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현실과 초현실의 사이

제2회 종근당 예술지상展   2015_0402 ▶ 2015_0413

류노아_Sacrament_캔버스에 유채_182×227cm_2014

초대일시 / 2015_0402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 류노아_심우현_안두진

주최 / (사) 한국메세나협회 주관 / 아트스페이스 휴 후원 / 종근당 홀딩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인사아트센터 GANA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1. 회화의 두 경향 ● 제 2 회 종근당 예술지상 기획전에 초대된 작가는 2013년 종근당 예술지상 선정 작가인 류노아, 심우현, 안두진이다. 이들의 작업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보면 20세기 중남미의 문학경향(기법)인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 또는 환상적 사실주의에 인접한 회화로 볼 수 있다. 미술사적으로 초현실주의를 경험한 시각예술분야에서 회화와 문학의 결합은 그리 새롭지도 또 불편한 모습도 아니다. 마술적 사실주의란 현실의 모습을 닮았지만 동일하지 않은 풍경의 세계는 관습과 관행, 편견과 학습된 시각에 혼란을 주며 낯선 감정과 시각을 경험하게 한다. 사회비평의 미학적 번안의 예일 수도 있다. 고도로 복잡한 시각적 정보와 언어의 그물망 속에서 전통적인 그림이미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오래전 회화가 갖고 있었던 세계와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기존 현실의 중력을 거슬러 솟아오르는 창작은 초현실적이다. 동시대 회화는 자연스럽게 그 힘을 빌려온다. ● 원로나 중견작가를 제외하고 당대 우리 미술계의 젊은 작가들의 회화를 살펴보면 단순화하고 기계적인 이해일 수 있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형식 또는 스타일에 있어서 두 경향으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화면에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사건과 형태들, 이미지가 복잡하게 난무하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 그리다 만 듯 혹은 잠시 딴청을 피우듯 느슨하고 모호하게 그리하여 현실의 풍경이 흐릿하게 연출하는 경향이다. 여기서 추상회화는 제외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 미술계의 추상미술이 약화되어 최근 신예미술가들의 회화 경향에서 추상미술작가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매우 적고 주목도 덜 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원로와 중견작가들에게서 추상회화가 의미 있게 다뤄지고 있으나 젊은 작가들의 경우에는 추상이 회화보다는 개념미술과 연결된 오브제, 설치, 미디어아트 등과 관련해서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추상회화는 개념미술과 연결하여 이해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시기이다. ● 이러한 상황은 비평적으로 그러한 경향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서 오늘날 삶과 현실에 대한 예술가들의 반응이다. 이는 정확하게도 우리 사회가 많은 사건과 이야기들로 정신없이 변화하고 움직인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림에 과거의 주류 미술사와 비평의 지식과 해석의 방법이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 이번 전시에 초대된 세 작가들의 작업은 두 경향 중 전자에 속한다. 회화가 현실을 재현하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재현하고 있는 현실이 보편적이며 만인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현실인지는 더 많은 시간과 관계, 의미의 비평적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드러날 것이다. 현실은 마치 미로처럼 있고 그런 현실과 관계를 맺는 모습 또한 다양하다. 미로 안에 빠져있는 사람, 미로 밖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사람, 아니면 미로를 관조하는 사람. 회화의 진정성은 각자의 세계와 그들이 공통으로 속한 현실세계가 얼마나 잘 연결되어 있는지에 달려있다.

류노아_고양이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3

2. 류노아, 심우현, 안두진 ● 류노아의 작업은 마치 20세기 전후의 벽화작업을 떠올리는 공장, 건설, 폭력, 고통, 집단적 행동 등 정치경제 또는 사회 비평의 시선을 보여준다. 세계화라는 미명으로 소득격차가 커지고 사회가 보수화되는 현실의 풍경화처럼 보인다. 형식적으로는 초현실주의 전통을 계승한 듯, 관련 없는 이미지, 사건들이 한 장면으로 꼴라주 된다. 사람들은 기계나 로봇처럼 변해버린 인간의 모습, 거칠고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거대한 자연과 사회,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태풍이나 해일처럼 지나가버린 또는 곧 닥쳐올 것 같은 불길한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현실의 그늘, 고통과 갈등과 폭력의 그림자에 삼켜버린 삶을 담고 있다. 인간의 현실은 결코 안전하고 평안하지 않은 채 내동댕이쳐진다. 사람들의 포즈와 표정, 그들이 있는 장소와 환경은 결코 유쾌하거나 풍요롭지 않다. 류노아의 세계는 냉소적인 리얼리즘과 현실비평으로 가득 차 있다. 경제와 정치가 작동하는 현실에서 인간은 부속품처럼 도구화된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인간은 사유하고 성찰하며 존재한다. 비평적 존재로서 인간은 표현된다. 류노아의 조형이미지는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거쳐 전개되었던 정치경제의 부도덕한 면을 드러낸다. 전쟁은 매일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 매달린 꿈 또한 비루하고 비참할 수밖에 없다. 가볍고 순결하며 따듯한 몽상, 현실을 넘어서는 힘이 부족한 시절을 보내는 사람들의 감정이 이미지화된다. 그의 그림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현실 속 모순과 갈등이 제 모습을 갖추려는 듯 건설되고 있다.

심우현_Deer Hunt_리넨에 유채_215×295cm_2014
심우현_여신의 자궁 Goddess Womb_리넨에 유채_210×230cm_2014

심우현의 그림은 익숙한 꽃과 잡초와 나무와 숲과 산등성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그녀의 이미지는 자연의 풍경을 닮아 있다. 몽환적 상태의 주춤거리며 이중삼중으로 겹치는 자연의 식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드로잉과 채색으로 오밀조밀 채워진 화면은 거대한 숲이자 미로를 닮은 벽화처럼 있다. 숲은 정오의 시간, 몽상에 빠져 시간을 길게 늘려 놓고 있다. 몽상하는 것은 문득 떠오르지만 어김없이 망각하는 장소와 시간으로 몰아세운다. 심우현의 드로잉은 결코 개별적이며 특수한 경험의 혼돈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들의 뒤섞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진행하는 재현의 운동이다. 모호하면서 규정할 수 없는 이미지들의 겹침과 혼선이 드로잉 한 사람의 깊은 내면의 운동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드로잉은 그 자체로 운동하는 은유가 된다. 그녀의 드로잉은 현실의 그림자나 환영처럼 암시적이다. 드로잉은 사건과 물질을 꿈과 초현실로 변화시킨다. 그것은 선명한 정신이 꿈꾸는 것처럼 불가능한 구조와 흐름으로 구성된 환상을 보여준다. 간명하고 명료한 형식으로서 드로잉은 거대한 벽화를 위한 방법으로 활용된다. 내밀한 감각과 정서의 변화를 기록하고 표상하는 것으로서 인간, 자연, 자아 뭐가 되었든지 그녀에게 드로잉은 기념비적 장치가 되어버린다. 화가의 그림을 통해 사람들은 숲과 자연의 생명력이 우리의 거주지 주위에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안두진_움직이는 돌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4
안두진_움직이는 돌_Moving Stone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5

안두진은 오랫동안 붉은 비현실적 또는 초현실적 세계의 풍경을 묘사해 왔다. 불길한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엿보는 듯하다. 천둥번개가 치고 돌개바람이 불 것 같은 불길한 조짐이 화면 전체를 감싼다. 최후의 전쟁을 앞두고 나의 운명을 심판할 시간이 곧 당도할 것처럼. 이번 전시에는 거대한 화면에서 점점 작은 화면으로 이동하면서 동시에 큰 바위가 점점 깎여나가 마침내 아주 작은 돌멩이로 변하는 과정을 그 특유의 비현실적 풍경으로 그려놓았다. 세상은 온갖 소동과 혼잡으로 정신없이 돌아가도 바위는 묵묵히 제자리에 뿌리내리고 있다. 변하는 것은 시간과 바라보는 자이다. 사람이 아니 바위의 시각에서 보는 세상은 결코 불길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바위의 현실은 영원성, 항구성 속에 있다. 그것은 영겁의 시간과 찰나의 시간이 동시에 가능한 초현실의 세계이다. 바위가 꿈꾸는 초현실처럼 화가가 꿈꾸는 이미지는 어떤 현실의 조건과 구조 속에 결합해 있어도 기본적으로 현실과 동일하지 않다. 현실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닮은꼴일지라도 꿈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을 넘어선다. 그러나 이는 착시효과이기도 하다. 돌을 굴리는 것처럼 연속된 화면이 실은 현실에 깊이 박혀있는 바위에 대한 단속적인 관찰과 사유라는 점이 바뀌지는 않는다. 3. 현실과 초현실의 사이에서 ● 회화는 현실을 쫓는다. 동시에 꿈꾼다. 그리고 표현한다. 회화는 꿈과 현실, 그 사이를 오고가며 재현한다. 수많은 회화이미지에 사람과 삶과 현실과 초현실이 다양한 비율로 배합되어 있다. 한편으로 누구나 꿈을 꾼다. 당신도 꿈을 꾸고 나도 꿈을 꾼다. 그런데 누구나 살아가는 중에 꿈을 꾸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긍정하지만 그 꿈이 실제 현실에서 벌어진다고 믿는 것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생각한다.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지구 위에 발을 딛고 현실을 만들고 현실을 느끼고 생각하고 있다. 또 그 수만큼의 사람들이 꿈을 꾸고 꿈과 현실을 비교하며 산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의 꿈에 대한 경험으로 실제 숨 쉬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우정을 나누는 현실에 열정적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 우리가 꿈에 쉽게 도취하는 이유는 아무리 행복하고 완전한 현실 또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현실을 만나더라도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실재(Reality), 이상적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과 그 욕망의 충족이 만나는 현실은 초현실 또는 꿈과 붙어있다. 그 맞닿아 있는 경계의 지점에서 우리는 불안하다. 회화는 예술가의 노동을 통해 현실과 초현실을 동시에 포착하려고 한다.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한다. 꿈과 환상에 휩싸인 예술가는 아주 용이하게 현실과 초현실 사이를 넘나든다. 초현실은 흔히 망상이나 비현실, 또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무능력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그런 이유로 배제되고 폐기되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현실을 넘어서는 세계에 몰입하는 예술가는 일상 현실에서 흔히 이상하거나 괴상한 존재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영감을 받아 성찰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 현실이 모두 한 줌의 흙과 먼지로 변하는 필멸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예술은 불멸과 필멸, 현실과 초현실의 사이에서 성실하게 그리고 유쾌하기 제 길을 모색한다. 그것이 이 작가들이 수행하는 일이자, 회화가 여전히 의미 있는 것은 인간과 예술의 의미심장한 관계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 김노암

Vol.20150404e | 회화, 현실과 초현실의 사이-제2회 종근당 예술지상展