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9기 입주작가전

김형곤_정명화_최윤정_황연주展   2015_0109 ▶ 2015_0228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5_0123_금요일_04:00pm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Park Soo Keun Museum in Yanggu County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 (정림리 131-1번지) 제2기획전시관 Tel. +82.33.480.2655 www.parksookeun.or.kr

기억의 잔상 ● 나에게 있어서 예술은 성찰(省察)과 표현(表現)의 한 형태이다. 작품이 관람객과 만난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사 전달의 방법보다도 더 호소력이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관람객의 생각에 대하여 작품을 홍보하지는 않지만, 호기심에 대하여 관람객 스스로에게 자신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의 예(例)로서 기본적인 '드로잉 연구'와 '색상의 사용'과 '구도'가 있을 것이다. 즉, 진정성 있는 작가이기를 위하여 이러한 문제점들을 드로잉(drawing), 모델링(modeling) 및 색사용(use color)의 문제로부터 그 해답을 얻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모방을 통하여 스스로의 통제와 조절로서 생각의 확대 해석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나는, 흔히 볼 수 있는 주변의 모든 것들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빛을 중요시하며 표현하려한다. 인상(印象) 깊게 바라보았던 모든 것들의 기억(記憶, Memory)을 간직하고 있고, 그 속에서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함께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기억들은 현존(現存)의 의미가 있으며, 개인적인 사실들과 주변의 환경적인 요소들이 유기적(有機的)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경험(經驗)에 의한 것들은 존재(存在)와 당위(當爲)의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내 안의 낡은 관념들을 벗어버리기 위한 동기부여(動機附與)를 하고 있는 것이다".

김형곤_Late apples_캔버스에 유채_20.32×25.4cm_2015
김형곤_Study of Nude sketch 2014-Ⅱ_패널에 유채_25.4×20.32cm_2015

이러한 예술적 형태를 토대로 나의 작업에 있어서 자연이라는 소재는 중요하다. 즉 자연은 생(生)의 원천인 모태(母胎)와도 같다. 나는, 소박한 마을의 뒷동산을, 이름 없는 잡풀을, 작은 조약돌의 시내를 사랑한다. 이는 이름 없이 이 땅을 살아간 무명의 민초(民草)의 모습과도 너무 닮아있다. 친숙하게 마주치는 동네 아낙의 모습과 같은 자연(自然)을 통하여 인간(人間) 본연의 삶의 모습에 접근하고 싶다. 자연이 주는 모든 소박함은 나에게 있어서 진정 신성한 힘이며,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 김형곤

정명화_點心_캔버스에 유채_24.2×33.4cm_2014
정명화_나무로부터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4

點心 · 마음에 점을 찍다 ● 시작은 영화의 한 장면, 잡지 속의 어떤 장면으로 부터이다. 그것들은 묘하게 내 눈을 그곳에 멈추어 서게 한다. 무엇이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것일까? 나는 내가 바라보는 대상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느끼고, 또 조각조각 나열해 가며 그림을 그려 나간다. 순간, 그림 속의 대상은 전혀 다른 의미로 재구성되어 변해 간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또한 내가 대상을 통해 보는 것이, 혹은 보려고 하는 것이 왜 타인의 시선이 보는 것, 보려하는 것과 다른 것일까? 어쩌면 내가 그리려고 하는 것은 대상의 전체가 아니라, 내가 보고자 하는 어떤 부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것은 내가 그리려 하는 것이 대상에 투영된 나 자신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 눈을 사로잡고 멈추게 한 것은 나의 감정, 의지, 생각, 기억 등이 모두 뒤엉킨 채 해석을 기다리는 무엇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의 그림은 눈(目)에 속박되지 않아야 하며, 대상을 통해 해석된 내(我)가 그림 속의 대상에 투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그림은 바로 그 결과들이다. ■ 정명화

최윤정_눈물섬_캔버스에 유채_130×260cm_2014
최윤정_눈물섬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4

환시적인 공간, 눈물섬 ● 최윤정은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에「그림자 공간shadow space」, 그리고「눈물섬」이란 제목을 달아주었다. 근작「눈물섬」역시 이전과 동일하게 동시대인들의 삶의 방식을 은유화 하고 있다. 개개인들은 모두 자신만의 작은 섬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사람들이 만든 그 섬이 지나치게 폐쇄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개방적이지도 않은 상황 속에서 유지된다고 본다. 개개인의 감정에 침식되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에 막을 치고 은신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섬에서 잠시나마 자신을 보호하고 위안 받을 수 있는 섬을 만들고 살아간다고 보았다. 결국 그림자 공간과 유사한 맥락에서 또 다른 공간, 환영의 풍경을 만들고 있다. 눈물의 형상을 지닌 것이 구름처럼 떠돌고 액체성의 존재가 흘러넘치고 암시적인 형상들이 마지못해 드러난 그림이다. 거의 초현실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다. 그림은 화면이란 공간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공간의 가시화다. 그림으로 그려진 공간은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현실과 관계하고 있다. 그림그리기는 그 양자 사이에서 벌어진다. ● 그림에는 빛과 그림자의 명확한 관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림자도 부재하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빛의 존재가 희박하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이고 특정한 시간의 자리를 지워버린다는 의미가 있다. 전통적인 동양화이 산수화에서는 그림자가 없다. 시간과 빛에 의해서 판독되는 자연의 어느 한 측면은 자연의 본질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자연은 수시로 사라지고 변화를 거듭하기에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보고 있는 저 풍경은 허상에 불과하다. 서구의 망막중심주의 혹은 빛 중심주의 회화에 반하는 동양회화의 흔적이 이 그림에서 얼핏 드러난다. 또한 그림자 없는 세계란 태양빛에 의존하는 이 물리적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말한다. 작가는 그러한 세계를 이상향, 유토피아로 설정하고 있다. 호랑이와 사슴이 서로 공존하고 코끼리와 뭇 생명체들이 공생한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낙원의 묘사에 유사하다. 아울러 그 장소는 작은 섬을 연상시킨다.「그림자 공간」과 마찬가지로「눈물섬」은 눈물로 이루어진 섬, 실체 없는 섬, 물리적 영역이 아닌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위무의 차원에서만 존재하는 공간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있어 회화란 것도 기실 그러한 실체 없는 영역에 대한 표상이자 덧없지만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환영의 공간일 것이다. ■ 박영택

황연주_타인의 삶_유리에 시트지_가변설치_2015 황연주_잔여물들 residues_양구, 방산, 해안 등지에서 수집한 각종 오브제들, 유리_37×37cm×35_2015
황연주_타인의 삶_단채널 영상_00:27:40_2015 황연주_그녀 She_배구공, 매직, 나무선반에 텍스트_120×25×25cm_2015

타인의 삶 ● 기억의 문제에 천착하여 장소특성적인 설치작업을 보여주었던 황연주 작가가 올해에는 이러한 특성을 가진 강원도 양구라는 지역으로부터 옮겨 생활하며 작업을 시작하였다. 작가가 양구를 매력적인 곳으로 고려하게 된 이유는 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이 있는 고요한 미술관과는 상이하게 군사지역이라는 긴장감이 주는 오묘한 이중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이함은 이념으로 나뉘고 지리적으로 두 개의 국가로 분리 · 대치된 세계 유일무이한 분단국가인 한국상황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황연주 작가가 주목한 자료는 이 지역에서 전사한 당시 나이 어린 학도병들의 명단이었다. 작가는 죽음을 사이에 두고 명단의 이름과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는 살아있는 사람을 찾아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동시에 살아있는 자와의 연결고리를 갖게 하는 보편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 작업에서 이름은 하나의 메타포이자 상징으로 작동하는 기제로서 이름이 주어지는 우연함과 무작위성은 존재와 정체성의 문제로 연계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공유하며 고유한 지속성을 갖게 한다. ● ""이름"은 우리에게 선택권 없이 주어지지만 나의 평생을 함께 한다. 이름을 얻는 순간은 생명을 얻는 순간이며, 그 사람의 됨됨이와 정체성은 그 이름 위에 평생 동안 덧붙여지고 새겨진다. "이름"과 "자아"가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자아"는 나만의 것이지만, 나의 "이름"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어디엔가에서 나와 같은 이름을 나누는 이들의 삶도 나의 삶과 다르지 않다. 즉,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이름처럼 그 고유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전시는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의 삶에 대한 이해를 통해 나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가 되고자 한다." (황연주)오세원

Vol.20150109e |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9기 입주작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