심과 달리, 널찍널찍하게 뚫려있는 길은 인도라기보다는 자동차 도로이며, 머물기 보다는 통과하기 위한 장소이고, 접촉하고 대화하기 보다는 투명 인간처럼 서로를 스쳐 지나며, 서로가 아닌 각자 다른 무엇과 소통하는 그런 장소 말이다.

곽상원_이름없는 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93.9cm_2014

신도시에 전형적인 그러한 장소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 곳곳에 정체된 곳을 담겨두어 황량함에 황폐함까지 가세하곤 한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도시와 달리, 철저하게 현대의 생산/소비 시스템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조화된 그런 새로운 종류의 도시에서, 자발적 타발적으로 어디에도 속하기 힘든 자의 시선은 쓸쓸할 수밖에 없다. 그 체계가 강압적으로 또는 유혹적으로 재현하는 거대한 주기 속에 합류하지 않으면 그는 투명 인간이나 유령이 되는데, 이는 '자유직업'군에 속하는 현대의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시선이다. 주변에 맞닥뜨리는 상황을 솔직하게 표현해온 곽상원은 활달해 보이는 젊은 작가였지만, 작업에 솔직한 한 우울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많은 작품에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자국은 멜랑콜리를 표현하는 고전적인 방식이다. 개인에게 솔직했기에 우리 사회의 현재 상황 또한 투명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 자연에 거슬러 인간을 중심에 놓는 도시에는 인간이 없고, 인간이 없는 주변부는 중심이 되기 위해 과도기적인 상태로 방치된 장소에서 대량생산과 소비라는 현대적 삶의 주기에 포함되지 않는 이는 국외자로 자기가 속한 세계를 거리감을 두고 본다. 거리감이 얼마나 멀던지, 지난 8월에 있었던 전시의 작가노트에서 '가상의 망원경'까지 언급한다. 곽상원의 작품에서 빠른 통과를 위해 고안된(또는 고안될) 격자형 도시는 직접적으로, 또는 은유적으로 나타나는데, 벽을 표현한 작품이 대표적이다. 자연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수직 수평의 계열들, 즉 인공적 구조는 미리 규정된 목적과 관계된다. 그러나 그 목적에 대해 모든 구성원들이 동조하지도 동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경계를 가로지르며 흘러내리는 물감자국은 그러한 인공적 구조에 가해진 어떤 힘을 알려준다. 그것은 시간, 즉 자연의 힘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자연의 힘에 동조하는 작가의 의지이기도 하다.

곽상원_각자의 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각 193.9×130.3cm_2014

수직수평의 그리드 구조와 대조되는 담쟁이덩굴들의 복잡한 선들은 하나의 지배적 규칙을 상대화한다. 건축이라는 인위적인 구조 위에 자리 잡은 뿌리줄기는 자연적인 생장의 선을 강조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은유로서의 건축-언어, 수, 화폐」에서 나무와 뿌리줄기를 대조하는 들뢰즈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자연생장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그것은 한 사회가 뿜어내는 무정부적인 힘을 말하는 것으로, 사회의 지배적 규칙은 이를 억제하려한다. 고진은 한 건축가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수많은 세월에 걸쳐 출현해온 도시, 즉 자연도시와 디자이너들과 기획자들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창조된 도시, 즉 인공도시를 대조한다. 그에 따르면 자연도시가 반(半)격자 형태로 조직되는 반면에, 인공도시는 나무의 형태로 조직된다. 나무와 반 격자는 둘 다 다양한 작은 체계들이 복잡한 큰 체계를 형성하기 위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개념화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인공도시에서는 반 격자 구조에서와 같은 겹침이 존재하지 않는다. ● 어떠한 겹침도 일어나지 않는 나무구조는 하나의 복잡한 실재를 여러 단위들로 나누어주는 단순하고 분명한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반면 반격자는 더 복잡하고 미묘한 구조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은유로서의 건축-언어, 수, 화폐」에 의하면, 인공도시에서는 나무원칙이 너무나 지배적이어서 전체를 나타내는 상위단위에 의해 매개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단일요소도 다른 요소와 연결될 수 없다. 연결망이 나무와 같은 구조되어있는 군이나 관료조직에서는 횡단적 교섭이 허락되지 않는다. 도시건 사회조직이건 간에 너무 엄격하게 나무구조를 따르면 황폐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벽을 이루는 수직수평의 선들은 나무구조에 가까우며, 담쟁이 덩굴같은 뿌리줄기들은 반격자형 구조와 비교될 수 있다. 자연스러운 그물망과 달리,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수직수평의 선들을 녹여냈던 곽상원의 작품은 일상의 한켠에 대한 서정적 주시라기보다는 문화비평으로 다가온다.

곽상원_표류된 조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3.9×130.3cm_2014

그의 작품은 극단적인 분리와 구획화 안팎에 있는 풍경에 내재한 위태로운 신호를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임시 가옥들은 코드화의 극단에 코드의 붕괴가 임박함을 알려준다. 구조 자체에 해체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리드 구조와 대조되는 덩굴의 방식은 초월적 중심이 아니라, 다양한 중심들의 교차를 알려준다. 획일적 도시계획에 대한 대안적인 비전처럼, 작가는 집중적인 계획보다는 자생적인 그물망을 강조하면서 차이 짓기를 가속화한다. 그는 체계 바깥의 것들을 주시한다. 체계가 내면화하지 못했던 망각된 존재들, 즉 지배적인 규칙에 포섭될 수 없었던 타자들의 존재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에게 바깥과 타자는 상황으로 나타난다. 인간으로부터 소원한 세계라는 상황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것은 생산자가 생산수단이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것에서 비롯된다. 소외를 극복하는 방식은 각자의 정치관에 따라 다를 것이다. ● 곽상원의 방식은 상황주의자들의 그것과 가깝다. 피터 마샬이 「기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에서 지적하듯이, 상황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화석화된 삶을 대신해서 행위들과 우연한 만남의 흐름인 표류와 사건들과 이미지들을 재배치하는 전용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표류의 전략은 혁명보다는 '풍요의 사회'에 더 적절한 대응방식으로 보인다. 표류의 전략은 사회에 대한 거대한 정치적 목표보다는, 일상 속에서의 변형과 창조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은 일사 분란한 의견과 행동의 통일이라는 전략을 추구하는 방식보다는 이러한 무정부주의적 방식과 더 어울린다. 우리가 사는 곳을 바라보는 곽상원의 낯선 시각은 '스펙터클의 사회'(기 드보르)를 비판하면서, 상품으로 매개되지 않는 현실을 추구하는 방식과 조응한다. 그의 시선은 '기존질서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행하는 자신에 관한 담론인 스펙터클'(기 드보르)에 균열을 내고, 그 균열 안에서 번성할 대화를 청하기 때문이다. ■ 이선영

Vol.20141212j | 곽상원展 / KWAKSANGWON / 郭相源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