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세계 Primordial World

정아롱展 / CHUNGARONG / 鄭雅瓏 / painting   2014_1210 ▶ 2014_1226 / 월요일,25일 휴관

정아롱_원초적 세계 Primordial World_캔버스에 유채_162×180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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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4_1210_수요일_05: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월요일,25일 휴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모 PROJECT SPACE MO 서울 용산구 한남동 686-25번지 Tel. 070.4222.3002 www.facebook.com/projectspace.mo projectspacemo.blogspot.com

총체를 지향하는 원초적 세계 ● 정아롱의 '원초적 세계(Primordial World)'는 최초의 인류가 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지상에서의 생존을 시작했을 법한 터가 등장한다. 주기적인 노동을 통해 경작을 하기 전까지, 채집과 사냥을 했던 이 숲은 삶만큼이나 죽음과도 가까운 원초적 세계였을 것이다. 두려움과 숭고함이 교차하는 이 깊숙한 장소가 미적 거리감을 가진 풍경으로 자리매김된 것은 한참 이후의 일이었다. 숲은 정원이나 밭과 달리, 인간적인 세계가 아니다. 롬바흐는 「살아있는 구조」에서 인간세계가 무엇을 포함하고 있건,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테시스(thesis)라 칭한 것, 즉 정립, 의도, 질서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반면에 자연세계는 지향되지 않은 순수한 출현에서, 즉 그리스인들이 퓌시스(physis)라 칭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예술 또한 숲처럼, 풍부하고 다양한 삶의 나누어지지 않은 통일성을 상징한다. 숲으로 대변되는 자연과 예술은 모두 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 화가에게 원초적 세계란 무엇보다도 모든 이미지가 시작되는 야생적 바탕으로서의 회화를 말한다. 여기에서 회화는 원초적 행위의 장이 된다. 유화로 그린 숲-그림은 지시대상인 숲과 언어적 과정인 회화가 중첩된 두 원초적 세계의 만남이다. 이전에 붓자국이 드러나지 않게 꼼꼼히 그리던 스타일은 이번 전시에서 붓 가는대로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이렇게 그려진 숲은 그자체가 여러 요소로 이루어진 소우주로, 그리기의 열락과 보기의 쾌락을 교차시킨다. 숲은 에그 템페라로도 구현되어 있다. 템페라 작품은 틀과 바탕이 일체되는 작은 벽이나 창문 같은 모습으로 소우주의 느낌을 강조한다. 이 전시에서 또 하나의 계열을 이루는 실버포인트 드로잉은 금속필기구로 세밀하게 작업한 연금술적 작품이며, 상징적인 우주를 오롯이 담아낸다. 세 가지로 구별될 수 있는 작품들은 선적/회화적, 고전적/낭만적, 르네상스/ 바로크라는 기법, 양식, 시대 등으로도 변별될 수 있는 두 가지 계열로 공존한다.

정아롱_원초적 세계 Primordial World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4

회화적인 작품은 이 전시에서 처음 시도되는 것으로, 작가 스스로 어떤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다. 자유로운 붓놀림은 더 큰 화면을 요구했고, 관객은 숲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정취가 있다. 지시대상과의 거리는 가까워져 과정으로 해소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원초적 세계」로서의 숲 안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포즈를 한 요정이나 뿔 달린 하얀 말, 나르키소스처럼 샘에 자신을 비춰보는 사람 등, 신화적 캐릭터들이 숨은 그림처럼 박혀 있기 때문이다. 작품 「숲길」에서는 사색에 빠진 현대적 인물이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 「태평세월」에서는 숲 밖으로 펼쳐진 넓은 초원저편의 버드나무와 전경의 인물들이 '원초적 세계'를 빠져나와 '태평세월'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서사적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회화적 필치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방식으로 변모한다. 8x8cm 크기의 작은 캔버스에 한그루의 나무가 화면에 꽉 차 있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작품 「태평세월」은 「원초적 세계」의 축약판이라 할만하다. ● 에그 템페라 작품인 「Landscape into Painting: Primordial World」 시리즈에서, 바탕 면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금색 테두리는 현실에서 떼어내어진 하나의 자족적 단편 같은 느낌이다. 유화로 그려진 것과 같은 숲이지만, 환영의 속성은 더욱 강하다. 그것은 현실의 연장으로 착각될 수 있는 여지가 아니라, 현실과 평행하게 존재하는 또 다른 우주로 다가온다. 풍경은 연금술적으로 변형되었다. 지금을 잘 사용하지 않는 옛 방식은 현대적 변주가 아니라, 복원된 옛 악기와 악보로 연주되는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은 낯선 느낌을 담아낸다. 작품 제목과 내용에 라틴어 경구가 있는 은으로 그린 드로잉(Silverpoint Drawing)은 작품 제목부터 재료, 방법, 도상에 이르기까지, 현대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들이 총동원되어 그것들만의 낯선 세계를 만들어 지금 여기를 되비춰주는 구조이다. 「Lunar Eclipse」 시리즈 5점은 개기월식 이라는 우주적 사건 중에 일어나는 또 다른 사건들이다.

정아롱_원초적 세계 Primordial World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4

삶에의 의지, 불가능한 도전, 운명을 건 투쟁, 그리고 마침내 '인생은 끝났지만 사랑은 끝나지 않으리'라는 라틴어구의 제목으로 마무리 되는 시리즈는 우주의 법칙과 조응하는 삶이라는 교훈을 담는다. 한 작품 안에서, 그리고 작품들 간에 존재들이 이루는 상징적 연쇄 망이 어떤 메시지를 향해 촘촘하게 짜여있다. 물론 수신자는 발신자가 심어놓은 메시지와 다르게 읽을 가능성이 있지만, 공기가 새나가지 않는 팽팽한 공이 더 멀리 어디로 튈지 모를 탄력을 가질 수 있듯이, 작품은 자족적인 우주를 이루면서 닫혀있다. 그러한 자족성은 신비와 마술의 특징이다. 그것은 예술이 근대에 들어서 단순히 예술이기 이전에—그리고 단지 예술이기만 한 예술이 비(非)예술로 바뀌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존재해왔던 오랜 방식이다. 작가는 번거로운 제작과정을 하나하나 복원시킴과 동시에, 현대에 드물어진 대가정신(meisterschaft)을 추구한다. '무엇이나 예술', '누구나 예술가'로 요약 될 수 있는 현대미술의 흐름은 세계의 탈(脫)주술화 과정을 이끌었던 계몽의 역설과 함께한다. ● 계몽은 무지와 맹목을 사라지게 했지만, 그와 더불어 신비와 성스러움을 사라지게 했다. 그것은 삶의 중요한 측면이 억압되는 것으로, 재신비화는 상품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남은 것은 반복되는 즉물적 일상이다. 현대미술 또한 이러한 일상을 또 반복한다. '새로움의 전통'으로 진행된 이러한 미술사적 과정이 싫증과 피로감을 누적시켜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회화는 이러한 반복 속에서 차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사건의 장이라는 점에서 원초적이다. 원초로 되돌아감으로서 노쇠한 역사의 갱신을 추구해온 것은 늘 상 회화였다. 근본을 묻는 현대의 작가는 또한 회화로 돌아가곤 한다. 정아롱에게 회화는 하이데거의 책 「숲길」이 암시하는 것처럼, 근원적 세계로 이끄는 수단이자 목적이 되었다. 그림 속 숲과 초원은 몇 년 전에 제주도의 자연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자연은 풍경이 되고 그림이 되었다. 템페라 작업 때 사용하는 토끼가죽 풀이나 메탈 포인트 드로잉 때 사용하는 은사는 미술보다는 마술이 떠오르는 재료로, 작품 제작의 용이함을 위해 진보되어온 현대적 매체들에 역행한다.

정아롱_Landscape into Painting: Primordial World_나무 패널에 에그 템페라_35×35cm_2014

천천히 조심스럽게 진행하는 작업과정은 작가 말대로 '그린다기 보다는 영혼을 담는' 과정이다. 수행의 단계로까지 고양되지 않는 예술은 눈과 손만 놀리면서 금 새 낡아질 '새로움'을 추구할 뿐이다. 이러한 피상적인 시도가 근본적인 새로움이 아닌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낳는 것은 당연하다. 지배적인 현대미술에 대한 작가의 거부감은 뒤늦게 합류한 한국의 얄팍한 미술 풍토에서만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정아롱의 이국적이면서도 고풍스런 취향은 외국에서 태어나 유럽과 러시아에서 전통적 미술교육을 받은 이력, 그리고 밤/낮이 바뀐 현재의 생활패턴이 반영되어 있지만, 꼭 그런 이력이나 습성이 아니더라도, 현대와 현대미술이 주는 피로감은 어떤 식으로든 극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숲-그림은 두 원초적 세계를 맞닿게 함으로서 현대를 돌파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 숲속 오솔길로의 여행은 작품 제목으로도 나오는 하이데거의 「숲길」이나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니체가 던졌던 근본적 화두와도 연결된다. ● 숲-그림은 초월적 사유를 그림이라는 장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초인(Übermenschen)'(니체)라는 예술가적 주체에게 예술은 종교나 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초월적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철학 강의;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에서 사유의 중심에 예술을 놓았던 니체를 재해석한다. 그 책 중 '예술에 대한 다섯가지 명제들'이란 소제목이 붙은 장에는, 예술론에 대한 니체의 주도적인 명제를 '예술은 창조적이고 생산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파악되어야지,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파악될 수 없다'는 대목이 인용되어 있다. 쓰는(그리는) 사람은 감성적이지만, 읽는(해석하는) 사람은 이성적이다. 수용자의 입장을 강조하다보면, 감성적인 부분은 축소된다. 감성적인 것은 비언어적이기 때문이다. 감성적인 것은 전염되는 것이지 소통되는 것이 아니다. 소통지상주의는 소통불능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작품은 없고 경험만 남아있는 현대미술'에 대해 비판하면서 '대가정신'을 회복코자하는 정아롱의 태도와 연결된다.

정아롱_Landscape into Painting: Primordial World_나무 패널에 에그 템페라_30×36cm_2014

니체는 예술은 예술가로부터 파악되어야 하고, 자연 역시 하나의 예술가라고 말했다. 니체에 의하면 삶의 본래 과제는 예술이다.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초감성적 세계를 우위에 놓는 세계관과 달리, 예술은 감성적 세계를 중시한다. 니체는 플라톤에 거슬러, 초감성/감성의 상하관계를 전도시키려 한다. 이 세계와 여기에서의 삶과 연관된 감성 또한 형이상학적 활동 영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은 '상승시키는 것,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높이는 것, 더 많은 힘', 즉 '힘에의 의지의 한 형태'(니체)로 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근간을 이루어왔던 플라톤주의를 역전시키려는 니체의 노력을 줄줄이 열거한다. 물론 그것은 형이상학의 폐기라기보다는 예술과 예술가를 중심에 놓는 또 다른 형이상학이다. 이러한 초월성은 고전주의에 대한 취향을 설명해준다. 자전적 알레고리가 담긴 2013년 금호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정지, 단순화, 생략, 집중을 표현하는 고전적인 양식'(니체)이 잘 나타나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메탈포인트 드로잉 작품에서 보이는 '최고의 힘의 감정'은 '고전적인 유형 속에 집중'(니체)되어 있다. ● 물론 여기에서 고전적인 것이란 '어떤 특정한 과거의 예술 시대에서 직접 읽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처음 그 시대의 여러 조건을 만들어 그 조건들에 스스로를 개방하고 의탁해야만 하는'(니체) 근본구조를 말한다. 정아롱 역시 니체처럼 '총체적인 예술작품'을 생각한다. 꼼꼼한 고전주의 풍 한켠에 있는 성글성글한 낭만주의 풍의 회화가 그것을 반증한다.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의 대립 뒤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대립이 숨겨져 있지는 않은가'(니체), 그리고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의 구별은 '고정화, 영원화, 존재에 대한 욕구가 창조의 원인이 되는가, 아니면 파괴, 변화, 생성에 대한 욕구가 창조의 원인이 되는가'(니체)를 구별하는 또 다른 구별과 교차 된다. 유화로 그린 회화적 작품은 숲의 신인 디오니소스적인 예술로, 니체는 그것이 '생성에 대한 욕구, 다른 것으로 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파괴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하면서, '넘쳐나는 미래를 품은 힘의 표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아롱_태평세월 Tranquil and Peaceful Times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14

이에 반해 템페라나 드로잉 작품은 '존재에 대한 욕구', '영구화에의 의지'(니체)를 표현한다. 이러한 욕구와 의지는 충만으로부터 오며, 낭만주의 예술에 내재한 '불만족과 결핍에서 비롯되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탈해 버리고자 하는 의지'(니체)와는 대조를 이룬다. 정아롱의 전시에는 명확한 외곽선을 가진 대상의 형태와 그것이 자리 잡는 공간에 대한 표현이 한켠에 있고, 대상의 표면들과 질감들이 혼연일체 된 또 다른 표현이 한켠에 있다. 그것은 뵐플린이 「르네상스와 바로크」에서 대조한, 명료하고 선적이며 견고하고 고정된 그리고 평면적이며 닫혀 있는 형식과, 회화적이며 깊이 감을 주고 초점이 모호하며 복합적이고 열려있는 형식과의 대조이다. 그것은 실제적, 또는 상상적 세상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방식과 실재의 불투명성과 불명료성으로 인해 읽기 어려운 방식의 대조이기도 하다. 유화로 그린 회화적 작업은 매체의 물질성에 의존하기에 촉각적이다. 두 가지 대조되는 어법이 공존하는 정아롱의 작품은 '창조활동이란 사물의 주요 모습보다 단순하고 보다 강렬하게 볼 수 있도록 부각시키는 행위'(하이데거)임을 알려준다. ● 창의 역할에 충실한 프레스코화나 메탈포인트 드로잉은 뵐플린의 분류법에 의하면 르네상스적이다.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적 사유가 존속하면서도 고대가 재발견되었으므로, 고전적이다. 드로잉 작품은 화면 상단에 일식이 일어나는 장면과 하단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신비롭게 연결시킨다. 여기에는 기호들 간에 일어나는 '신비로운 표류현상'(에코)이 있다. 드로잉 작품은 르네상스 철학의 한 모티프인 소우주 모티프가 발견된다. '인간성 속에는 모든 것이 인간적으로 응축되어 있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적이기 때문'이라고 한 보빌루스의 사상처럼, 대우주는 소우주를 통해 그 진상이 밝혀진다. 캇시러는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서, 르네상스는 인간은 우주에 대하여 그리고 자아는 세계에 대하여 둘러싸이는 동시에 둘러싸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르네상스의 인간은 신과 무한한 우주에 대해 감싸면서 감싸이는 관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캇시러에 의하면, 르네상스시대의 사고에서 유비(analogy)라는 촘촘한 그물을 통해 우주 전체, 즉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를 파악하려는 중세적 사유의 기본 성향이 발견된다,

정아롱_개기월식 시리즈 Lunar Eclipse I~V_종이에 실버포인트 드로잉_각 41×32cm_2014

캇시러는 여기에서 소우주와 대우주의 질서, 원소와 자연의 힘, 그리고 도덕적 능력의 법칙, 삼단논법의 논리적 체계와 실재적 인과의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기본 도식의 반복을 본다. 유비적 사고는 근대의 합리주의에도 이어져 '사고의 질서와 결합은 사물의 질서와 결합과 동일해야 한다'(스피노자)고 생각되었다. 표현은 그 표현된 사물과 유사할 수 있다. 그것은 '사물과 정신을 창조한 신이 자연의 법칙과 어우러져 작용할 수 있는 사고력을 우리의 영혼에 심어준 만큼, 각각의 구조들 사이에는 다소간의 유사함이 있어야 하기'(라이프니츠)때문이다. 「르네상스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에 의하면, 조화는 신이 자신의 작품에 찍은 인장이 되었으며, 신은 이 조화를 근거로 자신의 작품과 인간 정신 사이에 내적이고 필연적인 연관을 성립한다. 쿠자누스에게 유래하는 소/대우주 사상에서 인간은 우주를 묶는 끈으로 나타난다. ● 이러한 사유방식에 의하면, 인간의 구제는 그저 비천하고 감각적인 영역에 불과한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존재자의 구제를 의미한다. 인간의 구원은 단지 자신에게만 새로운 본질을 부여할 뿐 아니라, 우주전체에 새로운 형태를 선사한다는 것이다. 인간성이라는 이념은 대우주에 대해서도 새로운 형태와 의미를 부여한다. 신의 창조를 통해서는 사물들 자체가 생겨나는 반면, 인간정신은 항상 그것들의 기호나 상징에만 관여한다. 신이 사물의 실재를 창출한다면, 인간은 관념적 질서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전자에 실재적 능력이라는 말이 적합하다면, 후자에는 비유적 능력이라는 말이 적합하다. 모상과 원형이 일치될 때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 정아롱의 고풍스러운 작업은 무한히 분열을 거듭해온 현대적 어법을 거슬러, 충만한 일치를 향한다. 이러한 일치를 통해 자연과 예술은 그 생명력이 복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이선영

Vol.20141213h | 정아롱展 / CHUNGARONG / 鄭雅瓏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