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로서의 파편

박명숙展 / PARKMYUNGSOOK / 朴明淑 / painting   2015_0121 ▶ 2015_0127

박명숙_진리로서의 파편展_갤러리 라메르_2015

초대일시 / 2015_012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라메르 GALLERY LAMER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홍익빌딩 Tel. +82.2.730.5454 www.gallerylamer.com

다시살기의 계속살기-진리로서의 파편 ● 삶의 본래성으로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떠안으면서 그것에 미적 형식을 부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한 과정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 정신분석에 따르면 질서와 평정, 안정을 추구하는 의식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강한 외부자극은 무의식으로 가라앉는다. 의식적 삶은 주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자극으로 구성된다. 무의식적 삶을 은폐하면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영위하는 의식적 삶은 언제나 불안과 붕괴에 직면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것은 나의 삶이다, 라고 단언하는 의식적 주체는 언제나 무의식으로부터 가해지는 충격에 어이없이 무너질 골목들, 틈들, 우연들을 포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명숙_기억수집-다시살기의 계속살기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4

의식의 안전망을 뜯고 홀연히 침입할 무의식적 욕망이나 외상들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늘 위태롭지만, 언제 일상이 붕괴될지 언제 무의식이 의식을 덮치고 교란할지는 사실 예측할 수 없다. 정신분석의 시선으로 본다면 예술가는 평온하고 조화로운 허위의 삶을 반복하길 거부하고 자신을 무의식적 욕망의 회로 안으로 밀어 넣고 그 욕망의 논리를 따를 수 있을 만큼 예민하고 약하고 여린, 그러므로 강한 인간 유형이며, 끔찍한 기억을 반복함으로써 그 기억의 집요함을 긍정하고 그 기억에 붙들리길 자처하는 존재이다. 평범한 삶, 의식적 삶이 누리는 쾌락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쾌락,'향유'를 선사하는 것이 그런 경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고통으로서의 삶을 외면하지 않을 때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모르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만약 예술가가 우리에게 의식의 회로 바깥을 떠도는 파편들, 조각들, 이미지들을 돌려주려 한다면, 이는 삶의 진실은 오직 파편을 통해서만, 찢겨진 이미지 속에서만 현시된다는 것을 이미'알고'있기 때문이다. 조화로운 것, 아름다운 것, 유기적인 것에는 삶의 진실이 없다. 그것은 그저 무언가 표상불가능한 것을 감추고 있다는 정도에서만 의미 있을 뿐이다. 통제와 조작을 통해 평정을 유지하려는 의식적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철저한 수동성으로 내모는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어떤 진리를 경험하게 된다. 삶은 텅 빈 공허 혹은 충만한 결핍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강하게 한다는 것 역시.

박명숙_기억수집-수용하다Ⅰ_캔버스에 유채_130.3×130.3cm_2014
박명숙_기억수집-수용하다Ⅱ_캔버스에 유채_130.3×130.3cm_2014

박명숙은 자신을 괴롭히는, 다시 말해서 자신을 사로잡고 자신을 이용해서 계속 살고 있는 무의식적 욕망의 파편들을 과감히 소재로 사용한다. 오랫동안 재현적 회화, 이야기가 있는 풍경을 그렸던 작가가 과감히 무의식적 욕망 혹은 고통스러운 무의식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심을 했을 때, 내면의 기억 속을 떠다니는 그릇의 파편들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그것은 그릇이었지만 처음부터 깨진 것인지 사용하다 깨진 것인지 모를 만큼 이미 항상 깨져 있는 것들이고,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고, 깨져 있기에'사건'을 함축하고 있고, 그렇기에 어떤 지나감, 파국에 대한 것이고, 그렇기에'진실'에 가까운 소재였다. ● 작가에게 그것은 완전했던 시간, 관계의 영원한 어긋남, 그 순간에 멈춰버린 시계 바늘, 뒤죽박죽으로 쌓여 있는 기억창고를 가리키는 알레고리이다. 재현가능한, 즉 서사를 갖춘 기억은 말하기 위한 것이고, 이음새 없이 봉합된 것이고, 그렇기에 이미 항상 죽어있는 각질에 불과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렇기에 말해질 수 없는 것, 고통과 죄의식을 강요하는 기억은 파편 조각, 부스러기로 기억 어딘가를 떠다닌다. 우리가 아프고 슬프고 우울하다면 그것은 파편들이 우리의 생살을 긁어대면서 심장을 옥죄이며 생채기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마모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파편들의 모서리에 긁힐 때 존재는 전율한다.

박명숙_기억수집-방문하다_캔버스에 유채_27×27cm×60_2014

작가는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도편들, 그 현장의 배우였던 도편들을 캔버스 안에 출현시켜야 했다. 압축파일처럼, 미라처럼, 거의 굳어서 딱딱해져 있던 기억을 건드려서 어떤 형상을 출현시키기 위해 작가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 더욱이 박명숙은 이제 녹록치 않은 삶을 건사해온 50대 중년 여성이 되어 있었고, 깊숙이 묻어두었을 뿐 이별도 망각도 불가능했던 15살 무렵의 상처, 이별, 슬픔을 미적 형상으로 구현하겠다는 고통스러운 임무를 스스로 떠안았다. 그것이 말하게 하라. 상처를 그저 상처라고 부르면서 감춘 채로 잊었다고 연기하는 중에 하냥 시간이 흘렀지만 고통은 무뎌지지도 사라지지도 않기에 바로 지금 작가가 대결해야할 문제로 선택되었다. 더 이상 상처라고 부르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처를 헤집어서 재구성해야 한다. 물론 모든 상처는 예술가의 손을 거치며 노래로 승화될 것이었기에 기다림은 일순간 환대로 바뀔 것이다. 마침내 작가는 깨지고 부서지고 망가진 시간의 부스러기들을 백자병의 동그란 원형을 축으로 모아 어떤 운동성을 발산하는지, 그 운동성이 구심력과 원심력 사이에서 어떤 긴장을 갖게 되는지에 천착한 결과'자신만의' 파편들을 갖게 되었다.

박명숙_기억수집-보듬다_캔버스에 유채_72.7×60.6cm×3_2014

오래 전 술병이나 물병으로 사용되었던 백자병은 이제 우리에게는 지나간 과거의 삶에 대한 관조, 일상적인 식기에 미적인 공간을 집어넣었던 조상들의 여유와 긍정의 태도에 대한 감상, 곡선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 등을 선사한다. 백자병과 같은 호리병의 부드럽고 소박한 원형(圓形)은 넉넉함, 포용, 안전함, 부드러움과 같은 여성적 시각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렇기에 설사 현실의 호리병은 깨질 수 있지만 관념으로서의 호리병은 우리 한국인의 머릿 속에서는 완전한 미적 형상, 이념으로 자리한다. 밥상을 가운데 두고 함께 모여 살던 소박한 삶을 상징하는 백자병의 관념은 작가에게는 깨지고 부서지고 망가진 시간, 기억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욕망이 귀환하려는 삶의 원형(原型)으로 사용된다. 작가의 파편들은 백자병의 둥근 원형을 상기시키며 원형을 복원하려는 듯 모여 있다. 그러나 작가의 욕망은 파편을 이어 붙여 원래의 상태를 찾아내려는 데 있지 않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깨진 그릇 파편들과 관념으로서의 그릇의 어긋남, 일어난 사건과 관념적인 삶의 차이, 실제와 현실의 간극을 보존하는 것이다. 작가의 그릇들은 허공에 떠 있는 듯, 유영하는 듯, 오직 작가의 형상화의 힘에 의지해서만, 초현실적 배치를 통해서 실존한다. 그것들은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무중력의 공간을 떠다니는 파편들처럼, 쌓여있는지 떠있는지 정녕 알 수 없을 만큼 모호하게 모여 있다. ● 박명숙의 캔버스에는 기이한 힘이 깃들어 있다. 그 힘은 상실한 것들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헛되고 지독하고 강박적인 환상을 거부하기에 강한 힘이다. 깨진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것들을 둥그렇게 모으고 슬쩍 어떤 파편에는 무늬도 집어넣고 슬쩍 비교적 온전한 접시에는 한 쌍의 잉어도 그려 넣어서 그것들이 한때 아름다웠던, 한때 사랑하던 이들의 삶의 흔적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상투적 낭만화도 과도한 감상성도 경계하면서 작가는 상처를 남긴 기억, 시간의 위엄을 보존하려고 한다. 살아있는 자에게는 기억을 조작하고 자신에게 면죄부를 부여할 특권이 있다. 우리는 계속 살아야 함으로 그런 비겁함을 필요로 한다. 작가는 그런 타협을 경계한다. 깨진 것은 깨진 것이고, 깨진 것 앞에서 원래의 형태나 상태를 떠올리는 것은 기만이다. 말하자면 일어난 것은 일어난 것이고 그것은 되돌릴 수 없고 현장의 목격자에게 남은 일은 사후적인 서사화를 거부하는 현장의 잔인한 힘을 보유한 채로 계속 사는 것이다. 백자병의 어둡고 풍부한 내부, 심연을 보기 위해 백자병을 깨트린 심미주의자가 있었을까? 공허를 품은 그릇과 공허를 덜어낸 파편들의 병치는'아름답다'. 둘은 빈 자리가 존재를 품는다는 오랜 진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들려준다.

박명숙_기억수집-확인하다_캔버스에 유채_45.5×37.9cm_2014
박명숙_기억수집-소환하다_캔버스에 유채_53×45.5cm_2014

작가는 잊혀지지 않는 15세 여자 아이의 상처와 슬픔을 애도하는 때늦은 의식을 견고한 캔버스 위에서 치르려 한다. 자신의 가장 어둡고 아프고 예민한 시간을 위해 마련한 의식(儀式)은 어둠이 깊을수록 밝음도 크다는 잠언을 떠올리게 한다. 상처를 더 이상 상처로 부르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을 위한 의식이리라. 우리는 내려가기를 자처함으로써 결국에는 올라온다. 계속 살기위해, 그것이 더 이상 나를 아프게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고통이 아닌 사랑이라고 고쳐 부르기 위해, 나를 용서할 수 있도록, 내가 그것에게 다가가는 이러한 능동적'굴욕'의 행위 속에서 지나간 시간과 지나간 삶과 화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우리를 엄습하지도 아프게 하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 시간이 열려있는 빛일 수 있다는 것을 잠시 느끼게 된다. ■ 양효실

Vol.20150120d | 박명숙展 / PARKMYUNGSOOK / 朴明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