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동물

허진展 / HURJIN / 許塡 / painting   2015_0205 ▶︎ 2015_0228 / 화,수요일 휴관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13-9_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162×130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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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5:00pm / 화,수요일 휴관

온유갤러리 GALLERY ONYOU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138-1번지 서울안과빌딩 B1 Tel. +82.31.422.3309 blog.naver.com/onyougallery

허진의 회화미학: 원초적 카오스의 에티카 ● 그림이란 무엇인가, 혹은 그것은 어떻게 그리고 왜 시작되었는가? 이러한 물음이 의문으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은 미술의 역사와 윤리에 대한 회의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그런 와중에 '동굴벽화와 고분벽화'를 떠올렸다. 허진의 석사논문에 게재된 초기 작업 부터 최근까지의 회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림의 시작을 알리는 기원전 15,000년 동굴에 그려진 들소, 말, 매머드, 곰 등에 대하여 고고학자들은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그려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에는 빙하시대에 이처럼 생동감 넘치고 살아 있는 듯이 보이는 동물 그림을 그 시대 그림이라고 믿지 못했었다. 믿기 어려운 최초의 그림은 주거 환경의 미화나 자신의 신체를 치장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예측 불허인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 이러한 미메시스는 현실을 감각적으로 수용하고, 표현하고, 의사소통하는 생명체의 행동방식을 의미한다. 예술은 인간이 문명을 전개하면서 미메시스를 유지해온 정신의 기억-장소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은 정신화된 즉 합리성에 의해 변용되고 객관화된 미메시스이다."(알브레히트 벨머) 허진의 그림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억하려 애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소란하다."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이는 동굴벽화에 나타나는 기법이기도 하다. 질주하는 동물의 모습을 보면, 측면의 시점에서 그려진 형상에 정면에서 본 것을 재현해 놓았다. 그것은 인상적인 것을 기억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기억화(記憶畵)이다. 주술과 기념이 별개가 아닌 세계였다. 그러나 허진의 기억은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좀 다르다. 그의 텍스트가 지닌 특수한 매개성 때문이다. 구술적이기보다는 문자적이라는 의미이다. 문화적 기억으로서 그의 그림은 감각적이고 지각적인 형상을 통한 기억보다는 추상화하는 개념적 기억이 우위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출발점인 동아시아 전통미학에서 기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13-13_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130×162cm_2013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14-3_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34×49cm_2014jpg

「형상성의 서술적 표현양식에 관한 연구」라는 그의 석사논문에 드러나듯이 그의 의도는 명백하다. 현실에 대한 형상의 대응이다. 비록 동시대를 포괄하는 집단적인 형상-기억의 지도는 아닐지라도 그 매개는 그의 실존적 기억이다. 신체적 퍼포먼스를 포함한 형상은 고분벽화에서 잘 나타난다. 즉, 의무적으로 수행되는 안정된 제례의식과 습관 등이다. 그 풍부함은 시각적 매체가 '인간의 표현의 역사적 심리학'의 저장 창고임을 보여준다. 허진의 형상은 감각적이기보다는 개념적이다. 형상이 보여주는 세계는 아직 형상이 없는 원형적인 감정의 표현과, 다른 한편의 형상이 없는 이론적·추상적 계산 사이의 중간지대를 보여준다. 그런데 허진은 역사라는 기억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상징 형식을 살펴본다. '유전과 묵시', '다중인간', '익명인간', '유목동물' 등이 그것들이다. 기억의 내용은 감정에 대한 어떤 '힘의 기록'인 것이다. 감정과 문화적인 표현행위는 상응한다. 허진의 그림은 형상이 담아내는 기억의 기록을 단순히 창고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적인 실재적 삶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요청한다는 의미에서 역사/문화적일뿐만 아니라 실존적이다.

허진_유목동물+인간-문명2014-13_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162×130cm_2014
허진_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2013-1_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162×130cm×2_2013

그래서 초기부터 현재까지 지속되는 화면의 대비와 대조를 통한 강조 그리고 중첩에 의한 역설적인 애매성은 오히려 실존주의적 사유와 정치적 감각을 보여준다. 이에 대하여 그는 스스로 "은연중에 뜻을 나타내어 보이는 다각적 순환 구조"라는 말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내러티브는 닫힌 서사인가, 열린 서사인가? 기억에 대한 박물관적 사유 유형과는 거리가 먼 허진의 회화미학은 단지 정치적 결정과 기술적 장치에 의존하는 방식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럼에도 복구 혹은 복원 생태학과 유사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가 디딘 땅은 역시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문화적 기획으로서 그림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예술이 결국 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무의미의 한가운데에서 의미를 암시하는 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있다."(아도르노) 가상적 화해에 대한 인정이다. 현재의 자연은 아마도 인공적인 대상과 테크놀로지에 의해 유형화된 자연을 초월하여 사이버네틱스까지 포괄하는 그런 자연일지도 모른다. 이런 때에 그는 철학자를 연상케하는 발언을 한다. "더운 여름날 커다란 당산나무 아래서 여유만만하게 축 늘어져 누운 개를 보노라면 온갖 기계적 속박에 둘러싸인 일상적 삶에서 탈주하여 자연에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을 누구나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목적과 실제가 갈등하는 시대에 대한 통찰이다. 우리는 이제 우주적으로 절망하거나 정치적으로 자기 자신을 무능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가끔 회화미학의 평판이 나쁘더라도 그것이 회화의 필연적인 무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현상에 대하여 저주를 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아니기에 예술에 도피처를 만들 수는 없다. 실제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유목이다! 이제 그의 회화는 자연히 정치적/실존적인 이슈는 멀어지게 되고, 개인의 덕이나 구원 같은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허진_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2013-5_한지에 수묵채색, 아크릴채색_145×112cm×2_2013

허진 회화미학의 핵심은 반복인가, 재현인가? 미메시스의 추상화라는 감성의 윤리는 감성적인 것의 가치를 문제 삼는다. 하지만 이러한 감성의 윤리학이 재현될 수 있는 것 위에 근거를 둘 수 있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그 반대 방향의 절차도 별 소용없기는 마찬가지다. 재현에서 순수한 감성적 요소를 추출하여 그것을 재현 이후의 것으로 규정한다.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허진의 화면은 그래서 '감각들의 광시곡'이다. 미묘한 차이들로 강렬한 세계를 체험케 하는 우월한 현실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낯설고 다양하며 카오스적인 것들을 배운다. 차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로 닮아가는 차이들은 유비적/대립적이고 심지어는 동일하기까지 하다.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차이의 배후가 허무라는 사실에 허진은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그의 이후 작업을 지켜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차이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거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지'하거나 재발견한다."(들뢰즈) 재현의 일관성에 저항하는 카오스는 유목적이다. 그리고 반복은 "모든 차이들의 비형식적 존재"이다. 이를 통해 허진의 화면은 각 개체들의 재현이 허물어지는 형상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코스모스를 모범으로 삼는 정의와는 다른 윤리학이 요청된다. 이른바 미학적 인간의 인류학적 사유이다. 새로운/긍정적인 프리미티비즘이라고 할 수 있는 땅을 그는 가고 있다. ■ 김병수

Vol.20150207d | 허진展 / HURJIN / 許塡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